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탈구피助蛇脫舊皮
천사인연天賜因緣
하늘이 내린 인연으로
조사화룡助蛇化龍
뱀이 용이 되는 걸 돕다
귀신은 신통神通하다. 점괘술로도 알아내기 힘든 일을 영리귀는 척척 알아낸다. 무한귀 역시 영리귀보단 부족해도 꽤 신통한 귀신이다.
오작과 치우는 무한귀의 말에 따라 흑석림으로 도망갔다.
뛰면서 힐끗 돌아보니 무한귀가 결승법으로 풍백을 묶어뒀다. 혈편복의 내단이 품은 기운이 꽤 강한 편이어서 오작이 펼쳤을 때와 달리 풍백은 꼼짝달싹 못 했다.
'차라리 풍백이 요괴면 죽일 수 있을 텐데.'
오뢰굉은 오행의 속성을 강하게 띠어 요괴에겐 아주 큰 상해를 입힌다. 그러나 사람에겐 별 피해를 주지 못한다.
이는 오작이 법술적인 부분을 최대한 배제한 탓이다. 속성 덕분에 요괴한테는 강한 위력을 발휘하지만, 소모한 기운의 크기만큼만 효과를 보는 무공의 특성이 강하여 사람한테는 투자한 법력에 상응하는 피해만 준다.
"뭐야? 무한귀가 장난친 거야?"
흑석림에 들어선 치우는 영지 주인의 강한 기운을 느끼고 당황했다.
"아닐 거야. 그냥 만난 것도 아니고 주문으로 부른 귀신인데 어떻게 거짓말을 해."
풍백을 피해 도망치는 과정에 큰 오판을 하고 오작은 훨씬 침착해졌다. 원래부터 머리로는 알던 걸 이번 실수로 뼈에 새겼다. 그래서 최대한 흔들리지 않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려고 노력했다.
"일 장 키에 자색 옷을 입은 소년과 십이 척 키의 청년이라. 무슨 이유로 내 영지에 왔는지 모르지만, 어서 꺼져라."
누런 안개가 검은 바위 사이를 가득 채우면서 출처를 알기 힘든 목소리가 들렸다. 풍백처럼 소리를 바람에 실어 누가 냈는지 모르게 한 게 아니라, 대망사가 이리저리 빠르게 움직이면서 말한 탓이었다.
"원수를 피해 도망치는 과정에 무한귀가 이리로 가면 살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사이에 인연이 있는 거겠지요."
인연이라는 말에 대망사도 생각에 잠겼다. 인연을 함부로 하다가는 용이 되어 승천하는 꿈을 못 이룰지도 모른다.
"혹시 네 원수가 풍백이라는 인간이냐?"
"그렇습니다."
대망사는 풍백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다가 혈편복에 생각이 미쳤다.
"설마, 너희가 혈편복을 어떻게 한 건 아니지?"
대망사는 피를 탐하는 족속들을 잘 안다. 동족끼리는 서열을 엄격히 세우고, 동족이 아닌 것은 다 먹이로 볼 뿐이다.
다행히 대망사는 피가 차가운 요괴여서 혈편복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그게 아니면 근처에서 법력이 가장 강한 대망사를 지금까지 두고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운時運이 맞아 쉽게 해치웠습니다."
"대단하구나."
대망사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아무리 때와 운이 맞아도 웬만한 담력과 실력이 아니면 혈편복을 죽이기 힘들다. 천 년이 넘은 요괴는 아무 짓을 안 해도 주변을 장악하기에 법술 재능만 뛰어난 게 아니라 의지도 굳건해야 상대를 해칠 수 있다.
"나는 용이 되려고 한다. 그래서 인연을 함부로 맺지 않지만, 어렵게 생긴 인연을 함부로 하지도 않는다. 무한귀가 여기에 살길이 있다는 뜻은 이해했다. 풍백이 다신 내 영지로 안 들어온다고 맹세했다."
"우리가 당신에게 상응한 보답을 해야겠군요. 혹시 우리가 도울 일이 있습니까?"
대망사는 매우 신중하게 고민한 후 입을 열었다.
"혹시 혈편복의 내단이 있느냐? 내가 지금 탈피하는데 힘이 부족해 허물을 못 벗고 있다. 혈편복의 내단이면 탈피를 세 번 해도 될 것 같구나."
오작은 예전에 노란 도포를 입은 늙은 도사가 해줬던 말들을 떠올렸다. 과연, 허풍쟁이 도사의 말에 단서가 있었다.
"나와 동생은 멸천칠절공을 익혔습니다."
대망사는 미처 오작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어느 정도 도행이 쌓인 후엔 인연을 안 만들려고 흑석림에 자신을 가두고 가끔 바깥소문을 듣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멸천칠절공에 해산류라고 있는데 토의 성질로 뭉친 것을 겉으로부터 조금씩 제거하는 방식입니다."
"내가 토에 속하는 건 어찌 알았느냐?"
대망사는 인간 기준으로도 어린 나이에 수준도 낮아 보이는 오작이 자신의 속성을 바로 알아맞히자 경계심이 생겼다.
"수백 년 수련한 당신이 보기엔 우습겠지만, 저는 삼십 년 가까이 멸천칠절공을 수련하며 음양과 오행의 기운을 다뤘습니다. 그리고 제 동생은 수련한 지 채 삼 년이 안 되지만, 태어날 때부터 법술을 펼친 린각아麟角兒(기린의 뿔처럼 귀한 아이)입니다."
대망사가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자 오작은 말을 이었다.
"영지가 흑석림. 연기도 토의 기운이 가득한 노란색. 당신의 눈도 노란색이군요. 굳이 우리 둘을 경계하여 처음부터 꾸민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을 테니 당신이 토의 기운을 수련한다는 걸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그제야 오작의 말을 믿은 대망사는 조금 흥분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허물을 벗는 걸 너희 둘이 도울 수 있다는 말이냐?"
"제가 어떤 기인에게 들은 바 있는데, 용이 되려고 탈피하는 수련자는 껍질을 분리하는 것보다 허물을 벗는 데 훨씬 큰 힘을 소모한다고 합니다. 허물을 벗는 건 우리한테 맡기고 당신은 분리에만 법력을 쓰면 됩니다. 그럼 원래 계획보다 훨씬 많은 탈피를 할 것입니다."
탈피는 두 단계로 나뉜다. 하나는 새로운 껍질을 만들며 원래 껍질을 몸에서 분리하는 과정이고, 하나는 분리한 허물을 벗어서 버리는 과정이다.
벗어서 버리는 과정이 훨씬 큰 힘이 드는데, 오작의 말대로라면 혈편복의 내단을 섭취한 것보다 나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용이 되려는 자가 실패하면 대요괴가 된다는 사실을 알지? 너희 둘은 지금도 내 적수가 아니다. 괜히 허튼짓으로 날 대요괴로 만들어 죽음을 자초하지 않기를 바란다."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우리도 살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상대를 해칠 만큼 악하지도 않습니다."
"좋아. 부탁한다."
오작은 월영인으로 창을 만들었고 치우는 소매에서 커다란 칼을 꺼냈다. 그날 치우는 미처 오작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태산 수비대 대장 함선의 칼을 챙겼다.
도망에 전념해도 모자랄 판에 법보도 아닌 칼을 욕심낸 걸 오작이 책망할까 봐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는데, 이 기회에 꺼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오작이 칼 때문에 뭐라고 하지 않을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내가 점을 내면 넌 점을 따라 선을 낸다. 선을 세 개 만들어 찢으면 힘을 적게 들이고 허물을 벗길 수 있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오작의 방법을 들은 대망사가 의문을 표했다.
대망사가 영지를 흑석림으로 한 것이 바로 허물을 벗을 때 힘을 아끼기 위해서다. 뾰족한 검은 바위로 허물을 최대한 찢고, 빼곡한 바위 사이를 거닐면서 허물을 벗는 것이다.
"멸천칠절공은 음양과 오행의 기운을 상대하는 방법을 아주 많이 수록한 무공입니다. 비록 개인의 성향과 자질 때문에 모든 수법을 익힌 건 아니지만, 이번 일을 해결하는 데 꼭 필요한 수법은 확실히 익혔습니다."
대망사는 오작의 호언장담에 반신반의했지만, 시도해서 손해 볼 것도 없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관일회선창貫日回旋槍.'
관일홍과 달리, 직선으로 찌르며 창을 돌리는 수법이다. 주로는 단단한 방패나 갑옷 등을 깨뜨리는 걸 목적으로 하는 초식으로, 토의 기운을 상대하는 또 다른 주류 수법인 착침류를 제대로 펼칠 수 없는 오작이 생각해 낸 대처법이다.
착침류보단 효과가 미비하지만, 해산류의 수법에 착침류의 방식을 섞으니 대망사의 허물에 구멍이 쑥쑥 뚫렸다.
치우 역시 큰 칼에 월영인으로 날을 씌운 후, 도끼로 나무 베듯이 대망사의 허물을 퍽퍽 찍었다. 어차피 비늘이 두꺼워 둘의 공격에 상해를 입을 염려도 없지만, 자신의 껍질은 거의 안 건드리는 솜씨에 대망사는 감탄하기 바빴다.
대망사의 몸은 길이가 오십 장(85m)이나 되었다. 다행히 오작은 무극보인 덕분에 기운 회복이 빨라 부족한 법력에도 자주 쉬지 않았고, 치우는 타고난 힘과 넘치는 법력으로 전혀 쉬지 않았다.
고작 두 시진도 안 되어 대망사 자신이라면 몇 달 공을 들여야 벗을 수 있는 허물을 삼 할 정도 벗겨 냈다.
더구나 대망사 자신이라면 허물을 칠 할 정도 벗기 전까진 점점 더 많은 힘을 소모한다. 칠 할을 벗은 다음부터 조금씩 쉬워지긴 하지만, 그전까지는 갈수록 어렵다.
그러나 오작과 치우는 삼 할 정도를 벗겨 낸 이후 오히려 속도가 붙었다. 허물을 세 개로 찢어서 벗기기에 허물이 겹치면서 잘 안 벗어지는 일이 전혀 없었다.
오작이 근력 부족과 법력 부족이 겹치면서 쉬는 바람에 조금 지체되었지만, 반나절도 안 되어 대망사의 껍질을 벗기는 데 성공했다.
"정말 대단하구나. 세상 만물은 다 쓸모가 있다는 말이 참 와닿는구나."
대망사에겐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작은 두 인간이 몇 달의 시간과 수많은 법력을 소모해야 할 일을 반나절에 해결했다.
"채 백 년도 안 걸려 우린 당신보다 강해질 겁니다."
대망사는 왠지 오작의 말이 반드시 실현될 예언처럼 느껴졌다.
"나도 그러길 바랄게. 그럼 난 껍질을 분리하여 허물로 만들 테니, 너흰 편히 쉬어라."
치우는 법력이나 체력은 여전히 넘치지만, 심력이 고갈되었다. 그래서 검은 바위에 기대어 대망사가 껍질을 분리하는 걸 구경했다.
오작은 대망사가 벗은 허물을 한참 만지다가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뭘 찾는 것이냐?"
껍질을 분리하다 지쳐서 쉬던 대망사가 질문했다.
"제 동생이 인간 중에선 덩치가 유별나게 큽니다. 맞는 옷을 구하기 힘든데, 당신 허물이라면 든든하여 오래 입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저리로 가서 내가 첫 번째로 벗은 허물을 찾거라. 지금과 다르게 푸른색이어서 찾기 어렵지 않을 거다. 그때 내가 미숙하여 허물을 벗을 때 많은 기운을 함께 버렸다. 그래서 가장 질긴 허물일 거다."
지금은 거의 낭비가 없지만, 경험이 부족한 초반엔 많은 기운을 허물과 함께 버렸다. 덕분에 첫 탈피가 가장 어렵기도 했다. 다행히 그땐 덩치가 작아서 결국 성공했지만, 지금처럼 큰 덩치에 그런 실수를 했으면 허물을 못 벗은 탓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오작은 대망사가 가리킨 방향으로 가서 여전히 생기가 넘치는 푸른색 허물을 찾아냈다.
"든든한 실은 없습니까?"
오작의 질문에 대망사는 혀로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철없이 내 영지를 빼앗으려던 요괴들 주검이 저기에 있다. 힘줄 질긴 놈이 많을 테니 알아서 뽑아 쓰거라."
자기 옷을 만들어준다는 말에 치우도 신나서 함께 움직였다. 둔각은 대망사가 두려운지 처음부터 영지 외곽에 숨어 있었는데,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자 용기를 내 안으로 들어왔다.
덕분에 요괴들 힘줄을 운반하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
오작은 월영인으로 날카로운 칼을 만들어 대망사의 첫 허물을 잘랐다. 자른 허물은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요괴 힘줄로 서로 묶었다.
대충 베고 대충 뚫고 대충 묶는 것 같았는데 어느새 아주 그럴듯한 옷이 만들어졌다.
"귀종술, 귀령화鬼靈火."
치우는 완성된 옷을 귀령화로 태웠다. 귀령화가 지나는 곳마다 틈이 사라지고 기운 자국도 사라지며 원래부터 통짜인 옷처럼 보였다.
"치우, 그런 재주 있는 줄 몰랐는데?"
사실 치우는 한 게 없고, 귀령화가 치우의 마음을 헤아려 다 한 것이다. 그러나 오작도 그걸 몰라서 치우를 추켜세운 건 아니었다.
"이참에 장갑과 신발도 만들자."
오작은 자신과 치우가 신을 신발을 두 켤레씩 만들고 장갑 역시 두 쌍을 만들었다. 오작은 자색 옷 덕분에 장갑이 필요 없기에 둘 다 치우 것이었다.
"형, 든든한 밧줄도 만들어 줘. 두 개."
치우의 부탁대로 오작은 대망사의 허물로 밧줄을 만들었다. 요괴 힘줄까지 섞어가며 길이가 십 장(17m)이 조금 넘은 밧줄을 여러 개 만들고 나서야 제작을 멈췄다.
한편.
무한귀는 정확히 혈편복의 내단이 절반 사라진 후에 돌아갔다. 결승법이 풀린 풍백은 화도 났지만, 겁이 더 났다.
'결승법이라는 법술은 참 대단하구나. 몇 년 뒤에 만난다면 저놈들에게 생포되어 어떤 험한 꼴을 볼지 모르겠다.'
그러나 겁이 난다고 물러났다면 풍백은 지금 위치까지 올라오지 못했다. 겁이 많은 만큼 욕심도 크기에 오늘의 풍백이 있는 것이다.
'이 법술을 내가 익힌다면? 중요할 때에 내 목숨 한 번은 반드시 구해준다.'
풍백은 청제를 믿지 않는다. 청제는 자신이 죽은 신농의 뒤를 이어 황이 되면 풍백을 비롯한 네 신하에게 청제와 적제 그리고 황제와 흑제 자리를 얻도록 돕는다고 했다.
풍백은 적제의 자리를 약속받았는데, 사실 가장 탐나는 건 청제 자리였다. 그러나 그 자리는 이미 뇌공의 것으로 얘기가 되었기에 풍백은 아쉬운 마음에 속으로만 눈물을 삼켜야 했다.
'뇌공을 몰래 제거하면 내가 청제가 된다. 무력은 내가 운사나 우사보다 훨씬 나으니까. 뇌공이 사라지면 청제 자리를 지키며 영위앙을 지지할 만한 부하는 나밖에 없다.'
풍백은 귀신에 홀린 듯 흑석림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작가의말
조사탈구피 - 뱀을 도와 허물을 벗다
이쯤이면 다들 눈치챘을 겁니다. 풍백은 오작과 치우의 가이드입니다. 절벽에 떨궈 기연을 주는 가이드보다는 부족하지만, 아쉬운 대로 쓸 만한 놈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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