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반도령桃山蟠桃嶺
도산유지桃山有池
도산엔 연못이 있으니
기명요지其名瑤池
그 이름이 요지더라
치우도 오작도 눈앞의 광경에 압도당해 넋을 잃었다.
오장국보다 훨씬 큰 면적을 차지한 산은 마치 잘 훈련된 정병처럼 가지런히 줄을 선 복숭아나무로 빼곡하다. 그리고 계절에 안 어울리게 나무에 복숭아가 주렁주렁하다.
시집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색시의 볼처럼 빨갛게 잘 익은 복숭아도 있고, 아직 파릇파릇 풋내 가득한 복숭아도 있었다.
열매가 없고 잎도 다 떨어뜨려 앙상한 나무가 있는가 하면, 파릇파릇한 잎사귀와 함께 꽃망울을 지는 나무도 있었다.
"여긴 첫 욕수가 살던 곳이야. 그래서 사계절이 가을이지."
봄은 탄생 혹은 부활, 여름은 성장, 가을은 수확, 겨울은 끝과 시작. 이파리를 떨구고 틔우고 꽃망울을 뽑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은 극히 짧고, 수확의 계절이 긴 도산.
"이게 다 반도야?"
"아니. 반도령이라고 따로 있어. 그저 순찰만 하는 다른 봉우리와 달리 반도령은 울타리를 치고 정규군이 지키지."
"그럼 이 복숭아나무들은 뭐야?"
"반도 씨를 심은 거. 그런데 반도령은 씨를 심어도 새 나무가 자라지 않고, 다른 곳에 심으면 평범한 복숭아나무가 돼."
오는 내내 고민했던 오작은 드디어 마음을 정했다.
'이게 운명의 이끎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내 모든 재주를 써서 어떠한 난관도 헤치고 나갈 테다.'
"자, 이제부터 은신술 펼치고 내가 밟는 곳만 밟아."
소소와 치우의 모습이 사라지고, 잠깐 뒤 오작의 모습도 사라졌다. 오작은 아직 법술로서의 은신술을 펼치지 못한다. 그래서 치우가 은신술로 오작을 도왔다.
인면홍지주의 인면을 제물로 바쳐 소소의 은신술이 훨씬 은밀해졌지만, 오작의 절대감 역시 경지의 상승과 더불어 훨씬 예민해졌다.
덕분에 오작은 소소의 은신술을 뚫고 어딜 밟는지 똑똑히 보았고, 치우는 오작이 밟는 곳을 그대로 따라갔다.
셋은 걷는 속도보다 조금 느리게 움직였다. 도산의 면적이 웬만한 나라 크기여서 중심에 있는 반도령까지 열흘이나 걸렸다.
배고프거나 갈증이 나면 복숭아로 해결했고, 하루에 두 시진씩 은성진을 치고 안에서 휴식했다.
만약 평범하게 낮에만 걸었으면 반도령에 가기까지 며칠은 더 걸렸다.
'여기는 제멋대로구나.'
나무와 나무 사이 간격이 똑같아 열흘 동안 지겨워 죽을 뻔했다. 게다가 나무들 모양새도 비슷하여 정신력이 약한 사람이라면 걷다가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 나무들이 아무렇게나 자리 잡고 생김도 제멋대로인 반도령을 보니 속이 시원하게 풀렸다.
- 더 느리게 움직인다.
그냥 평범한 자들이 순찰만 하는 다른 곳들과 달리 반도원은 법술로 친 울타리도 있고 높은 초참을 세워 주변을 살피는 보초도 있었다.
그리고 순찰하는 자들도 오는 길에 봤던 자들보다 훨씬 강한 기세를 풍겼다.
오작은 소소의 말을 손으로 치우에게 전달했다. 치우와 소소는 상대 은신술을 간파할 수 없어 서로 못 보는 상황이다.
셋은 달팽이가 뒤돌아보며 비웃을 정도는 아니어도 꽤 느리게 움직였다. 그래서 휘영청 달 밝은 밤이 되어서야 겨우 소소가 말한 '개구멍'에 도착했다.
- 수영 자신 있지? 물 밑으로 움직여야 해.
소소는 조심스럽게 냇물로 들어갔다. 넓이가 이 장(3.4m)에도 못 미치는 냇물인데 안에 들어간 소소가 보이지 않았다.
오작은 소소의 말을 치우한테 전달한 후 냇물로 들어갔다. 치우 역시 물이 안 튀게 조심하며 냇물에 몸을 담갔다.
- 울타리에 유일하게 난 구멍이야. 여기도 지키는 놈이 있으니 조심해 움직여.
- 누가 지키는데?
소소는 오작을 향해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누가 지키는지는 소소도 모른다.
셋은 개울 바닥을 밟으며 반도령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치우는 수영해야 하는 줄 알고 조금 긴장했었지만, 걸어서 움직이자 시름이 푹 놓였다. 수영 실력은 조금 부족해도 숨을 참는 건 자신 있었다.
냇가에 와서 물을 마시는 사람도 있고 세수하는 사람도 있어서 자주 멈춰야 했다. 그리고 가끔 숨 마시려고 수면으로 떠야 해서 셋의 움직임은 느려터졌다.
그러나 반도원에 들어간다는 긴장과 흥분으로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었다.
- 새우 요괴다.
울타리를 지키는 건 새우 요괴였다. 그것도 입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는 머리 부위를 강철 투구로 꼭꼭 감싼 놈이었다.
원래 지키는 놈이 도둑놈 되기 가장 쉽다. 그래서 새우 요괴의 입을 막아 반도를 훔쳐 먹을 생각을 아예 떠올리지 못하게 한 듯하다.
- 내게 방법 있다.
오작은 치우 눈앞에 손바닥을 갖다 댄 다음 글자를 또박또박 적었다.
- 환락귀 불러.
치우는 생각만으로 환락미귀歡樂迷鬼를 불러냈다. 소환된 환락귀에게 치우는 소소의 황금을 보상으로 줬다.
황금을 흡수한 환락귀는 치우의 지시에 따라 새우 요괴한테 접근했다.
채 반의반 각(4분 미만)도 안 되어 새우 요괴는 손에 든 창을 버리고 환락귀와 함께 격렬한 춤을 췄다.
구부정한 허리를 접었다 폈다 하고 꼬리를 강하게 털면서 완전히 신난 모습이었다.
셋은 새우 요괴에게 안 들키게 조심하며 천천히 움직여 물이 나오는 구멍으로 들어갔다.
"이젠 말해도 돼. 안엔 지키는 사람 없으니까."
서왕모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잘 믿지 않는다. 반도원은 오직 서왕모 본인만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
심지어 서왕모의 친딸인 칠선녀도 자의로 출입할 수 없고, 서왕모의 허가서를 수비대에 보여줘야 한다.
"문이 있고 들어오는 방법을 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작의 말에 소소는 혀를 쑥 내밀었다.
"그렇게 말 안 하면 반도 도둑질을 반대했을 거 아니야."
"정확하지 않은 정보로 일을 그르칠뻔했죠."
"아, 미안미안. 저길 못 건너면 그대로 돌아가면 되는데 뭘 또 그렇게 진지해."
오작은 말없이 소소를 바라보기만 했다.
"진짜 미안. 다신 거짓말하지 않을게. 함께 다니려면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내가 생각이 짧았어. 됐지?"
'애 둘 키우는 기분이야.'
오작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근래 소소와 치우가 죽이 잘 맞으며 분위기가 무척 좋았다. 덕분에 오작 역시 호젓한 기분으로 여행할 수 있었다. 곧 헤어질 소소한테 끝까지 잔소리를 늘어놓기 그래서 할 말이 많은데도 억지로 참았다.
'다른 사람은 나처럼 늘 곤두세우고 살진 않겠지.'
오작은 감정을 잘 숨기지만, 참으며 살진 않는다. 칭찬엔 인색하지만, 자신에게 피해가 올 것 같은 행동을 지적하는 덴 서슴없었다.
그러나 치우에 이어 소소까지 두 철부지와 다니면서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합리적이기만 하던 성격에 조금 융통성 비슷한 게 생겼다.
"자, 그럼 천년 반도를 훔치러 갈까?"
소소는 반도원에 들어온 게 신났는지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반도가 몇 년 됐는지 구분하는 방법을 압니까?"
"너도 몰라?"
소소는 은연중에 오작이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한 듯했다.
"영리귀 불러야 하나?"
치우는 유독 영리귀 부르는 걸 싫어했다. 웬만한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툭하면 재밌는 이야기 들려달라고 조른다.
오작이 대신 얘기해주면 공짜로 들었다고 좋아한다. 치우가 직접 들려줘야 보상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근데 왜 저 나무만 다릅니까?"
눈에 들어오는 나무 대부분이 푸른 잎사귀와 더불어 탐스러운 열매가 달렸는데, 작은 연못 곁에 외로이 선 나무만 이파리 몇 없이 앙상했다.
"나이 많아서 그럴 거야. 여기서 가장 오랜 나무라고 해. 그리고 저 연못은 아름다움으로 서부에 유명한 요지야."
요지와 가까운 나무들이 키가 높고 달린 복숭아도 특별히 커 보였다. 셋은 일단 요지를 목표로 움직였다.
청명한 하늘이 비친 요지는 무척 아름다웠다. 지름이 몇 장 안 되는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넓고 깊이 느껴지는 신비한 연못이었다. 요지를 잠깐 구경한 셋은 바로 주변의 나무들로 관심을 돌렸다.
꾸르륵.
조용하던 반도령에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어느 복숭아가 더 큰지 비교하던 셋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다.
"두꺼비야."
요지에 몸을 담근 채 머리만 내민 두꺼비의 등은 썩은 곰팡이가 자란 것 같고 눈알이 시뻘겠다. 앞다리는 기이하게 뒤틀렸고 뒷다리는 그나마 건실해 보였다.
보통 두꺼비가 징그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생기가 느껴져서 거부감이 크게 들진 않는다. 그러나 눈앞의 두꺼비는 눈길을 돌리고 싶을 만큼 혐오스러운 모습이었다.
아름다운 요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꺼비다.
"구르륵."
두꺼비가 주머니를 부풀려 소리 냈다.
"우리랑 같은 편이라고 하는데?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치우가 용케 두꺼비 말을 알아들었다.
"꾸르륵."
"형더러 왼쪽 나무에 달린 복숭아를 따 먹으라는데?"
치우의 말에 소소가 타박했다.
"너 진짜 알아들은 거 맞아? 딱 한 마디만 했는데 뭔 해석이 이렇게 길어? 그리고 저 나무에 복숭아가 어딨어?"
"요괴 말은 원래 짧습니다."
오작은 소소의 말에 대답하며 두꺼비를 살폈다. 상대가 풍기는 호의적인 느낌에 흉측한 외관을 보고도 혐오감이 생기지 않았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작은 절대감을 발휘하여 나무를 살폈다. 그러곤 나무의 가장 높은 가지에서 작은 복숭아 하나 발견했다.
보통은 무게 때문에 꼭지 부분이 하늘을 향하고 뾰족한 부분이 땅을 가리키는데, 작은 복숭아는 마치 거기에 올려놓은 듯이 뾰족한 부분이 하늘을 향했다.
오작은 경공으로 몸을 가볍게 한 다음 풀쩍 뛰었다. 가장 높은 가지 끝에 달린 복숭아는 오작의 손이 닿자 힘도 안 줬는데 뚝 따졌다.
"진짜 먹어도 되냐고 물어봐 줘."
치우는 빈손을 들고 진지하게 얘기하는 오작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소소와 눈을 마주쳤다. 소소의 눈에서 '얼음이 미친 거 아닐까?'라는 의문을 읽은 치우는 다시 오작을 바라봤다.
"꾸르르르르르륵."
두꺼비가 길게 말했다.
"빨리 먹으라는데?"
"야. 왜 저리 긴데 해석은 짧아?"
"말에 담긴 간절함이 표현하기 어려워서 그래."
오작은 더는 고민하지 않고 복숭아를 입에 가져갔다. 작은 복숭아는 몇 입 뜯어먹으니 바로 씨가 나왔다.
소소와 치우는 아무것도 없던 오작의 손에 갑자기 커다란 씨가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꾸르륵."
"씨를 자기한테 달래."
오작은 손에 든 씨를 어느새 연못 밖으로 나온 두꺼비 앞에 갖다 놨다.
"꾸르르륵."
"반도 훔치러 온 거 맞느냐고 하는데?"
"맞습니다."
"꾸르륵. 꾸르르륵."
"저 나무에 세 번째로 높은 가지에 달린 복숭아가 천 년이 넘은 중에서 가장 좋은 거래. 저걸 딴 다음 가장 빠른 속도로 돌아와서 이 나무에 숨으라는데. 기척을 죽이고 눈도 감아야 하고, 자기가 신호 주기 전엔 절대 눈도 뜨지 말고 내려오지도 말아야 한대."
오작은 소소와 치우한테 미리 나무 위에 가서 숨으라고 했다. 소소의 경공이 오작보다 뛰어나긴 하지만, 이런 중대한 일을 맡기기엔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오작은 허리를 숙여 두꺼비에게 인사한 후 목표한 복숭아나무에 다가갔다. 훌쩍 뛰어 반도를 따 소매에 넣은 후, 경공을 최대로 펼쳐 요지 곁의 나무로 돌아왔다.
치우가 손으로 오작의 팔을 잡으며 은신을 돕자 오작 역시 기척과 존재감을 죽여버리며 눈을 감았다.
우르르 쾅쾅!
"끼아앗!"
미리 마음의 준비를 안 했으면 귀를 찢는 소리에 나무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어떤 놈이 내 반도를 훔쳤어!"
오작이 들었던 소문이 맞는다면, 갑자기 나타난 존재는 서왕모가 틀림없다.
서부의 실질적 지배자인 서왕모는 소리 지르기 좋아한다.
"흥. 감히 반도원 안에서 내 눈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서왕모는 혼자서 악다구니를 한참 쓰다가 드디어 진정하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이대로 들키는 게 아닌지 걱정되어 가슴이 조마조마할 때.
툭 소리가 커다랗게 들리며 서왕모의 주문이 멈췄다. 치우와 소소는 모르지만, 오작은 절대감으로 두꺼비가 입에 물었던 복숭아씨를 뱉었음을 알았다.
"네년이야? 또 네년이었어?"
서왕모는 허공에서 가시가 가득한 채찍을 꺼내 두꺼비를 후려쳤다. 두꺼비는 피할 엄두도 못 내고 금속 실로 짜고 뾰족한 가시를 가득 박은 채찍에 얻어맞았다.
"열흘 동안 잠도 못 자게 밤낮없이 울어대서 귀찮게 하더니, 날 피곤하게 만들고 반도 훔칠 생각이었어? 토해, 어서 토해 내!"
"꾸르륵."
"죄송할 일을 왜 해? 네년은 도대체 왜 태어난 거야? 일부러 날 애먹이려고? 날 기 채워 죽이려는 속셈이었어? 넌 먹어봤자 배부름도 못 느끼고 갈증도 해소하지 못하잖아. 그걸 뻔히 알면서도 왜 내 귀한 반도를 먹냐고!"
채찍 소리가 매섭게 울렸다. 그러나 두꺼비는 비명 한 번 안 지르고 묵묵히 견뎌냈다.
"법력이 아까워서 풀어줬더니 그새 또 사고 치는구나. 다시 유황천硫黃泉에 처넣어야겠어."
서왕모는 두꺼비를 요지로 걷어찬 후 주문을 외웠다. 요지가 썩은 냄새를 풍기며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서왕모는 두꺼비를 요지에 가둔 후에도 한참 소리 지르다가 사라졌다.
- 작가의말
새우 요괴 클럽 데려다주면 기절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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