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래구령도蓬萊龜靈島
귀령혜안龜靈慧眼
귀령성모의 혜안이 번뜩이니
둔각현형臀角現形
둔각의 원형을 알아내다
봉래도는 통천교주의 벽유궁이 있는 섬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총 서른여섯 섬의 총칭이기도 하다.
섬 자체는 원래 이름도 없고 서열도 없지만, 인간은 이름 짓고 서열 매기기를 좋아한다.
귀령성모龜靈聖母가 사는 구령도는 봉래삽십육도 중에서 다섯 번째 자리를 차지한다. 통천교주의 봉래도가 당연히 일위이고, 남은 셋은 각각 다보도인과 금령성모 그리고 무당성모가 사는 섬이다.
봉래삼십육도는 제각각 바다를 떠돌다가 일 년에 한 번 모인다. 서른여섯이 모여서 하나의 섬이 되는데, 그때는 대봉래大蓬萊라고 부른다.
대봉래는 통천교주의 제자들에게 화합의 장이면서 투쟁의 장이기도 하다. 섬의 서열이 바뀌기도 하고 섬의 이름과 주인이 바뀌기도 하며, 몇몇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자단 그놈은 참 운도 좋아."
구령도에는 귀령성모만 산다. 만 년 이상을 산 바다거북이 태변을 거듭하여 인간 형태를 얻은 게 바로 귀령성모다. 무리를 짓지 않고 짝도 짓지 않는 바다거북의 습성이 아직 사라지지 않아 귀령성모는 혼자 사는 게 편하다.
약 보름 뒤면 서른여섯 섬이 모여 대봉래가 된다. 세력을 이루지 않은 귀령성모는 위로 치고 올라갈 힘이 없다. 그러나 유일한 법보인 일월주日月珠의 위력이 어마어마하여 밑에서 들이받는 제자도 없다.
"그 실력에 살아서 봉래도를 떠나다니."
통천교주의 막내 제자인 자단은 벽유궁에 머물면서 수련만 하다가 떠났다. 오행마는 몰라도 홍영창은 많은 제자가 군침을 흘리던 법보인데, 그걸 지닌 채 봉래도를 떠난다는 건 상상조차 힘든 일이다.
통천교주의 총애를 받는 자단이 아닌 다른 제자였다면 몸만 봉래도를 떠났거나 아예 봉래도에서 죽었을 운명이다.
귀령성모가 갑자기 수십 년 잊고 지내던 자단을 떠올린 건, 파도에 밀려 구령도 해변에 오른 두 인간과 한 필의 말 때문이었다. 오행마와 덩치가 비슷한 말을 보니 자단이 절로 떠올랐다.
"결계를 뚫고 섬에 오른 걸 보면 평범한 놈들이 아닐 거야."
귀령성모는 듣는 사람이 없는데도 굳이 소리 내어 말했다. 그렇다고 귀령성모가 외로움을 타서 혼잣말하는 건 아니다. 귀령성모의 대화 상대는 법보 일월주다.
"내가 널 얻은 지 삼천 년도 더 되었건만, 넌 왜 날 계속 거부하는 거니?"
귀령성모는 일월주를 그냥 법보로 생각했다. 낮에는 해의 기운을 흡수하고 밤에는 달의 정화를 흡수하는 평범한 법보. 본신의 기운이 고갈 났을 때 빠르게 기운을 보충해 주는, 단지 다른 법보들보다 용량이 훨씬 뛰어난 저장계儲藏系 법보로만 알았다.
통천교주가 일월주와 대화하기 전까지는.
사부한테 많은 재물과 귀한 재료를 바치고 겨우 일월주가 가장 높은 품계品界인 선천영보先天靈寶 등급의 법보임을 알았다.
그때부터 일월주의 진정한 정체와 쓸모를 알아내려고 매일 대화를 시도했지만, 일월주는 귀령성모한테 작은 틈도 열어주지 않았다.
귀령성모는 천성이 느긋하다. 그래서 법술도 안 펼치고 느린 걸음으로 해변으로 갔다. 귀령성모가 수천 개 계단을 다 내려 해변에 접근했을 때, 얼굴이 하얀 소년이 덩치가 큰 청년 어깨를 흔들었다.
귀령성모는 저들의 대화로 뭔가 알아낼 게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나무 뒤에 숨어서 지켜보기로 했다.
"치우야. 어서 일어나."
짝짓기를 할 생각에 흥분했던 귀갑어는 상상하던 강하고 멋진 짝짓기 상대 대신 작은 인간과 말만 보이자 화가 크게 솟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강한 해류로 귀갑어의 공격이 정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덕분에 치우와 오작은 저홍패로 치명적인 공격을 막으며 귀갑어의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버텼다.
그 과정에 치우는 오작보다 몇 배 큰 충격을 받았다. 오작은 치명적인 공격에만 대응했지만, 치우는 자신뿐 아니라 둔각에게 향하는 모든 공격에 대응했다.
덕분에 빠르게 지쳤고, 기운이 소진된 다음엔 몸으로 오작 혹은 둔각에게 향하는 공격을 막았다.
오작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고 알려주고 싶었지만, 강한 해류에 귀갑어의 공격까지 겹쳐서 도저히 차분하게 얘기할 겨를이 없었다.
"여기가 저승인가?"
오작의 다그침에 억지로 눈을 뜬 치우는 깨자마자 얼빠진 소리를 뱉었다.
"여기 누가 사는 곳 같아. 계단도 있고 집도 있고. 저기 화원도 이쁘잖아."
오작의 말에 귀령성모는 두 인간에 대한 호감이 생겼다. 자신이 가꾼 화원을 이쁘다고 칭찬한 건 오작이 처음이었다.
"형, 둔각은?"
황급히 몸을 일으킨 치우는 몇 장 거리에 쓰러진 둔각한테 황급히 달려갔다.
"살았어."
둔각 몸에 손을 댄 치우가 기쁘게 외쳤다. 걱정했던 싸늘한 기운 대신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치우의 가슴으로 흘러들었다.
둔각까지 살아있는 걸 확인하고 치우와 오작 모두 시름이 푹 놓였다.
"이 섬의 주인이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배랑 먹고 마실 걸 구해서 떠날 수 있게 도와주면 얼마나 좋을까."
둔각 곁에 주저앉은 치우가 중얼거렸다.
그때, 귀령성모의 눈이 반짝 빛났다. 흥분한 귀령성모는 평소의 느긋함을 치우고 법술을 펼쳐 바로 치우 곁으로 갔다.
"내가 이 섬의 주인이다. 우리 거래하자."
귀령성모의 모습을 본 치우가 눈을 크게 떴다.
"와. 이렇게 이쁜 여자 처음 봐."
안타깝게도 바다거북의 감성을 지닌 귀령성모는 외모 칭찬에 둔감했다. 차라리 귀령성모가 가꾼 섬을 칭찬해주는 게 훨씬 호감을 사는 방식이다.
"배와 물 그리고 식량, 거기에 해도海圖(바다 지도)까지 줄게. 대신 너흰 나한테 두 가지를 줘야 해."
"원하는 바를 말씀하십시오."
어느새 몸을 일으킨 오작이 말했다.
"먼저 여길 어떻게 들어왔는지 말해. 이 섬에는 결계가 있어 밖에선 보이지도 않고 들어올 수도 없거든."
"귀갑어의 공격을 받아 배가 부서지고 바다에 빠졌습니다. 해류 덕분에 목숨은 부지했지만, 둘 다 기절해서 어떻게 여길 오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귀갑어가 저들을 데리고 결계를 통과한 건가?'
귀갑어는 음양과 오행으로 해석할 수 없는 기운을 지녔다. 그래서 결계를 무사히 통과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 그럼 이건 됐고. 두 번째 조건은 저거다. 저걸 나한테 줘."
귀령성모의 손가락이 가리킨 건 여전히 하얀 모래 위에 두 눈을 꼭 감고 누운 둔각이었다.
"귀한 말은 아니지만, 정이 꽤 깊이 들었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대신하면 안 될까요?"
오작의 대답에 귀령성모가 깔깔 웃었다. 마치 훈풍熏風(따뜻한 바람)을 맞아 몸을 떠는 한 떨기 배꽃과 같아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너희가 결계를 뚫고 들어온 게 아닌지 조금은 의심했는데, 확실히 아니구나. 너흰 저게 말로 보이니?"
치우와 오작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서로 바라봤다.
"저건 월각수月角獸야. 자기 모습이 없어서 다른 짐승의 모습을 훔쳐 사는 정령수精靈獸인데, 아무래도 이번엔 말의 모습을 훔친 것 같구나. 도행이 낮은 자들 눈엔 훔친 모습만 보이니까 너흰 모를 수도 있어."
"잠시 상의해도 되겠습니까?"
놀라움이 컸지만, 오작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
귀령성모의 허락을 받은 오작은 치우에게 눈짓했다.
"형. 둔각은 우리 친구야."
정령수는 요괴妖怪나 마수魔獸와 달리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반대로 딱히 도움이 되는 부분도 없다.
"그럼 둔각을 데리고 헤엄쳐서 갈까? 게다가 이 섬엔 결계가 있어.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나가는 것도 문제야."
"그래도 둔각을 거래품으로 내놓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치우의 고집이 발동했다.
"어르신을 생각해. 우린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어."
치우의 눈이 흔들렸다.
"네가 받을 고통이나 행복 따위는 배제해. 둔각을 내줬을 때 얻는 것과 안 내줬을 때 잃는 걸 떠올려. 그것만으로 어느 게 맞는 행동인지 판단해. 그 결과에 따른 네 감정은 부수적인 거고, 네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야. 그걸 이 거래의 저울에 올려놓지 마."
치우는 느린 호흡으로 떨리는 몸을 진정했다.
"미안해, 형."
치우는 오작이 둔각을 얼마나 아끼는지 안다. 표현이 서툴러서 그렇지, 오작은 둔각을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을 빨리 떠나기 위해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둔각을 버리는 결정을 내리는 게 무척 고통스러울 텐데, 자신은 그것도 헤아리지 못하고 굳이 반대하며 형의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아니야. 내가 감수해야 할 부분일 뿐이야. 그리고 귀한 물건을 찾아 다시 둔각하고 바꾸면 돼."
그때 귀령성모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결론이 난 것 같으니까 이만 거래를 진행하는 게 어때?"
"좋습니다. 대신 조건 하나 달고 싶군요. 월각수보다 더 귀한 물건으로 거래를 제시했을 때 거부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좋아."
귀령성모는 아주 통쾌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속마음은 달랐다.
'멍청한 인간. 월각수를 일월주의 먹이로 주려는 건데. 네가 아무리 귀한 물건을 들고 와도 그땐 월각수의 그림자도 없을 거야.'
귀령성모는 속내를 감춘 채 거래를 진행했다.
"이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숲이 하나 나올 거야. 맑은 샘도 있고 과일도 있어. 그리고 굵은 나무도 많으니 마음껏 베어 배를 만들든지 뗏목을 만들든지 해. 출발 준비가 끝나면 크게 '귀령성모'라고 외쳐. 그럼 내가 결계를 열어줄게."
오작은 둔각을 쓰다듬던 걸 멈추고 아쉬운 걸음으로 떠났다. 둘이 사라지자 귀령성모는 품에서 월광초月光艸를 꺼내 둔각 입에 넣어줬다.
'이대로 뒀으면 죽었을 거야. 저 멍청이들이 정체도 모르고 그냥 말처럼 대했겠지.'
월광초의 기운 덕분에 둔각은 빠르게 회복했다. 그러나 귀령성모는 몸을 일으킨 둔각의 입에 계속 월광초를 집어넣었다.
월광초는 달빛으로 자라는 풀이다. 그러나 순수함이 부족하여 일월주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일월주가 거부하지 않을 정도의 높은 순도로 정제하려면 무척이나 공을 들여야 한다.
천성이 느긋하여 어떤 관점에선 게으르게 보이는 귀령성모한텐 정말 귀찮은 일이었다.
그러나 월각수가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월각수는 월광초나 월령초에서 달의 기운만 흡수하고 남은 기운은 그대로 버린다. 그렇게 포화상태까지 폭식한 월각수를 일월주에게 먹이로 주면 대화해줄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먹성이 좋은데?'
귀령성모가 몸에 지닌 월광초를 전부 먹였음에도 둔각의 머리엔 뿔이 자라지 않았다. 지금 이대로 일월주한테 줘도 되지만, 뿔이 자라 기운을 최대치로 머금은 월각수여야 제대로 환심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귀령성모는 법술로 둔각까지 데리고 약초 창고로 이동했다.
"먹어."
창고에는 일엽초日燁艸와 월광초 그리고 월령초月靈艸로 가득 찼다. 귀령성모의 꿍꿍이를 전혀 모르는 둔각은 월령초 더미에 주둥이를 묻고 마음껏 포식했다.
그런데 일각이 지나고 또 일각이 지났는데도 둔각의 머리엔 뿔이 자라지 않았다. 귀령성모는 뜻밖의 횡재에 신나서 어렵게 모은 약초들이 빠르게 사라지는 게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때, 일월주가 윙윙 울었다. 귀령성모는 이마를 찌푸리며 창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쭉 둘러보니 오작과 치우가 모습을 드러냈던 해변에 이상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하나 나타났다.
"귀갑어 얘기에 너무 쉽게 넘어갔어. 저놈이 결계를 뚫고 시험 삼아 놈들을 들여보낸 거구나."
사실은 귀단을 삼킨 치우 덕분이었지만, 귀령성모의 오해를 풀어줄 사람은 없었다.
"너희가 먼저 날 속인 거니까 내가 약속을 깨도 할 말이 없겠지."
귀령성모는 오작과 치우도 죽이기로 했다. 처음부터 둘을 죽이고 둔각을 빼앗을 수 있었지만, 가꾼 화원이 칭찬받아 기쁜 나머지 거래하기로 했었다.
"먼저 저놈부터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말을 마친 귀령성모의 모습이 사라졌다. 귀령성모가 떠난 창고에선 둔각이 온갖 귀한 약초를 허겁지겁 삼켰다.
"네가 섬의 주인인가?"
침입자는 갑자기 나타난 귀령성모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담담한 말투로 질문했다.
"네놈은 누구냐? 여기가 어딘지 알고 기어들어 온 것이냐?"
귀령성모는 처음 보는 옷차림의 남자에게 호통쳤다.
"그럼. 본좌本座가 천기를 읽으니 오늘이 바로 네가 악관만영惡貫滿盈하여 천벌을 받는 날이다."
"내 결계를 뚫은 걸 보면 무명소졸은 아닌 것 같은데, 이름이나 대라."
"접인接引이라고 불러라."
"네가 바로 소문으로만 듣던 서방교西方敎의 호법이구나. 멍청한 천교闡敎와 손을 잡았다더니 하늘이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구나."
귀령성모는 일월주를 머리 위에 띄우고 오른손엔 길이가 넉 장(6.8m)이나 되는 창을 들고 왼손엔 거북 등 껍데기처럼 생긴 방패를 들었다.
그에 맞서 접인도 탕마저蕩魔杵를 들었다.
한편.
오작과 치우는 샘물로 갈증을 풀고 과일로 배를 채웠다. 게다가 서둘러서 큼직한 뗏목을 만들기도 했다.
"돌아가서 둔각을 훔치자."
뗏목을 묶은 밧줄에 일일이 강화 법술을 거는 치우한테 오작이 말했다.
"응?"
"아깐 거절하면 죽일 것 같아서 승낙한 거야."
- 작가의말
두 주인공의 행보를 따라 새로운 세상을 펼쳐 보이겠습니다. 부족한 필력으로 생생하게 전하는 건 어려울 것 같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김용 무협을 읽으면서 내가 저 세상으로 가면 어떤 무공을 배우고 누구랑 친분을 쌓을지 상상하던 즐거움을 독자분들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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