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단요수촌跡斷妖獸村
재미심규財迷心竅
재물에 마음이 미혹되면
생사도외生死度外
생사를 도외시한다
두 무리가 대치했다.
하나는 애꾸눈 붉은 여우가 패잔병 모습을 한 백여 마리 요괴를 거느린 무리고, 하나는 단단한 갑옷과 부적을 덕지덕지 붙인 투구를 쓴 인간 정예부대였다.
중부와 서부와 북부의 변경에 놓였지만, 서부는 경계사가 통행을 막았고 중부는 요괴와 마수들이 출입을 불편하게 했다.
덕분에 요수촌이 큰 피해를 보았다는 소식이 북부에 가장 먼저 알려졌으며, 군대를 파견한 것도 북부가 제일 빨랐다.
천하를 다섯으로 나눌 때 정확히 선을 긋고 서로 협정을 맺은 것이 아니기에, 요수촌처럼 애매한 곳은 누구든 차지할 수 있다. 경계사가 있어 통행이 불편하며 국가 경내에 광산이 많은 서부는 아마 그냥 포기하겠지만, 중부 국가들은 연합하여 요수촌을 노릴 가능성이 크다.
북부 입장에선 중부의 군대가 오기 전에 요수촌을 차지하고 지배력을 공고히 해야 한다. 안 그러면 요수촌 요괴들과 피 터지게 싸우다가 어부지리를 내줄 수 있다.
다급한 북부 군대와 마찬가지로, 요수촌의 요괴들은 북부 군대를 빨리 몰아낸 후 전력을 회복 및 정비해야 한다. 그래야 늦게 도착할 중부 군대를 물리칠 가망이 조금이라도 커진다.
서로 급한 사정이어서 매번 상대를 몰아낼 각오로 싸웠다. 그러나 공격이 강한 요괴는 수비가 약하고, 수비가 강한 인간 군대는 공격이 약해 승패가 쉽게 갈리지 않았다.
오늘도 요괴와 북부 군대는 기세로 상대를 압박하며 돌진할 기회만 노렸다. 첫 충돌에서 얼마큼 큰 피해가 발생할지는 기세 싸움의 결과에 달렸다. 기세 싸움에서 진 쪽은 수비 태세로 나와야 하기에 피해가 클 수밖에 없고, 상대의 첫 공격을 적은 피해로 막아내지 못하면 당일 싸움은 지게 된다.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팽팽하게 맞서던 기운이 흔들렸다. 제삼자의 개입으로 기세 싸움이 중단되자 양쪽 모두 투지가 사그라들었다.
억지로 기세를 다시 끌어올려 싸워봤자 진흙탕 개싸움이 된다. 힘만 빼고 서로 얼마 죽이지도 못하며,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자괴감이 들면서 아군 투지를 깎아 먹을 뿐이다.
"몸이 검은 연기로 싸인 키가 이만큼 되는 놈을 찾습니다. 열흘 남짓이 추적해 왔는데 여기에서 흔적이 사라졌더군요."
오작은 치우를 만나도 제압할 힘이 없다는 생각에 황무지를 천천히 달리며 창술 수련에 몰두했다. 여전히 성장을 멈추지 않은 몸으로 창을 다루며 뜻밖의 깨달음을 얻었고, 이젠 육체의 변화 때문에 창에 힘을 제대로 싣지 못하고 노리던 곳이 빗나가는 일은 사라졌다.
"너 뭐 하는 놈이야?"
북부 군대의 지휘관이 오작을 향해 소리 질렀다.
"우리도 모른다."
적호는 오작을 알아봤다. 요수촌에 환란을 몰아온 장본인 중 하나지만, 지금은 북부 군대만으로도 벅차기에 오작의 죄를 물을 여력이 없다.
"흔적이 여기에서 끊어졌는데 뭐라도 본 게 있을 거 아닙니까."
그때 굵고 긴 화살 하나가 오작을 향해 날아왔다. 자신을 무시하는 오작에게 심통이 난 북부 군대 지휘관이 활을 쏜 것이다.
활은 만들기도 어렵지만, 쉽게 부러지고 망가져서 손질을 자주 해야 한다. 게다가 화살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크게 환영받는 무기가 아니다.
활도 제대로 만들고 화살도 제대로 만들어야 그나마 살상력을 기대할 수 있기에, 사냥꾼들이 약한 짐승 잡을 때나 사용한다.
오작은 소매에서 창을 꺼내 날아오는 화살촉을 창끝에 맞췄다. 제대로 만든 활과 화살에 보기 드문 명궁이 쏘며 필살을 자신했는데, 오작의 창끝과 부딪친 화살은 그대로 멈춰서 부르르 떨다가 바닥에 힘없이 툭 떨어졌다.
"후퇴한다."
북부 군대의 지휘관은 바로 퇴각을 선언했다. 상대가 법술이 아닌 순수한 무공으로 자신의 화살을 막았음을 알고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
북부 군대가 물러나자 요괴들은 혀로 상처를 핥거나 수련으로 기운을 회복했다. 연속 싸우다 보니 과도한 법력 사용으로 회복이 어려워져 특별히 심혈을 기울여 수련해야 법력을 모을 수 있다.
"거래를 하지."
적호가 하나만 남은 눈을 반짝이며 오작에게 제안했다. 웬만한 상처는 바로 회복하는 요괴인데, 애꾸가 된 걸 보니 꽤 높은 수준의 공격에 당한 듯했다.
"내일이면 놈들이 또 올 거야. 우릴 도와 놈들을 물리치면 단서를 알려주지.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도, 누구랑 함께 떠났는지는 본 요괴가 많아."
오작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표정과 달리 속으론 크게 안도했다. 누군가와 떠났다는 건 치우가 무사하다는 뜻이다. 더구나 치우가 정신을 차렸을 가능성도 포함하고 있어 요수촌에 도착하기 전보다는 마음이 훨씬 놓였다.
한편.
북부 군대의 지휘관인 역목力牧은 깊은 고뇌에 잠겼다.
'요수촌을 점령하지 못하면 지금까지 한 고생이 물거품 된다.'
역목의 부족은 말과 양을 키운다. 말은 키우는 게 어려워서 주로 어린 야생마를 잡아 길들이는 방식이고, 양은 번식을 통해 안정적으로 숫자를 관리한다.
문제는 양이라는 놈들이다. 이놈들은 풀이고 나무고 뿌리까지 먹어 치우는 습관이 있다. 한곳에 오래 머무르면 아주 빠르게 먹을 것이 결딴난다.
그 탓에 역목의 부족은 전사도 많고 부유한 주제에 나라를 못 이루고 계속 떠돌아다녔다.
이번에 공공이 요수촌을 점령하면 땅이 없는 나라로 인정해 주고, 북부의 모든 국가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게 허가서를 내준다고 했다.
비록 공공의 힘이 북부 전체에 미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억지를 부리며 역목의 부족에게 많은 재물을 요구하던 국가들이 조금이라도 양보하게 할 수 있다.
그렇게 절약한 재물로 부족을 강하게 키우면 언젠간 넓은 초원을 차지한 강한 국가로 거듭날 수 있고, 역목 자신이 흑제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갑자기 요괴들한테 호의적으로 보이는 어마어마한 놈이 나타났다. 조잡하긴 해도 백 마리가 넘은 요괴의 기운은 약하지 않았고, 말에 안 탔어도 역목의 부족 전사들의 기세는 정갈했다.
두 무리 사이에 끼어들어 양쪽 기세를 동시에 수그러들게 한 상대의 경지도 놀라웠고, 자신이 쏜 화살촉을 정확히 창끝으로 맞추는 무공도 대단했다.
잘 만든 활이고 잘 쏘아진 화살이어서 흔들리지 않은 점이 상대에게 유리했겠지만, 곧게 가는 대신 속도는 다른 궁수보다 훨씬 빠르다.
조금만 빗맞아도 화살에 몸이 뚫리는 위험한 상황에 굳이 창끝으로 막았다는 건, 무공이 대단할 뿐만 아니라 자신감도 어마어마하다는 뜻이다.
품은 무공과 경지에 어울리는 정신 수양까지 갖춘 상대여서 요행을 바라기도 힘들다.
'거의 다 왔는데.'
구왕과 흑호 그리고 거산은 이미 죽었고, 밀웅파는 떠났다. 일 년의 절반을 잠자야 하는 밀웅파이기에 영지가 없는 곳에서 살 수 없다. 치우한테 영지를 파괴당한 곰들은 졸린 눈을 억지로 뜨며 만만한 요괴 영지를 찾아 요괴촌을 떠났다.
남은 건 적호와 모기 요괴뿐인데, 모기 요괴들은 딱히 우두머리가 없다.
그렇게 적호가 요괴들 우두머리가 되었고 역목이 몰래 날린 화살에 눈 하나 잃었다. 한두 번만 몰아치면 승기를 잡을 수 있고, 며칠 시간이면 남은 요괴들을 모두 정리할 자신이 있었다.
"부족. 손님 있다."
역목은 떠듬거리며 말하는 부하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쏘아봤다.
"두목, 손님 있다."
"손님 왔다가 맞는 말이야. 그리고 부족장이라고 부르라고 몇 번 말했어. 두목 말고 부족장! 제길, 이런 놈이 부장副將이라니."
역목이 사정이 있어 자리를 비우면 군대를 통솔해야 할 놈이다. 그런 놈이 말도 제대로 못 하니 억장이 무너지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그래도 내가 더 똑똑하다."
한 마디도 지려고 하지 않는 부장에 가뜩이나 끓던 속이 폭발 직전까지 갔다.
"누구야?"
"공주다. 어느 나란지는 던져버렸다."
"잊어먹었다가 맞는 말이다. 이 둔골아."
"좋았다. 들여올까?"
"알았다. 들여보낼까가 맞아. 정중하게 모셔라."
부장은 싱글벙글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역목이 있던 천막 안이 환해졌다.
"아니. 빙령도의 설영 공주 아니십니까. 여긴 어쩐 일로."
놀란 나머지 역목은 말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빙령도부터 요수촌까지 만 리는 몰라도 팔천 리는 되는 거리다. 요수촌의 환란이 알려졌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 찾아오는 건 불가능하다.
"키가 일 장 정도 되고 자색 옷에 황금색 신발을 신은 재수 없이 생긴 놈 못 봤어? 길이가 십이 척에 조금 못 미치는 창을 쓰는 놈이야."
역목은 설영 뒤에 선 무사와 눈을 맞췄다. 몇 번 만난 적 있는 무사는 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대결하여 졌다고? 바로 물러나길 잘했구나. 설영 공주를 이길 정도라면 난 어림도 없지.'
역목도 강한 전사가 분명하지만, 말을 타야 진짜 위력이 발휘된다. 그러나 말을 끌고 왔다가는 요괴들의 표적이 될 게 뻔하기에 일부러 사람만 왔다.
게다가 말을 탔다고 쳐도 역목은 설영의 상대가 아니다. 그런 설영을 이긴 상대한테 화살 하나만 쏘고 물러난 건 참으로 잘한 결정이라며 속으로 안도했다.
"그자는 지금 요수촌의 요괴와 함께 있습니다."
"가자."
필요한 얘기를 들은 설영은 바로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잠시만요. 지금 우린 요괴들과 싸우는 중입니다. 공주께서 이대로 가면 놈들이 좋은 얼굴로 맞이하지 않을 겁니다."
역목의 만류에도 설영은 천막을 나가려 했다. 다행히 함께 온 무사가 문을 막아 제지했다.
"공주. 요수촌 요괴나 인간은 자신들을 북부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이대로는 저와 공주의 목숨까지 위험합니다."
"난 그냥 일대일로 대결하려는 거야. 지난번처럼 제한 안 두고 제대로 된 대결을."
역목은 머리가 매우 좋은 편은 아니지만, 멍청하지도 않다.
"그럼 내일 우리 전사들이 요괴들과 싸울 때 따로 대결하시면 되겠습니다. 요괴들이 끼어들어 대결을 방해하지 못하게 제가 돕겠습니다."
"공주, 부족장의 말에 따르지요. 대결을 앞두고 몸과 마음도 다스려야 하고요."
무사의 말에 설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자자. 내일이 최후의 일전이 되도록 만전을 다하자고."
요수촌 주민들은 모기 요괴들이 만든 음식을 먹어 힘을 보충했다. 평소 배만 불리는 음식이 아니라 법력과 힘을 빠르게 회복하는 보양식이었다.
안에 지네나 구더기 등 인간이라면 학을 뗄 재료가 가득 들어갔지만, 요괴들은 오히려 침을 질질 흘리며 음식 그릇에 주둥이를 처박았다.
상대에게도 지원군 둘이 생긴 걸 모르고 요수촌 요괴들은 다 이긴 것처럼 들떴다.
개개인의 실력은 요괴들이 당연히 우위지만, 상대는 훌륭한 갑옷과 각종 법술을 막아주는 투구를 썼다. 거기에 진법을 만들어 모두의 힘을 모아 강하게 사용하기에 요괴들은 힘의 확연한 우위에도 승기를 잡기는커녕 지속하여 손해만 봤다.
그러나 오작이 단신으로 진법에 찌르고 들어가 흔들어준다면 승산은 요괴들한테 온다. 치우의 주먹에 죽은 거산이 있었다면 딱 알맞은 역할인데, 밀웅파까지 떠난 요수촌엔 강한 공격력과 수비력을 겸비한 요괴를 눈 씻고도 찾을 수 없다.
"중부의 군대는 언제 옵니까?"
오작의 질문에 적호는 눈알을 딴 데로 굴리며 모르쇠를 놓았다.
"중부의 군대가 곧 들이닥치는 상황이 아니라면, 요수촌의 절반 정도를 저들에게 내주는 것도 좋은 선택입니다."
"넌 인간도 요괴도 모르는구나. 인간이 반만 차지하고 만족할 것 같고 요괴가 반이나 내주고 편히 발 뻗고 잘 것 같으냐?"
인간은 욕심을 자제하기 어렵고, 요괴는 소유욕이 너무 강하다. 풍괴처럼 마음에 드는 걸 꼭 훔치거나 뺏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자기 것을 빼앗기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게 대부분 요괴다.
그리고 인간은 개인 차이가 크고 다양성이 훨씬 뛰어나지만, 무리로 뭉치면 단순하게 변한다. 힘이 약해 소유할 수 있는 게 적은 인간은 무리를 지어 강해지면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한다.
"그래도 모두 빼앗기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다시 요괴와 인간이 몰려서 예전만큼 안정적인 마을이 되려면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리고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르겠습니까."
적호는 목소리를 꾹 눌러 속삭였다.
"중부의 군대가 언제 오는지 몰라. 내 법술로는 이미 출발했다는 말만 있고 언제 도착할지는 알아낼 수 없어."
"인간의 짓입니까 요괴의 짓입니까?"
"그것도 몰라. 근데 인간이든 요괴든 차이가 있어?"
"인간의 짓이라면 늦게 올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요괴의 짓이라면, 수많은 요괴와 계약을 맺은 유웅국의 소행일 수 있습니다. 그때 상자를 등에 멘 자가 유웅국의 왕자고, 팔을 잘린 여자가 유웅국의 실질적 지배자인 공손부보였습니다."
만약 희운이 군대를 이끌고 온다면, 원래 추측했던 것보다 중부 군대가 훨씬 일찍 도착할 것이다. 요수촌이 약해졌다는 소식을 예상보다 빨리 접했을 것이고, 희운은 중부에서 요수촌까지 오는 빠른 길을 안다.
- 작가의말
오작은 키도 크고 동안이고 이쁜 여자도 쫓아 붙네요. 옛날 생각납니다.
Commen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