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융봉전투祝融峰戰鬪
오작일설烏鵲壹舌
오작이 혀 하나로
도전이효挑戰貳梟
두 효웅과 싸우다
"허허. 놀랍군."
바둑알을 들고 고심하던 축융이 말했다.
"뭐가? 이 공격을 막을 법술이 너한테 최소 세 개는 있을 텐데?"
즙무혼은 상대의 법술을 끌어내기 위한 평범한 공격에 축융이 감탄하자 영문을 물었다.
바둑은 천계에서 만든 놀이다. 흰 돌과 검은 돌을 들고 상대를 공격하는데, 법술에 따라 필요한 돌 개수가 다르다.
상대 법술에 당해 죽은 돌은 사석死石이라고 부르며 일정 기간 다시 사용하지 못한다.
자신의 돌을 소모하여 상대 돌을 죽이는 바둑이라는 놀이는 법력의 차이를 무시하고 순수하게 법술 경지와 응용을 겨루는 수련이다.
노련한 술사가 어린 술사한테 경험을 키워주는 데 엄청 좋은 수련 방식이긴 하지만, 바둑판이나 바둑알 만드는 게 너무 어려워서 널리 쓰이지 못했다.
"그거 말고. 자네가 말한 아이가 방금 축융봉에 발을 들였네."
말을 마친 축융은 바둑알 열두 개를 판에 놓았다. 즙무혼의 바둑알 다섯 개를 죽이는 동시에 자신의 수비도 탄탄하게 하는 묘수였다.
즙무혼은 흰 돌을 만지작거리며 한참 망설였다.
"지금까지 참았는데 더는 어렵군. 왜 공공한테 강제명의 위치를 알려줘서 날 꺼내게 한 건가? 그만한 사정이라도 있는 건가? 염무백炎無魄."
이름을 불린 축융의 눈이 흉악하게 변했다.
"난 이젠 그저 축융이야. 주작란을 먹고 주작의 화신이 된 이후 염무백은 사라졌네."
나방이 요화의 시련을 견뎌 명화접이 되면 새로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다. 삼계의 오방신 역시 화신이 된 후엔 완전히 새로운 존재라고 해도 된다.
기억은 남기에 구망처럼 가족의 정을 잊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공공처럼 옛 부하들을 돌보기도 하지만, 후토처럼 부족과 연을 끊고 사는 자도 있다.
"자네가 북망산을 일찍 방문했어도 상황이 달라졌을 거야."
창녕산 출신 중 염무백이 가장 먼저 격대전이에 성공했다. 이는 염무백의 일족 몸에 환수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창녕산 출신들이 모두 혼의 힘이 백보다 월등히 강하지만, 염씨 일맥은 그게 훨씬 두드러졌다. 덕분에 격대전이를 완벽에 가깝게 성공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네. 자네의 격대전이를 돕는 게 내겐 최선이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주작의 화신이 된 축융은 창녕산에 갈 수 없었다. 청룡이 부정한 것을 없애야 한다고 할 때 북망산을 콕 집어 얘기했듯이, 주작 역시 북망산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주작을 섬겨야 하는 축융으로선 북망산에 발을 들인다는 건 상상조차 두려운 일이었다.
"자네가 왕씨 가문을 공격하지만 않았어도 이 지경이 되진 않았을 걸세."
축융의 힐난에 즙무혼은 이를 악물었다. 북부 통일을 반대하는 왕씨 가문을 치우느라 너무 큰 대가를 치렀다. 이해 가지 않는 명령에도 군소리 없이 따르던 수하 대부분이 죽었고 정무와 공공의 공격에 큰 상처를 입고 숨어야 했다.
"그건 자네라도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을 거요."
말을 마친 즙무혼은 바둑알 스물세 개를 소모하여 축융을 공격했다. 비록 상대 돌을 하나도 죽이진 못했으나 바둑판의 형세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북부 통일을 반대하는 왕씨 가문을 숙청한 건 복합적인 이유였다. 반대파를 없앤다는 명분이 있고, 오작이라는 핏덩이를 서왕모한테 넘기면 북부와 서부의 연합이 이뤄진다.
그리고 함추뉴가 요괴들과 협의를 성사시키는 바람에 마음이 다급했다. 중부는 사람만큼 요괴가 많아 잠재력은 커도 발전이 느렸다. 그런데 협의로 물길과 산길이 열리면 빠르게 강해질 게 분명했다.
더 중요한 건, 왕씨 가문이 격대전이에 관련하여 조사한다는 정보가 있었다.
"날 협박하는 건가?"
축융이 이를 살짝 갈았다.
"아닐세. 그저 자네가 날 너무 밑으로 보는 것 같아서 귀띔하는 거지. 자네 오판으로 우리 사이가 더 벌어져서야 되겠는가."
방금 즙무혼이 펼친 공격은 축융의 약점을 노렸다. 격대전이는 반드시 하나의 약점이 있지만, 그건 사람마다 다르다. 본인은 반드시 알지만, 타인은 격대전이에 관한 정확한 지식이 없으면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바쁜 와중에도 내 뒷조사를 하셨다 이거군."
약점을 알아내려면 염무백뿐이 아니라 격대전이를 하는 상대에 관해서도 자세히 알아야 하고, 수많은 격대전이 법술 중 어느 방식을 사용했는지도 확실히 알아야 한다.
"자네가 법술 도중에 마음이 약해져서 즙선기의 삼혼을 살려두지 않았다면 나도 자네 뒤를 캐진 않았을 거요."
축융은 즙무혼의 격대전이를 도울 목적으로 즙선기와 친분을 쌓았다. 즙선기가 흑제 되는 것도 도왔고 세력을 크게 키우는 것도 몰래 도왔다.
그 과정에 감정이 깊어져 격대전이 때 삼혼을 파괴하는 대신 뽑아서 윤회환으로 보내주려 했다.
"서로 약점을 아니까 비긴 셈이군."
"아니지. 내 약점은 인도에서도 알아. 그러니까 비긴 게 아니라 내 우위네. 비밀은 비밀일 때만 가치 있는 거 아닌가?"
축융은 신중하게 다음 수를 고민했다. 여기에서 패배를 인정하면 즙무혼이 기고만장해진다. 자신의 약점을 안다고 상대한테 고개 숙이는 것밖에 안 된다.
축융의 마음이 그렇지 않다고 해도 상대는 그렇게 받아들일 거고, 그러면 기세를 완전히 빼앗기게 된다.
"참. 미무골의 소식 들었는가? 약점 없는 육체를 만든다고 하던데."
딱히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자 축융은 말로 즙무혼을 흔들었다. 과연, 예상대로 즙무혼의 눈이 커졌다.
"그게 가능한가?"
"최소 십만 명의 목숨이 필요한 일이라더군. 그 숫자는 거의 채웠고 말이지."
"왜 나한테 알려주지?"
축융은 바둑알을 만지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난 주작의 화신이네. 천계의 주작이 소멸하거나 삶에 권태를 느껴 자결하지 않는 한 영생을 누리게 되었지. 그러니까 약점 없는 육체가 그다지 반갑지도 않네."
즙무혼은 몸을 뒤로 살짝 젖히고 하늘을 쳐다봤다.
"설마 그 완전한 아이와 같은 육체를 만드는 건가?"
즙무혼은 물론, 축융도 남화교가 준비한 육체가 인간이 아닌 혈곤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태상노군처럼 완벽한 인간을 만드는 줄로 오해했다.
"그건 나도 모르겠네. 그러나 완전한 아이를 우연히라도 만든 가문이 미씨였다는 걸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않겠는가?"
한참 고민하던 즙무혼이 돌을 던졌다.
"좀 더 자세히 알아봐 주게. 부탁하네."
다 이긴 판인데도 즙무혼은 미련 없이 패배를 선언했다. 미무골이 만든다는 신체에 다시 격대전이를 할 생각이다.
이미 흡수한 흑수해의 힘이 아깝긴 하지만, 약점이 들킨 마당에 그걸 애석해할 처지는 아니다.
"우선 칼을 들고 온 손님부터 달래야 하지 않겠나."
"다시 뵙는군요. 축융 어르신."
시원한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어느새 오작이 노양궁에 도착한 것이다.
"그래. 강제명 그 아이를 무사히 돌려보내 줘서 고맙게 생각한다. 게다가 내 오랜 벗도 무사히 풀려났으니 기쁨이 두 배구나. 아직 우리 회포를 다 풀지 못했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거라."
축융은 자신과 즙무혼의 친분을 알리며 오작에게 물러날 것을 종용했다.
"제가 가문의 원수를 갚으려고 합니다. 혹시 더러운 피가 귀한 땅을 적시는 게 걱정되시면 저놈을 끌고 밖으로 가겠습니다."
오작의 광오한 말에도 즙무혼은 나서지 못했다. 흑수해부터 북망산까지 오작한테 쫓겼고, 북망산에서도 오작의 창에 요해를 공격당해 큰 부상으로 도망쳤다.
멸천칠절공에 대한 두려움은 팔과 함께 버렸지만, 오른쪽 가슴을 반쯤 뚫리며 새로운 공포가 생겨났다.
오른쪽 가슴만 확실히 수비하면 질 일이 없음을 머리로 똑똑히 알지만, 이유 모를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자신이 진다는 생각은 전혀 없지만, 온전하지 않은 몸으로 오작과 싸우는 것 역시 달갑지 않았다.
"난 오랜 친구를 도울 수밖에 없구나."
축융은 즙무혼의 약점을 알고 즙무혼 역시 축융의 약점을 안다. 그러나 약점을 안다고 끝인 게 아니다.
범의 심장을 찌르면 죽는 걸 모르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나 범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즙무혼을 죽일 자신이 없으니 편을 들어줘야만 하는 상황이다.
"조금 버겁지만, 둘을 상대해야겠지요. 추후 소문이 이상하게 안 나도록 제가 최대한 사실대로 밖에 알리겠습니다."
둘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솜털이 갓 가신 것 같은 애송이 상대로 축융과 흑제가 연수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엄청난 망신이다.
축융이야 세력을 일굴 생각이 없으니 그나마 괜찮지만, 어떻게든 높은 자리로 가려고 아득바득하는 즙무혼한테는 좋은 일이 아니다.
흑제 자리에 대한 미련을 버리면 상관없지만, 늘 욕심이 문제였다.
"자넨 구경만 하게. 이놈은 내가 손수 죽이지."
오작은 언변으로 축융의 개입을 막고 즙무혼의 화도 돋우었다. 축융은 그나마 나은 해결책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축융 어르신은 노양궁에 계십시오. 저는 이 형편없는 자와 함께 산자락에서 싸우겠습니다."
말을 마친 오작은 무방비하게 몸을 돌려 밑으로 걸었다. 즙무혼은 환히 드러난 오작의 등을 보며 이를 갈았다.
순수한 술사인 축융과 달리 즙선기의 몸을 차지하면서 무공에 대한 재능도 얻었다. 지금 오작의 등을 공격하면 회신창回身槍에 오른쪽 가슴이 뚫릴 것이다.
물론. 오작도 죽거나 죽음에 가까운 상처를 입겠지만, 죽거나 죽음에 가까운 상처를 입는 건 즙무혼 역시 마찬가지다.
오작이 죽고 즙무혼이 살면 그나마 괜찮지만, 오작도 살면 축융도 방금 한 말이 있어 즙무혼을 도울 수 없다.
"아, 아쉽네."
오작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 탄식하며 걷는 속도를 높였다. 어느새 환하게 드러났던 오작의 빈틈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멍청한 놈이 말려들었구나.'
축융은 즙무혼의 기세가 살짝 위축된 걸 느꼈다.
오작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약점을 드러내는 거로 즙무혼을 유혹했고, 즙무혼은 망설였다. 오작은 약점을 단숨에 숨기는 거로 함정이었음을 즙무혼에게 알렸다.
즙무혼은 방금 기습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들 수밖에 없고, 당장 오작과 싸울 때 공격을 망설일 수밖에 없다.
방관자인 축융은 이러한 사실을 알아챘지만, 둘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이미 약속했기에 조언을 건네지 못했다.
즙무혼은 법보 하나 꺼내어 오른팔로 변화한 후 오작의 뒤를 따랐다. 오작은 빈틈을 드러냈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즙무혼을 농락했다.
즙무혼은 오작이 자신을 흔들려는 수작이라고 판단하여 마음을 굳게 잡았다.
오작의 계책에 걸려 자신이 공격보다는 수비적인 성향으로 싸움에 임할 것이라는 건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이쯤이면 네 친구가 널 못 도울 것 같군. 혹시 죽기 전에 남길 말이라도 있어?"
'격장법이다. 화를 내면 안 된다.'
즙무혼은 이미 오작한테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여전히 인지하지 못했다. 자신보다 약한 오작을 상대하면서 심리가 수비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신중하려는 생각뿐이었다.
'자만하지 말자.'
며칠 고심하여 짠 계책대로 일이 진행되었다. 축융을 싸움에서 배제하는 것까지는 어느 정도 성공을 확신했지만, 즙무혼이 멍청하게 걸려들 건 예상 밖이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나은 결과라고 좋아하기엔 이르다. 즙무혼과 오작은 객관적으로 실력 차이가 크다.
상대 약점을 알지만, 상대도 오작이 약점을 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니 아닌 척하며 다른 곳을 공격하다가 약점을 찌르는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
싸움 직전까지는 수를 써서 이득을 취할 수 있지만, 이제부턴 실력도 중요하다.
오작의 멸천창을 상대로 즙무혼은 삼 척 정도 길이의 짧은 막대기를 들었다. 전에 들었던 수정 막대기보단 못하지만, 하찮은 법보는 아니었다.
"이건 어때. 둘 중 하나가 죽어야 오늘 싸움을 끝내는 거야."
"그래. 나도 꼭 그러고 싶었다."
오작은 창끝으로 즙무혼의 오른쪽 가슴을 겨눈 후 크고 작은 동그라미를 면면부절하게 그려나갔다.
분명히 창끝이 계속 움직이는데도 늘 오른쪽 가슴의 약점만 노리는 것 같아 즙무혼은 함부로 공격을 펼치지 못했다.
흑수해의 흡수를 끝냈을 때 즙선기한테 주도권을 빼앗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공공과 오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 역시 즙무혼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북망산의 관을 보관한 곳으로 가서 자신의 칠백을 흡수하고 흑수해의 흡수도 끝냈을 때 즙무혼에겐 선택지가 있었다.
결계를 건드리지 않고 계속 그곳에 머물면서 즙선기의 무공 재능을 완벽하게 흡수하고 소화해도 된다.
혹은 결계를 건드려 출입을 어렵게 한 다음 도망쳐 숨어서 수련해도 된다.
그러나 다시 북부를 차지하려는 생각과 오작과 치우의 재능을 질투하는 마음에 셋 모두 당장 죽이려고 서두르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즙선기의 무공 재능은 오작 못지않지만, 즙무혼은 그걸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너무 소극적이다.'
공격은 생각도 않는 즙무혼을 보며 오작은 힘이 하나도 안 실린 찌르기로 도발했다.
- 작가의말
오작의 최대 무기는 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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