망아오진수忘我悟眞髓
천기일련仟技壹練
천 가지 기술을 한 번씩 익히기보단
일기천련壹技仟練
한 가지 기술을 천 번 익혀라
가장 먼저 후각이 사라졌다. 퀴퀴하고 텁텁한 냄새가 어느새 잊혔다.
'나 절대감 아니었나?'
오작은 자신을 찔러오는 여섯 개의 무기를 피하거나 흘리면서 한가하게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 해골들의 작은 움직임마저 느껴지고, 오작 혼자만 빠르게 움직여서 여유가 만만했다.
후각의 뒤를 이은 건 촉감이었다. 살갗을 희롱하던 건조한 바람이 어느새 사라졌고, 손에 잡힌 창 자루의 감각도 잊혔다.
그러나 이미 창은 손과 하나가 된 듯했고, 해골들의 움직임은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려서 아무 지장도 받지 않았다.
이어서 청각이 사라졌을 때, 오작은 한가한 생각을 떠올렸다.
'미각도 이미 사라졌을까?'
창을 연신 내질러 가까운 해골의 투구와 갑옷 그리고 무기를 부쉈다. 그리고 창을 원으로 휘둘러 해골들을 밖으로 밀어냈다.
갑옷과 투구를 잃은 해골들은 밖으로 밀려나다 동족의 공격을 받고 부서졌다.
오작의 공격에 부서진 것과 달리, 다른 해골에게 부서진 뼈다귀는 다시 조합되지 않았다.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한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오작이 직접 부수는 것보다는 나았다.
"놈. 아직도 비전秘傳을 안 꺼낼 셈이냐!"
적무혈이 호통쳤지만, 오작은 듣지 못했다. 들었다고 해도 별 반응 없었을 테지만.
적무혈이 오작을 다그칠 목적으로 해골들을 물리고 직접 나섰을 때, 오작의 눈이 살포시 감겼다.
"이놈 보게. 감히 날 상대로 눈을 감아?"
화가 치솟은 적무혈은 하마터면 원래 목적을 잊을 뻔했다. 다행히 뼈만 남아서 화가 쉽게 풀렸다.
금세 냉정해진 적무혈은 창을 뻗어 오작을 공격했다.
오랜 수련으로 몸에 밴 초식은 숨기는 게 불가능하다. 오작이 관일홍 초식을 한 번도 안 펼쳤지만, 모든 움직임에 관일홍의 그림자가 조금이라도 묻었다. 그냥 평범한 찌르기여도 다른 사람이 펼친 것과 큰 차이가 있다.
덕분에 적무혈은 처음부터 오작의 창술에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줄 뭔가가 있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꽤 긴 시간 관찰하여 관일홍을 어렴풋이 파악했다.
그러나. 관일홍이 단순한 찌르기뿐인 초식이긴 하지만, 하나의 초식이라기보단 찌르기의 한 개 유파라고 부르는 게 나을 정도로 방대하다.
곡선의 궤도에 따라 힘과 속도를 달리하고, 같은 호弧여도 그 방향에 따라 나오는 변초가 다르다. 심지어 같은 궤도와 방향의 호를 그려도 여러 변초가 나올 수 있다.
적무혈은 제대로 펼친 초식을 보고 확신을 얻어야 한다. 설사 적무혈이 관일홍 초식을 정확히 파악했다고 해도, 오작의 초식을 보아 검증해야 한다.
정확한 길을 찾아도 확신하며 성큼성큼 걷는 것과 의심하며 두리번거리고 머뭇거리는 건 큰 차이가 있다. 목적에 이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어떠냐에 따라 결과에 꽤 큰 차이가 생긴다.
적무혈은 긴 무기로 펼칠 수 있는 모든 공격을 오작의 몸에 쏟아부었다. 이제껏 오작이 다칠까 봐 힘을 잔뜩 빼던 것과 달리, 팔다리 하나 정도는 날릴 생각으로 힘을 줬다.
조금씩 오작의 몸에 닿는 공격이 늘었고, 오작이 충격으로 몸을 비틀거리는 횟수도 늘었다. 다행히 팔괘자수선의의 보호로 큰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 몸에 충격이 조금씩 쌓이면서 오작이 점점 불리해졌다.
그러나 오작은 여전히 관일홍을 펼치지 않았다.
오작의 세상엔 두 자루의 창과 자신만 있었다. 한 자루는 오작을 공격하고, 한 자루는 오작을 보호했다. 오작은 두 창의 싸움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공격하는 창이 보호하는 창보다 훨씬 강했다. 창 자체가 더 강하기도 했고, 공격하는 기술 역시 수비하는 창보다 훨씬 우월했다.
'뭔가 이상한데.'
오작은 자신을 보호하는 창의 움직임이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게 뭔지 고민하다가 관일홍 초식에 생각이 미쳤다. 적무혈을 만나고부터 관일홍 초식을 안 펼치려고 애쓰던 것이 주변을 모두 잊은 지금은 절대 명제처럼 오작의 뇌리에 박혔다.
왜 관일홍을 펼치지 말아야 하는지는 이미 잊었지만,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도 관일홍 초식은 절대 안 펼쳤다.
'관일홍을 펼쳐야 해.'
회선창이 더 쉽고 편하긴 하다. 회선창을 백 번 펼치고 관일홍을 백 번 펼친 후 위력을 비교하면 회선창 백 번을 합친 게 더 강하다.
그러나 둘 다 제대로 펼친다는 전제하에선 관일홍이 더 강하다. 특히 상대에게 적합한 공격 경로를 찾아내면 일격필살도 문제없다.
오작은 자신을 지키는 창에게 관일홍을 펼치라고 종용했다. 그러나 창은 완강히 거부했다. 절대적 열세에 처하고 상황이 늘 위태로운데도 고집스럽게 관일홍을 펼치지 않았다.
오작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창을 설득했다. 그러나 창의 고집은 잘 말린 대나무보다 더 단단했다. 단단하게 쪼개질지언정 무르게 살지 않겠다는 대나무처럼 기어코 관일홍을 거부했다.
반격이 점점 줄고 상대의 공격에 적중되는 간격이 점점 짧아졌다. 오작은 머리를 최대한 굴려 지금 상황을 타개하려 애썼다.
'나다. 관일홍을 못 펼치게 막는 건 나다.'
여전히 관일홍을 왜 펼치지 말아야 하는지는 떠올리지 못했지만, 오작은 자신이 관일홍을 펼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음을 인식했다.
'내가 사라지면 된다.'
오작의 생각은 여기에서 멈췄다. 사고까지 멈춘 오작은 두 자루의 창과 자신만 남은 세계에서 자신을 천천히 지웠다.
적무혈은 갑자기 변한 상대의 기세에 흠칫했다. 그러나 역시 차가운 뼈다귀답게 금세 냉정을 회복했다. 그리고 살점 하나 안 붙은 척추로 시원한 얼음물이 쑥 지나갔다.
'이거다.'
완만한 곡선으로 자신의 목뼈를 노리는 공격에 닭살이 돋을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뼈밖에 안 남아 그저 적무혈의 상상으로 끝났다.
창을 맞대기 싫어서 회피를 선택했다. 그런데 완전히 피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상대의 창이 어깨뼈를 스쳤다. 창에 스친 어깨뼈부터 시작해 왼쪽 몸이 덜덜 떨렸다.
'어차피 죽을 수도 없는 몸. 끝까지 지켜본다.'
적무혈은 단단히 다짐했다. 상대의 초식에 너무 빠지면 부지불식간에 똑같은 공격을 펼쳐낼 수도 있다. 지금까지 파악한 상대는 수비를 수호계 법보에 의존하고 공격력만 강하다. 적무혈이 실수로 제대로 된 공격을 펼치면 상대는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망아에 빠진 오작은 자신의 수련을 훨씬 뛰어넘은 창술을 펼쳐 몸에 새겼고, 적무혈은 뼈에 무수한 실금을 그어가면서 관일홍 초식을 훔쳤다.
시간은 느리게 빠르게 덧없이 흘렀고, 망아에 빠졌던 오작이 정신을 차렸다.
'이래서 천 개 초식을 배우면 하나만 익히라고 했구나.'
천 개 초식을 보고 자신한테 가장 알맞은 거 하나만 익히라고 했던 자단의 말이 기억났다. 오작은 자단의 말을 따라 회선창을 가장 많이 수련하고, 관일홍을 그다음으로 수련했다.
'그런 뜻이 아니었어.'
하나만 수련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를 확실하게 익히라는 뜻이었다. 하나만 익히는 과정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를 확실히 익히는 결과를 강조하는 말이었다.
'직선은 곧은 곡선이다. 관일홍에도 회전을 넣을 수 있다. 같은 찌르기를 굳이 초식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망아에서 빠져나온 오작의 초식이 또 한 번 변했다. 관일홍과 관일회선창이 하나로 섞이기 시작했다. 섞이는 과정에 수많은 부스러기가 떨어져 나가고 강하고 순수한 것만 남았다.
"이젠 죽어도 된다."
적무혈은 뭔가 더 있을 것 같아 손속에 사정을 뒀다. 그러나 오작이 관일홍과 관일회선창을 섞는 걸 보니 질투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적무혈은 관일홍도 회선창도 오작보다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둘을 섞는 건 노력보단 재능의 영역이다. 자신은 수백 년 노력해도 어려울 것 같은 일을 오작이 쉽게 해내자 질투의 감정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점점 강해지는 상대의 압박에 오작은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관일홍과 회선창을 합친 창술, 망아의 상태에서 얻은 깨달음, 팔괘자수선의의 보호가 아니었으면 벌써 몸에 구멍이 수십 개 뚫렸을 것이다.
'도망쳐야 해. 이놈을 이길 가능성이 아예 없어.'
결심을 내린 오작은 적무혈과 싸우면서 조금씩 움직였다. 일반 해골은 오작의 발걸음을 잠깐 지체할 수준도 안 되기에 어느새 적무혈의 지시를 받고 물러났다. 덕분에 오작은 적무혈의 창에만 집중하며 조금씩 외곽의 결계를 향해 은밀히 이동했다.
한편.
무저갱에 빠진 치우는 바닥에 떨어진 후 한참 누워 있었다. 원래 무저갱은 바닥이 없는 구덩이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사막과 초원은 물론, 바다와 하늘까지 끝이 있는 마당에 고작 구덩이가 바닥이 없을 순 없다.
겨우 추락의 충격을 해소한 치우는 몸을 일으키고 두리번거렸다. 추락에 일각은 걸린 것 같은 깊은 구덩이에 빠졌는데 어둡진 않았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귀신불 덕분이었다.
"지옥인가?"
치우의 말은 메아리도 없이 조용히 사라졌다. 그리고 주변에서 간을 보던 귀신들이 슬금슬금 몰려왔다.
귀왕의 위엄이 절대적으로 통하는 바깥의 귀신들과 달리, 여기 귀신들은 귀왕을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비록 힘은 귀왕 중에서 수위를 다투는 구묘보다 한참 부족하지만, 겁나서 접근조차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귀왕의 존재와 단전에 있는 귀단의 힘 때문에 사람인지 귀신인지 헷갈려 지켜봤는데, 치우가 입을 열어 말하자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고 덮쳤다.
치우는 슬금슬금 다가오다 갑자기 확 덮치는 귀신을 주먹으로 때렸다. 헛것과 다름없는 귀신이지만, 치우의 주먹에 맞고 멀리 튕겼다. 자신의 공격이 먹히는 걸 확인한 치우는 신나게 몸을 돌리며 접근하는 족족 주먹으로 날렸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귀신이 치우의 몸에 넘치는 귀력을 빨아 먹으려고 몰려왔다. 가벼운 주먹질에도 훨훨 날던 귀신들과 달리 이들은 주먹을 몇 번씩 버텼으며, 심지어 팔다리를 잡고 늘어지는 놈도 있었다.
중과부적衆寡不敵. 치우는 팔다리에 매달리는 귀신이 늘수록 몸을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귀압신鬼壓身(가위눌림)을 경험했다.
"이 잡놈들이."
치우를 꼼짝달싹 못 하게 제압한 귀신들은 단전에 있는 귀갑어 내단의 힘을 빨아가려 했다. 귀갑어 내단의 기운이 다 빨리면 남은 기운과 생기 그리고 원기마저 빨아갈 놈들이다.
이건 목숨이 백 개여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치우는 다급한 나머지 태극보인을 돌렸다. 삼태극이 느리지만 강하게 돌아가면서 귀신들의 흡력에 저항했다.
"귀종술, 만살위귀萬殺威鬼."
만살귀는 살아서 수많은 생명을 죽인 귀신이다. 만살위귀는 귀한 존재고 대부분은 만살광귀萬殺狂鬼다.
만살광귀는 미친 귀신으로 소환한 사람을 제외한 주변의 모든 걸 닥치는 대로 죽인다. 만살위귀는 그나마 말이 통해 소환자가 원하는 바를 들어준다.
안타깝게도 만살귀는 소환에 응하지 못했다. 무저갱이 세상과 분리되다시피 한 곳인 것도 있고, 북망산이 두 개의 결계로 바깥과 분리된 것도 컸다.
"제길, 누가 이기나 해보자."
치우는 팔다리를 잡고 늘어진 귀신들을 떨치려던 발버둥을 멈췄다. 그리고 모든 주의력을 태극보인을 돌리는 데 집중했다.
귀신들의 방해로 천천히 돌아가던 태극보인이 조금씩 속도를 늘렸고, 회전이 빨라지면서 귀력을 빼앗기기는커녕 바깥의 귀기를 단전으로 빨아들였다.
막대한 귀기가 몰려오자 치우의 검은자위가 사라졌다.
귀신은 혼 혹은 혼의 잔재다. 삼혼參魂은 각각 태광胎光과 상령爽靈 그리고 유정幽精의 셋을 일컫는 말이다.
태광은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며 원신元神으로 표현된다. 상령은 지혜를 주관하며 식신識神으로 표현된다. 유정은 욕망을 주관하며 욕신慾神으로 표현된다.
귀신은 삼혼 중에서 유정이 가장 많고 태광이 가장 적다. 귀신이 되어서도 삼혼이 균형을 이루면 귀왕이나 대력귀나 영리귀와 같은 높은 수준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귀신은 유정의 힘이 강하여 욕망밖에 없다.
치우의 태극보인에 저항하지 못한 귀신은 대부분 유정뿐인 하찮은 놈들이다. 유정이 늘어나며 머리와 오장육부에 깃드는 상령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바람에 검은자가 사라졌다.
반대로 상령이 넘쳐나면 태광과 유정이 눌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혜를 타고난 자들 대부분은 몸이 허약하고 단명하며 일반인과 다른 욕망을 표출한다.
태광이 넘쳐나는 자들은 대부분 아둔하고 고집이 세나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지 않고 억누른다.
귀기를 흡수하며 유정만 넘치게 된 치우는 자기 욕망에 충실했다. 그리고 치우의 가장 큰 욕망은 생존과 강해지는 거였다.
다행히 두 욕망은 서로 상충하지 않았다. 치우는 귀기를 더 탐스럽게 빨아들여 강해지는 동시에 생존 능력도 드높였다.
그리고 치우만큼 바쁜 존재도 있었다. 귀왕 구묘는 갑자기 몰려든 귀기에서 잡스러운 것들을 골라 밖으로 버리는 데 열중했다. 그렇지 않으면 유정이 오장육부는 물론 태광이 머무는 광명대光明臺까지 점령하여 치우가 활귀活鬼(산 귀신)가 될지도 모른다.
- 작가의말
망아오진수 - 자신을 잊은 상태에서 핵심을 깨닫다.
적무혈은 아주 훌륭한 단백질원 아니고 아주 훌륭한 수련 대상입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무료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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