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원인자검軒轅仁慈劍
만참불살萬斬不殺
모든 것을 베고 죽이지 않는
인자성검仁慈聖劍
인자한 성검
"대협, 도와주십시오."
희운이 모는 마차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벌들로 둘러싸였다. 몸에 범 무늬가 선명한 호봉虎蜂 떼였다.
"요괴는 마차를 공격하지 못하는 거 아닙니까?"
오작의 질문에 희운이 숨도 안 쉬고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러나 마차를 탄 사람이 먼저 공격하면 그 협약은 무효가 됩니다. 저희는 지금 쫓기고 있고, 이 요괴들은 우리가 빨리 못 가게 방해하는 겁니다."
마차와 배 그리고 거기에 탄 사람은 공격하지 않기로 함추뉴와 요괴들이 합의를 봤다. 협약을 어긴 요괴는 인간뿐 아니라 요괴들의 보복도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벌떼는 희운과 마차를 끄는 네 필의 말을 공격하지 않고 둘러싸기만 했다. 그럼으로써 마차의 속도를 늦추는 게 이들의 목적이었다.
"쫓는 자들은 인간인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그때, 벌떼의 일부가 오작 일행에게 매섭게 다가왔다.
"공격하지 마십시오!"
희운이 고함을 질렀다.
"우릴 위협하여 공격을 유도하고, 일행으로 몰아 당신까지 공격하려는 수작 같군요."
오작의 말에 희운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오작의 말을 들은 치우와 소소는 벌들이 독침을 날카롭게 세우고 가까운 곳에서 날아다니는데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벌들에 포위된 바람에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괜히 움직이다가 벌을 건드리기라도 하면 공격으로 간주하고 반격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희운의 마차는 벌들이 오히려 충돌을 조심하기에 적당히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제가 이 상자를 열 테니 놀라지 마십시오."
희운은 자기 곁에서 툭툭 소리를 연신 내는 상자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마음이 급한지 오작 일행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상자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잘린 머리가 하나 있었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당신의 부친 같군요."
오작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이십여 년이 지나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하지만, 잠깐 인연이 있었던 소전이 분명했다.
"하하. 설마 그대가 협객 등에 업혀 다니던 그 아이인가?"
잘린 머리가 눈을 번쩍 뜨고 입을 열어 말하자 소소와 치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용케 알아보셨군요. 그간 잘 지냈냐고 묻기엔 상황이 좀 우습네요."
"걱정하지 마시게. 날 토막 낸 건 희운이라네."
벌들이 윙윙거리며 둘의 대화를 방해하려 했다. 그러나 오작도 소전도 벌들의 방해를 깔끔히 무시했다.
"자네 혹시 협객의 행방을 찾는 건가?"
오작은 잠깐 고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숨기려고 거짓말을 하면 어떤 나쁜 결과로 이어질지 모른다.
"협객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셋이요. 한 명은 죽어도 입을 열지 않을 거고, 한 명은 욕심이 커 엄청난 요구를 할 거요. 그리고 세 번째 사람이 나요."
뜻밖의 전개에 오작은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조금 격동한 마음을 완전히 가라앉힌 후,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벌써 세 사람이 안다는 건 점괘술로 찾을 수 있다는 뜻이군요."
"그랬다면 절교에서 벌써 찾았겠지. 통천교주의 세 제자가 은밀하게 협객의 종적을 찾는다는 소문이 파다하오. 그리고 일 년여 전부터 천교와 인도 그리고 서방교 사람들까지 누군가를 찾아 천하를 뒤진다는 소문도 있소."
절교는 자단과 오작을 동시에 찾고, 천교와 인도 그리고 서방교는 무극을 깨달은 오작을 찾는 거다.
'숙부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셋이나 되는데 통천교주의 점괘술로도 모른다고? 앞뒤가 안 맞는데.'
"예전에 협객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한 적이 있소. 그에 대한 보답으로 당장 행방을 알려주고 싶지만, 보다시피 지금 처지가 형편없소. 날 진일곡眞壹谷까지만 안전히 데려다주면 협객의 행방과 구체적인 장소까지 알려드리겠소."
진일곡은 백호의 화신인 욕수가 사는 곳이다. 천일도의 소양궁, 태일봉의 노양궁, 진일곡의 소음궁少陰宮, 원일담元壹潭의 노음궁老陰宮이 각각 구망과 축융, 욕수와 공공의 거처다.
유일하게 중앙의 수호신 후토만 정해진 거처가 없다.
"작은 거짓이라도 섞였다면 큰 화를 당할 겁니다."
오작의 서늘한 말에 소전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협객의 위명이 지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는데, 내게 간을 백 개 줘도 거짓을 섞지 못할 것이오."
오작은 양손의 열 손가락을 꼿꼿이 펴고 주문을 중얼중얼 외웠다.
"오뢰굉천伍雷轟天!"
천타오뢰굉은 힘을 집중하여 다섯 벼락으로 하나를 때리는 방식이다. 반면, 오뢰굉천은 최대한 흩어져서 넓은 범위를 타격한다.
오작의 손가락에서 뻗어 나온 열 가닥 번개가 넓게 퍼지며 마차와 오작 주변을 감싼 두 무리의 호봉 떼를 강타했다.
한껏 뽑은 침을 타고 체내를 타격한 덕분에 오작이 모든 법력을 쏟은 오뢰굉에 벌떼가 깡그리 몰살당했다.
벌떼가 사라지자 희운은 그제야 손에 든 채찍을 크게 휘둘렀다. 채찍이 허공을 때리는 소리에 마차를 끄는 네 필의 말이 다리에 힘을 가득 줬다.
"자네는 지금 상황이 궁금하지도 않은가?"
소전의 질문에 오작은 잠깐 고민하고 대답했다.
"안전한 호송을 위해 필요하다면 설명 부탁드립니다."
"필요하네."
한숨을 짧게 쉰 소전이 입을 열려는 순간, 희운이 제지했다.
"부친. 힘을 남기셔야 합니다. 설명은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 남김없이 다 말하거라. 그게 우리가 사는 길이다."
고개를 끄덕인 희운은 상자 뚜껑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지난번에 협객께서 말씀하셨죠? 내가 어머니 성을 안 따르고 아버지 성을 따랐다고."
오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웅국의 왕족은 공손의 성을 씁니다. 북부와 동부는 이미 모계母係에서 부계父係로 넘어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서부나 남부는 물론, 중부도 대부분 아직 모계의 힘이 큽니다."
"그런데 당신 부친이 어떻게 왕이 된 겁니까?"
"제 모친이 서왕모와 현빈씨를 흉내 내려고 했던 겁니다."
서왕모는 백제 백초거의 어머니다. 다섯 아들과 일곱 딸을 뒀고 나이는 천 살이 넘는다. 백초거가 서부 유일의 왕이고 천하 오제의 하나인 백제이기도 하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서왕모가 손에 꽉 잡고 있다.
현빈씨는 바로 강제명의 할머니이자 신농의 어머니다. 서왕모 정도로 강한 권력을 움켜쥔 건 아니지만, 염환국은 물론 남부에서도 입김이 가장 세다.
"부친은 용맹이 중부에 짝을 찾기 힘듭니다. 게다가 인자검으로 불리는 헌원검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함추뉴가 잘하고 있지만, 백 개가 넘은 국가의 모든 분쟁을 억제할 순 없습니다. 큰 전쟁은 없어도 소규모 분쟁은 끊이지 않습니다."
"전장에 나갈 위엄 있는 왕이 필요했군요."
"그렇습니다. 모친은 전장에서 장수와 병사를 이끌고 싸워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제 부친과 혼인하고 왕위까지 넘겼습니다."
공손부보가 내정을 하고 희소전은 전쟁만 하기로 협의했다. 그러나 소전의 인망이 점점 커지고 대신들도 부보보다는 소전을 더 따랐다.
"저와 씨가 다른 모든 형제가 모친을 따라 공손의 성을 쓰지만, 저는 부친 성을 따랐습니다. 제 부친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인데, 모친과 다른 형제는 왕위를 욕심내는 거라고 오해하더군요."
오작은 꼭 오해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북부와 동부도 처음엔 전장에 나설 용맹한 남자를 남편으로 들였다. 그래서 전쟁이 잦은 국가의 여왕은 평생 남편이 열이 넘은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차츰 권력이 남자한테 넘어갔고, 북부와 동부엔 여자가 왕인 나라가 드물다.
전장에 왕이 직접 나서는지 여부가 사기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여, 여전히 여자의 권력이 강한 서부나 남부도 남자를 왕으로 추대하는 게 요즘 추세다.
희운이라면 다음 왕위를 노릴 만하다는 오작의 판단이다. 더구나 치우가 몰래 엿들은 내용에 따르면, 희운은 그저 왕위만 노리는 게 아니라 황제黃帝 자리까지 욕심내고 있다.
"그런 와중에 부친이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헌원검 도난 사건도 있었고요."
소전의 병은 중부에 유명한 치료사들도 고개를 저었다. 유일한 방법은 백호의 화신인 욕수한테 보이는 거다.
"일국의 왕이 함부로 국가를 비울 수 없다고 모친 쪽에서 주장했고, 욕수는 서부의 땅을 떠날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렇게 소전의 목숨이 점점 줄어들 때, 헌원검이 도둑맞았다. 희운은 주변에 믿을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친분이 깊은 강제명에게 도움을 청했다.
다행히 풍괴가 훔친 헌원검을 찾았고, 지금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헌원검은 인자검으로 불립니다. 세상에 못 베는 게 없을 정도로 날카롭지만, 무엇을 베어도 죽이거나 소멸하지 못합니다. 부친의 목숨이 채 사흘도 남지 않아 저들의 경계가 약해진 틈을 타 헌원검으로 육십사 토막을 낸 다음 상자로 담아서 몰래 빼냈습니다."
"되살릴 방법이 확실히 있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대로 진일곡까지 가서 백팔금침법으로 치료한 다음 다시 합치면 됩니다."
"왜 꼭 욕수인 겁니까?"
백호의 화신인 욕수가 아니어도 백팔금침법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은 많다.
"헌원검으로 자른 건 원래대로 복구됩니다. 그럼 불치병까지 그대로 남습니다. 유독 욕수만 헌원검을 누르고 제 부친 몸에서 불치병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하나로 몸을 합칠 때 불치병만 사라진 상태로 복구됩니다."
희운이 소전의 몸을 토막 낸 건 단지 왕궁에서 빼내기 위함이 아니었다. 원래는 죽어야 할 소전을 헌원검으로 잘라 목숨을 억지로 붙여둔 것이다.
"불치병이 사라진다고 해도 명이 다하지 않았습니까?"
욕수의 치료를 받더라도 하나로 합쳐지면 소전은 즉사한다. 이미 정해진 목숨은 다 사라지고 헌원검의 법력으로 죽음을 미뤘기 때문이다.
"다 방법이 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하는 점 양해 바랍니다."
둘이 대화를 마치자 소소가 오작에게 말을 걸었다.
"서부로 가는 거라면 난 빠질게."
"서부 변경까지만 같이 가자. 지금 헤어지면 희운을 쫓는 자들이 널 놔두지 않을 거야."
오작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치우가 끼어들었다.
"맞는 얘깁니다. 지금 우리의 적은 유웅국뿐이 아닙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꽤 많은 요괴가 이번 일에 관여한 것 같습니다."
소소는 잠깐 고민하다가 변경까지만 가기로 했다.
"형, 근데 아까 벌떼 어떻게 된 거야?"
"뭐가?"
"그 많은 벌이 전부 요괴야?"
요괴는 어디에도 있다. 그래서 얼핏 많아 보이지만, 요괴가 최소 인간 마을 하나 정도의 땅을 차지하는 걸 생각하면 또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다.
아까 수만 마리는 되는 벌이 모두 요괴라고 생각하니 조금 징그러웠다.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
"모르면 모른다고 해. 뭔 말 같지 않은 소리야."
"군체로 사는 놈들이잖아. 벌떼 자체가 요괴야. 주로 벌이나 개미 같은 여왕을 모시는 놈들한테서 나타나는 현상이야."
"그러니까 벌떼 전체가 하나의 요괴라고?"
"인간은 뭐든 확실하고 분명히 하려고 애쓰지.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아. 그러니 벌떼가 요괴다 정도로만 알고 있어."
"좀 쉽게 설명해봐."
오작은 한참 고민하고서야 대답했다.
"아까 내가 벌떼의 절반을 죽이면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
"나야 모르지."
"두 가지 가능성이 있어. 남은 벌떼가 계속 요괴로 남았을 수 있고, 남은 벌떼는 요괴가 아닌 평범한 벌이 되었을 수도 있어."
치우는 입으로 '오' 소리를 내며 연신 감탄했다.
"평범한 벌이 되면 어쨌을까?"
"그대로 무리를 지어 도망가거나, 뿔뿔이 흩어지거나, 아니면 우리를 마구 공격했을 수도 있어."
오작 일행은 물론 희운이나 오행마도 평범한 벌의 습격엔 걱정 없다. 그러나 마차를 끄는 네 필의 말은 벌떼의 습격에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그냥 벌이 아닌 한 마리가 치우 엄지만 한 호봉이니까.
희운은 연신 채찍으로 말들을 재촉했다. 마차가 다니기엔 다소 험한 산길이어서 빨리 가는 게 딱히 좋아 보이진 않지만, 희운은 추적자들이 두려운지 채찍질을 쉬지 않았다.
"마차가 법보인가 봅니다."
"강화 법술을 강하게 걸었습니다. 법보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하지요."
"그래도 이대로면 이틀 버티기 힘들 것 같습니다."
오작의 말에 희운은 채찍을 반대 손으로 바꿔 잡으며 질문했다.
"더 좋은 방법이 있는 겁니까?"
오작은 손에 쥔 땀을 옷에 닦는 희운을 보며 차분히 말했다.
"북부로 가는 겁니다."
추적자의 예상을 벗어나 북부로 간 다음, 북부와 중부의 경계를 타고 요수촌까지 간다. 요수촌은 북부와 중부 그리고 서부가 만나는 곳이다.
그곳에서 서북쪽으로 쭉 가면 태산처럼 북부와 서부가 통하는 관문이 있다. 더구나 북부에 도착하면 거추장스러운 마차를 버려도 된다. 부보와 결탁한 요괴들의 추적 때문에 마차를 고집하고 있지만, 그냥 달리면 마차보다 훨씬 빠르다.
"좋은 생각입니다. 안내 부탁드려도 될까요?"
오작은 고개를 끄덕인 후 오행마의 목을 툭 쳤다. 오행마는 바로 말머리를 돌려 북부로 달렸다.
- 작가의말
뭐든 잘 베지만 죽이거나 파괴하지 못하는 헌원검. 웬만한 글에선 주인공 아이템인데 제 글은 웬만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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