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손치우王世孫蚩尤
치우부정蚩尤扶正
치우는 제자리를 찾고
구려반과玖黎反戈
구려는 반격하다
구려국 대신들은 붉게 상기한 얼굴로 왕좌에 꼿꼿이 앉은 왕을 보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정무를 보기 힘들 정도로 아팠던 왕이 맞나 싶게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완전히 풀이 죽은 둘째 왕자의 모습도 지지자들한테 큰 시름을 안겼다.
"올 만한 사람은 다 왔군. 그럼 시작하지."
왕의 위엄 가득한 목소리에 대신들은 긴장으로 등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노환으로 최근 몇 년 유약한 모습을 가끔 보였는데 지금은 범처럼 흉포한 기세만 느껴졌다.
"우선. 후계자를 선포하겠다."
대신들은 서로 바라보기도 하고 둘째 왕자와 셋째 왕자의 기색을 살피기도 하면서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며칠 전에 치우 왕손이 찾아왔다. 키는 십이 척이고 황금용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입었다. 그간 천하를 돌며 인간을 해하는 요괴들을 처단했다고 하는구나. 태산 서남쪽에 악명이 자자한 청익혈편복을 처단한 게 바로 치우 왕손이다."
청익혈편복의 이름은 일반 백성들한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수명을 늘려주고 건강을 찾아주는 혈령단 덕분에 왕이나 대신은 대부분 혈편복의 이름을 들은 적 있다.
동부에 청제나 뇌공 빼고는 상대할 만한 술사가 없는 대단한 요괴로 알려졌기에 치우 손에 죽었다고 하니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치우 왕손은 법술과 무공에 능하고 힘이 장사이며 학문에 통달하고 천문과 지리에도 깊은 조예를 보였다. 마협의 부대를 이끌어 칠봉국의 천백 규모의 군대를 사망자 하나 없이 물리쳤고, 팔백칠십 명을 포로로 잡았다."
"투구와 갑옷 천백스물세 벌, 방패 천칠십 매, 활 삼백이십 자루와 화살 이천여 발, 조잡하기는 하나 천이 넘은 무기를 전리품으로 얻었다."
왕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시종들이 동쪽 창문을 모두 열었다. 창문을 통해 산더미처럼 쌓인 갑옷과 투구와 방패 그리고 무기를 확인한 대신들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게다가 법술로 죽은 자들의 주검을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학문과 위엄과 무력은 물론, 자비심까지 갖춘 훌륭한 아이 아니더냐?"
"감축드리옵니다. 왕께서 백성을 바르게 다스리니 그 복이 왕손한테 몰린 것 같습니다."
약삭빠른 대신이 목청을 가다듬고 아부의 말을 했다.
"내가 한 게 뭐 있느냐. 다 대신들이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 큰 덕분 아니겠느냐."
그제야 정신을 수습한 대신들이 앞다투어 축언을 올렸다.
"치우 왕손은 구망한테서 법술을 배웠고 북부제일의 고수이자 대협객인 자단에게서 무공을 배웠다고 한다. 게다가 자단은 치우를 어여삐 여겨 양자로 삼았다."
이쯤 되면 왕이 뭘 말하려는지 모를 멍청이는 없었다.
"왕세손이 훌륭하게 성장했다니 참으로 왕의 홍복이옵고 구려국의 기쁨 이옵니다."
치우의 호칭이 은근슬쩍 왕손에서 왕세손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천계에서 쫓겨난 태고의 마수한테서 절세의 영약을 얻었다. 내가 딱 한 방울 음복했는데 서른 살 젊어진 기분이다."
삼십 년 전이면 왕이 참마도 하나로 동부를 호령하던 때다. 삼묘국이나 청고국을 비롯한 국가들이 훼방을 놓지 않았다면 영위앙이 아닌 왕이 청제가 되었을 것이다.
"생각 같아선 충직한 대신과 장수 모두한테 주고 싶으나, 죽은 자도 살리는 영약이 흔할 턱이 없지 않겠느냐. 내 신중히 고민하여 공정하게 분배하겠다."
대신들이 앞다투어 아부의 말을 올렸다.
"그럼 아까 하려던 말을 마저 끝내자. 난 치우 왕손을 왕세손으로 하여 정식 왕위 계승자로 점지하려 한다. 반대하는 사람 있는가?"
어제까지 둘째 왕자를 지지하던 자들이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간 둘째 왕자한테 받아먹은 게 많아서 양심이 조금 찔렸다.
"반대하는 자가 없구나. 그럼 이제부터 치우 왕세손이 다음 왕위 계승자임을 선포한다."
왕의 선포에 시종관이 크게 외쳤다.
"어서 전령을 보내 백성은 물론 주변 국가에 널리 알려라."
그제야 대신들은 왕의 곁에 선 시종관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검은 머리의 시종 얼굴에서 환갑이 넘은 늙다리 시종을 엿본 대신들은 치우가 구했다는 영약을 어서 얻고 싶어 안달이 났다.
"두 번째 안건이다. 마협은 가운데로 나오거라."
마협은 칠봉국을 함락하자마자 치우의 편익조를 받고 말을 달려 형양에 복귀했다. 옷은 새로 갈아입었지만, 초췌한 기색은 숨길 수 없었다.
"마협은 왕세손을 도와 칠봉국의 주력 부대 천백을 물리쳤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칠봉국으로 가서 배은망덕한 간왕奸王(간교한 왕)과 그 피를 이은 자들을 전부 처단했다. 그 공을 높이 사 현재 공석인 재상으로 임명한다."
재상은 나라의 살림꾼이다. 만약 재상으로 임명한 자가 둘째 왕자 편이 되면 왕이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둘째 왕자가 계승자 되는 걸 막지 못한다.
그래서 몇 년째 재상 자리가 공석이었는데, 치우의 추천으로 마협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마 장군의 공이 재상의 자리를 줄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반대한 자는 다름 아닌 마협의 아버지 마준이었다. 강직하기 이를 데 없는 마준은 몇 년 전에 둘째 왕자의 농간으로 한직에 밀려났지만, 왕과 국가에 대한 충정은 여전했다.
"어허. 칠봉국이 이젠 구려국의 영토가 되었는데 공이 작다니."
왕의 눈짓에 시종관이 죽간 하나를 넓게 폈다.
"마협이 받아온 죽서다. 칠봉국 왕이 죽기 전에 칠봉국을 구려국에 바치겠다고 공언했다."
마준은 놀란 나머지 두 눈을 부릅뜨고 마협을 쏘아봤다. 마협은 아버지한테 사실대로 말하지 못한 게 미안하여 고개를 숙여 눈을 피했다.
"칠봉국의 목재와 가죽이 구려국에 얼마나 필요한지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게다가 마협이 재상 자리를 감당할 재능도 충분하니 이는 포상이라고 하기엔 너무 부족하구나."
"마협을 훌륭히 키운 마준에게 목진액 한 방울을 하사한다. 마준은 잔소리 말고 어서 앞으로 나오거라."
왕의 서릿발 같은 호통에 마준은 거절하지 못하고 앞으로 나갔다. 왕은 소매에서 작은 병 하나 꺼내 마준에게 건넸다.
"지금 당장 마셔."
마준은 사방에서 오는 압박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마협의 존경심이 가득 담긴 눈길과 마주치자 호연지기가 솟았다.
"하하. 형님. 옛날 생각나는구려."
말을 마친 마준은 병마개를 열고 안에 든 액체를 입에 쏟았다. 고작 한 방울인데 엄청난 청량감이 몸을 휘감았다.
"저, 저."
대신들이 무엄하게 마준을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마준은 몸이 젊어지며 힘이 깃드는 상쾌한 느낌에 취해 대신들의 무례를 마음에 담지 않았다.
"마준을 형양 수비대의 대장직으로 복권한다."
왕의 결정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구려국 군대를 지휘하는 세 명의 장군 중 하나인 마협도 대단하지만, 아버지인 마준과 비교하면 용맹도 무공도 부족했다.
그런 대단한 자를 승진도 아니고 그저 복직한다는데 반대할 멍청이는 없었다. 더구나 마준의 아들 마협은 이제 재상이다.
"둘째 왕자한테 이름을 내린다."
대신들은 뜻밖의 전개에 어안이 벙벙했다. 구려국은 왕세자나 왕세손이 아니면 정식 이름을 받지 못한다. 치우도 정식 이름이 아니고 그저 아명이다.
"둘째 왕자의 이름은 이제부터 칠봉이다. 새로 점령한 칠봉국의 영토를 다스리는 일을 칠봉에게 맡긴다. 원하는 사람은 본인이 직접 설득해서 데려가거라."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비록 못난 자식이지만, 왕은 작은 기회를 주기로 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칠봉이 감격한 눈으로 허리를 굽혔다. 평생 이름도 없이 아명으로 살아야 하나 했는데, 가장 절망하던 때에 한 줄기 따스한 빛이 드리웠다.
'오작 그 아이는 참 대단하구나. 지금껏 하나도 빗나가지 않았다.'
"그간 상국에 무례하게 굴던 신하국들을 응징할 것이다. 셋째도 곧 이름 받을 준비를 해라."
왕의 선포에 셋째 왕자는 물론 대신들도 기뻐했다. 영위앙이 청제가 되기 전엔 여러 강국의 견제로 확장하지 못했고, 영위앙이 청제가 된 뒤에는 지키느라 바빴다.
오장국의 급부상으로 구려국이 견제를 덜 받는 지금이 확장의 적기인데, 왕이 침상에 눕고 후계자도 정해지지 않은 바람에 아무 일도 벌이지 못했다.
지금은 왕도 젊고 건강해지고, 구려국 제일의 용사인 마준도 전성기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오랜 기간 눌렸던 웅심이 터지고, 왕이 둘째 왕자에게 이름을 주는 거로 그간 쌓인 앙금이 풀리며 대청에는 한번 힘을 합쳐보자는 뜨거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제부터 칠봉국의 뒤를 이어 멸망할 국가를 어디로 할지 상의하자꾸나."
한편.
오작은 우마왕과 독대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솔직히 얘기하세요."
오작의 말에 우마왕은 커다란 코를 씰룩였다.
"입에 발린 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원하는 바가 없다고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전전대 가주와 대가주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압니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솔직히 원하는 바를 말할 수 있는 상대라고 여겨 단도직입으로 묻는 겁니다."
"봉신책을 아십니까?"
천구가 언급한 적 있다.
"육신까지 갖고 천계로 갈 방법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는 잘 모릅니다."
"봉신책은 죽편이나 귀갑 그리고 대퇴골로 만든 일반적인 책과 다릅니다. 쭉 이어진 죽간과 달리 이런 식으로 접혀서 한 장씩 넘기며 읽을 수 있는 특이한 형태입니다."
우마왕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봉신책은 총 삼백육십오 장으로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아무 내용도 없습니다."
봉신책의 삼백육십오 장은 한 면에만 글자를 적을 수 있다. 누군가가 봉신책의 장 하나를 얻어서 거기에 자기 진명을 적으면 정해진 시기에 천계로 올라간다.
"고작 이름을 적는 것으로 승천이 이뤄진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봉신책으로 승천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이름이 적힌 책장冊張은 본인이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한다. 책장은 선행을 펼치면 가벼워지고 악행을 하면 무거워진다.
충분한 선행을 쌓으면 책장이 날아서 봉신책으로 간다. 책장이 봉신책에 들어가면 하늘에 구멍이 열릴 때 승천할 수 있다.
"삼백육십오 장이 모두 봉신책으로 돌아가야 구멍이 열립니다. 그래서 봉신책을 통해 언제 승천하게 될지는 누구도 모릅니다. 책장을 얻은 누군가가 자기 진명을 몰라 시간을 허비할 수도 있고, 책장에 진명을 적은 자가 악행을 일삼으며 봉신책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승천이 끝난 후 책장은 온갖 모양으로 변해 세상 만물에 깃든다. 그걸 찾아내어 책장을 뽑아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자기 진명을 적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또 문제가 있습니다. 진명을 다른 사람이 알아내면 소환술로 책장을 뺏을 수 있습니다."
뇌공이 누구한테도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 이유다. 뇌공의 진명을 알아낸 누군가가 소환술을 펼치면 책장을 빼앗을 수 있다. 소환술로 책장을 뺏은 자가 진명을 지우면 뇌공은 승천할 기회를 영영 잃게 된다.
"소환술을 펼치면 무조건 빼앗을 수 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러나 통천교주나 서왕모 같은 자가 소환술을 펼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지켜낼 사람이 천하에 다섯이나 되겠습니까."
"우마왕 당신이 봉신책의 책장을 원한다는 건 이해했습니다. 그게 날 돕는 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소가주한테 봉신책의 빈 책장이 있습니다. 그것도 여러 장입니다. 저는 소가주를 열심히 돕고, 이후에 단 한 장이라도 얻으려는 생각입니다."
오작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백초거가 노리는 게 봉신책 책장이구나. 욕수도 자기 소원 어쩌고 하는 걸 보면 내게 있다는 걸 안다. 단, 백초거는 그게 뭔지 알고 욕수는 모른다. 그렇다면 백초거가 나랑 더 가까운 사람이라는 뜻인데.'
오작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소오가 세상에 내 이름을 아는 건 숙부와 자신뿐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내가 봉신책에 이름을 적는 걸 대비하여 어려서부터 비밀로 한 거겠지. 그렇다면 우리 가문은 단일 세력한테 멸망할 정도로 하찮지 않다.'
어떤 경로로 얻었는지 모르지만, 봉신책의 책장 몇 개나 보유한 가문이다. 오작은 가문의 멸문지화에 훨씬 큰 비밀이 있다는 직감을 받았다.
"그게 뭔지는 압니까?"
"모릅니다. 알면 소가주와 치우가 위험에 처했을 때 거래를 시도했겠죠."
우마왕은 오작의 몸에서 봉신책 책장을 찾아내려고 늦게 등장했다. 위기 상황에 거래로 확실히 얻어내려 했는데, 그대로 두면 둘 다 죽을 것 같아 끝내 개입한 것이었다.
"말뿐인 약속 하나 드리죠. 진짜 봉신책 책장이 있다면 당신한테 하나 꼭 주겠습니다."
우마왕이 눈물과 콧물을 쏟았다. 치우가 아기로 보일 정도의 커다란 덩치가 그러니 조금 징그러웠다.
"제 아버지는 천계의 청우靑牛입니다. 저는 아버지와 한 번도 만난 적 없어 피에 각인된 재능을 각성하지 못했습니다. 꼭 육체를 보존한 채 천계에 가서 아버지를 만나야 합니다."
- 작가의말
우마왕은 아빠 찾으러 천계로 가려는 겁니다. 아빠를 만나 피에 잠재된 힘을 격발하면 손오공이랑 형·동생 하는 어마어마한 요괴가 될 수 있거든요.
Commen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