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탈청룡주巧奪靑龍珠
지자천려智者仟慮
총명한 자가 천 가지를 생각하면
필유일실必有壹失
반드시 한 번 실수는 있다
청제는 자단에게 양해를 구한 후 난향청을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몇몇 신하들만 아는 밀실로 들어가니 풍백과 운사 그리고 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알아낸 건 있느냐? 저쪽은 청룡주가 목적이다."
"자단과 구망이 오랜 친구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서로 왕래가 드물어 확신하지 못했는데, 자단과 구망이 함께 목수로 오는 걸 본 사람이 여럿입니다."
목수는 작은 마을이다. 사람이 안 사는 곳이었는데 청제와 신하들이 요괴를 물리치고 숲을 베어 만든 새 마을로, 주변은 넓은 벌판이다.
좋은 기운이 몰리는 곳이어서 요괴들이 가끔 찾는다. 일부는 좋은 말로 구슬려 보낼 수 있지만, 대부분은 힘으로 쫓아내야 했다.
요괴의 침입에 대비하여 목수 사람들은 주변을 살피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다. 숨길 생각도 없이 버젓이 말을 타고 온 자단 일행은 여러 사람이 목격했다.
"구망은 어디에 있지?"
"은신술을 펼쳤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성격 급한 우사가 입을 열었다.
"뻔한 일 아닙니까. 구망이 치우를 다음 대 구망으로 만들려는 거지요. 구망이 직접 청룡주를 달라고 하면 당연히 안 줄 테니까 친구인 자단이 대신 온 거잖습니까."
"그럼 둘이 왜 함께 와? 그냥 자단만 와야지."
청제의 면박에 우사는 기죽지 않았다.
"안 주면 싸워서 뺏든지 훔치든지 하려는 속셈 아니겠습니까. 자단이 트집을 걸어 싸움을 일으키고 혼란한 틈을 타서 구망이 훔치면 우리가 막을 수 없잖습니까."
우사의 그럴듯한 추측에 청제의 이마 주름이 깊어졌다. 뇌공이 있다면 자단도 물리치고 구망의 도둑질도 막을 자신이 있는데, 하필이면 며칠 전에 중요한 일을 맡겨 밖으로 내보냈다.
"제가 천일도로 구름 하나 보내겠습니다."
운사雲師는 작은 나무 향로를 꺼내서 물을 반쯤 부은 후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주문이 끝나자 펑 소리와 함께 작은 구름 한 조각이 밀실에 나타났다.
"부탁하지."
운사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인 풍백風伯이 소매에서 부채 하나 꺼냈다. 아홉 개의 푸른 깃털을 엮어 만든 부채를 살랑살랑 흔드니 운사가 소환한 구름이 사라졌다.
약 일각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운사는 소환술로 천일도에 보낸 구름을 소환했다. 바람을 타고 천일도까지 갔던 구름은 한 줌 물이 되어 나무 향로로 돌아왔다.
향로를 들고 물을 쭉 마신 운사는 눈을 꾹 감고 한참 있었다.
"어때?"
운사가 눈을 번쩍 뜨자 청제가 다급한 얼굴로 재촉했다. 그러나 운사는 청제의 꾸민 표정에 속지 않았다. 사실 속으론 이미 계획이 다 있는 거고, 자신들과 상의하는 건 확실히 하기 위함이다.
"우사의 추측이 맞았습니다. 세작의 말에 따르면 며칠 전 자단이 홀로 천일도에 찾아왔고 하루 머물렀습니다. 둘이 청룡주를 훔칠 계획을 세우는 것까지 직접 귀로 들었다고 합니다."
"왜 청룡주가 필요한지는 모르고?"
"거기까진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때 성급한 우사가 또 끼어들었다.
"뻔한 일 아닙니까. 자단이 찾는 현무루가 구망 손에 있는 거겠죠."
청제는 품에서 나무 상자를 하나 꺼내 탁자에 놓았다.
"그러니까 자단은 현무루를 원하고 구망은 청룡주를 원한다. 그래서 자단이 청룡주를 얻어내 구망과 교환한다. 치우는 다음 대 구망이 되고, 자단이 데려온 아이가 다음 대 공공 자리를 노리는 건가?"
청제가 꺼낸 나무 상자는 주작란을 담았던 상자와 똑같았다. 바로 이십 년 동안 자단이 대륙 중부와 남부를 돌며 찾던 그 상자였다.
이십여 년 전에 수신水神 공공共工이 반란을 일으켰고 흑제 즙선기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지금도 흑제의 죽음이 증명되지 않아 새로운 흑제를 선출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 멸문한 자단의 가문이 흑제와 가까운 사이였기에 모두 자단이 현무루를 찾아 공공에게 복수하려는 것으로 지레짐작했다.
북부 출신에겐 돌멩이나 다름없는 주작란을 자단이 이십 년이나 애타게 찾아다닐 거라곤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모든 추측이 치우가 청룡주를 먹어 구망이 된다는 쪽으로 흐르자 밀실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치우가 구망이 되면 큰일입니다. 그럼 구려국의 힘이 얼마나 커지겠습니까."
우사雨師가 또 입을 열었다. 무력은 뇌공이나 풍백 그리고 운사보다 못하지만, 동부 백성들에게 신망이 가장 두터운 신하다.
필요한 곳에 적당한 비를 내려주기에 뇌공이나 풍백과 대립각을 세우는 왕들도 우사한테는 공손히 대한다.
뇌공과 풍백이 무력을 담당하고 운사가 정보 수집을 맡았다면 우사는 외교다.
"구망이 될 자질은 확실히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법술을 펼친 천고의 기재잖습니까."
운사의 말에 청제는 원래 생각했던 계획을 모두 지웠다.
갓 태어난 치우가 주문도 없이 법술을 펼친 일은 코흘리개도 아는 사실이다. 그만큼 놀랍고 대단한 일이었고, 치우의 할아버지인 구려국의 왕이 소문을 퍼뜨리는 데 큰 심혈을 기울였다.
"거절하면 어떻게 되지?"
"구려국이 군대를 움직이고 자단이 행패를 부리는 틈을 타 구망이 도둑질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단은 청룡주 대신 뭘 내놓겠다고 했습니까?"
청제는 난향청에서 나눈 대화를 간략하게 부하들한테 들려줬다.
우사는 물론 운사와 풍백도 놀라움에 얼굴을 꿈틀거렸다. 구려국 다음으로 강한 나라를 얻으면 치우가 구망이 되더라도 청제 자리를 지킬 자신이 있다.
나라가 없는 상황에서도 지금까지 잘 버텼는데, 강한 국가를 손에 넣으면 청제 자리를 넘어 황皇을 노릴 수도 있다.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운사의 조심스러운 태도 표시에 청제가 고개를 저었다.
"저들도 바보는 아니다. 뭔가 확신이 있으니까 거래를 제안한 거겠지. 그리고 꿍꿍이가 없다고 쳐도 저들이 원하는 대로 거래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야."
그때 조용히 있던 풍백이 입을 열었다.
"제게 좋은 계책이 있습니다. 거래를 성사시키면서도 저들이 목적을 못 이루게 하는 방법 말입니다."
한편.
청제가 자리를 오래 비우자 자단은 걱정이 일었다. 두려울 게 없는 자단이지만, 무력으로 청제 자리를 얻은 영위앙은 껄끄러운 상대다.
"괜찮습니다. 총명한 자가 천 개 생각하면 반드시 한 번은 실수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이 바로 저들이 실수하는 그날입니다."
"네 속은 도무지 모르겠구나."
"청제는 됨됨이가 교활하고 사람의 기색을 살펴 진위를 가리는 재주도 뛰어나다고 합니다. 그러니 숙부는 모르고 계시는 편이 낫습니다."
'그런 청제를 속여먹을 자신이 있다는 소리구나. 형이 이런 모습을 봤으면 얼마나 기꺼울까.'
마음이 편해진 자단은 술을 음미하며 안주도 골고루 맛봤다. 그리고 반 시진이나 지난 후에야 청제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편한 자린 줄 알고 아득바득 기어올랐는데, 매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이오. 귀한 손님 모셔 놓고 실례가 많았소."
"불청객입니다. 출객령을 내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신하들과 상의한 결과 거래에 응하기로 했소. 단, 서로 조건을 비슷하게 맞춰야 한다고 보오. 소년이 청룡주를 복용하는 게 그쪽 조건이지?"
"그렇습니다."
"그래. 내 손에 쥐여 줄 국가는 어디요? 삼묘국參苗國 아니면 청고국淸固國이요?"
"오장국입니다."
청제는 너털웃음으로 당혹한 마음을 숨겼다. 꾸민 게 아니라 진짜로 당황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오장국과 작은 마찰이 있었습니다. 결과, 오장국의 왕자 독구가 죽었고 신하 백 명 정도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오장국의 독을 깨끗이 없앴습니다."
청제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뒷짐을 쥐었다. 그나마 강한 자제력을 발휘한 덕분에 주먹을 쥐고 환호한다거나 큰 웃음을 터뜨리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만약 삼묘국이나 청고국이라면 청룡주와 맞바꿔도 손색이 없겠지만, 오장국은 아니오. 그래서 조건 하나 더 걸까 하오."
"들어보지요."
"조건을 걸기 전에 궁금한 게 하나 있소. 자단 그대가 북부 제일의 고수로 불린다지. 그런 호칭은 어떻게 하면 따내는 것이오?"
누가 더 강한지는 목숨 걸고 싸워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무예만 겨루는 대결에서 강해도 목숨을 건 실전에선 실수하기도 하는 게 사람이다.
"간단하오. 나보다 강한 자를 모조리 죽이면 되오."
자단의 대답에 청제는 속에 꾹꾹 눌러뒀던 호기가 치솟았다.
"하하. 거참 간단하군그래."
오작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흐르자 다급히 나섰다. 도단류의 수법대로 흐름을 끊고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못 흐르게 막아야 한다.
"자단 협객에게 북부 제일의 호칭이 붙었을 때, 그에 불복한 사람들이 연일 찾아왔습니다. 본인이 더 강하다고 여긴 거겠죠. 그래서 더 강한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고 말한 겁니다. 실제로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고, 자신이 더 강하다는 생각을 버린 자들도 있지요. 도전하는 자가 없다는 건 자단 협객보다 더 강하다고 여기는 자가 없다는 뜻이니, 명실상부한 자타공인의 북부 제일이 아니겠습니까."
"하하. 어린 협객의 언변이 놀랍구려. 실제로 가장 강한지는 몰라도 자신이 더 강하다고 나서는 자가 없으니 북부 제일이라. 훌륭해. 참 훌륭하군."
오작의 해석은 얼핏 들으면 자단의 광오한 말을 겸손하게 풀어주는 것 같지만, 자단과 붙을 생각이면 목숨이나 명성 둘 중 하나는 반드시 내놓게 될 거라는 은근한 협박이 섞였다.
"부족한 설명을 곡해하지 않고 들어주셔서 제가 더 감사드립니다."
오작의 대응은 청제에게도 만족스러웠다.
거래가 깨지면 상대는 청룡주를 훔칠 계획이다. 그렇게 되면 청룡주는 우선 구망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노회한 자단은 아닌 척했지만, 어린 소년은 마각을 드러냈다. 청룡주로 현무루를 교환해야 하기에 청룡주가 구망의 손에 직접 들어가는 걸 막으려고 다급히 둘의 싸움을 말린 것이다.
착각이긴 하지만, 청제는 오작의 반응으로 자신들의 추론이 정확하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좋소. 그럼 추가 조건을 얘기하겠소. 사람 목숨 하나 얹겠소."
"좋소. 거래는 성립되었소."
자단이 갑자기 나서서 거래를 성사시켰다.
"소문대로 호쾌한 사내군. 오장국을 빨리 처리해야 하는 게 아니라면 그대와 사흘 밤낮 술독에 빠져 보내고 싶소."
"그 정도로 많은 술은 준비하면 언제든 부르시오. 철천지원수가 술 마시러 오라고 불러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오."
오작은 추가 조건이 마음에 걸렸지만, 자단이 이미 입 밖으로 꺼낸 말을 도로 담게 할 수는 없었다.
"자, 그럼 오장국은 우리가 알아서 접수하겠고. 얹은 목숨은 사흘 뒤에 홀로 오시면 그때 얘기하겠소. 그리고 청룡주는 지금 바로 내놓겠소."
"장부일언丈夫壹言."
"사마난추駟馬難追."
사내의 한 마디는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로도 못 쫓는다.
"그럼 소년은 어서 청룡주를 복용하시오."
청제는 품에서 청룡주를 담은 상자를 꺼내며 오작에게 말했다.
"복용은 좋은 날에 맞춰서 하겠습니다. 이리 주시지요."
"아니요. 여기서 복용해야 하오."
말은 마친 청제는 중얼중얼 해봉주를 외웠다. 중간에 많은 주문을 생략했는데도 상자가 열렸다.
"상자 밖에 오래 있으면 청룡주에 서린 법력이 모두 사라지오. 소년은 어서 복용하시오. 혹시 복용 과정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법술에 능한 술사가 많으니 위험한 일은 없을 거요."
오작은 자단과 눈을 마주친 후 얼굴을 찡그리며 청룡주를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청룡주를 삼키고 반 각이 지날 때까지 아무 반응도 없자 청제는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청룡주를 그냥 날린 건 조금 배가 아프지만, 그 청룡주가 치우의 뱃속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건 매우 기쁜 일이다.
"보아하니 아무런 부작용도 없는 것 같소. 이제 그만 떠나셔도 좋소."
오작이 주작란을 복용한 지 반년도 안 된다. 그래서 청룡주를 삼켰어도 바로 효과를 보지 않았다.
덕분에 청제는 자신이 자단과 구망의 음모를 부쉈다고 착각했고, 오작이 꾸민 계책은 생각보다 훨씬 성공적으로 끝났다.
"목숨 하나가 뭘지 궁금합니다."
목수가 멀어지자 오작이 침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말도 안 되는 조건이면 그냥 약속을 깨면 된다."
자단은 명예 따위를 초개같이 여긴 지 오래되었다. 조건을 채 듣지도 않고 거래를 승낙한 건 어떻게든 청룡주를 얻어내는 게 먼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괜히 상대가 까다로운 조건을 걸었는데도 거래를 쉽게 응하면 오히려 의심을 사서 계약이 무산될지도 모른다.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에 오작은 치밀한 계획을 짰고, 자단은 간단히 거래를 마무리했다.
"네가 말한 숨긴 한 수가 구망이었어?"
"저들은 청룡주를 치우가 원하는 줄로 오해했을 겁니다. 그냥 두자니 도둑맞을까 봐 겁났겠죠. 그래서 거래를 통해 이득을 취하는 동시에 청룡주를 '없앨' 훌륭한 방법을 선택했을 겁니다."
천하에 위명이 자자한 청제가 오작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는 생각에 자단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 작가의말
지자천려 필유일실의 뒤에 붙는 말이 우자천려 필유일득입니다. 아둔한 자가 천 가지 생각하면 하나는 얻는 게 있다는 뜻이죠. 총명하다고 자만하지 말고 아둔하다고 포기하지 말라는 좋은 말이긴 한데 0.1% 확률이라니.
교탈청룡주는 꾀로 청룡주를 빼앗는다는 뜻인데, 자기 것도 아닌 왕국을 주고 청룡주를 얻어냈으니 빼앗은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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