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충하어빙夏蟲何語氷
음양무계陰陽無界
음과 양은 경계가 없으니
계유인분界由人分
인간이 정하기 나름이다
밤의 바다는 하늘보다 어둡다. 그 어두운 바다 위에 태극구가 환하게 빛났고, 태극구의 가르침은 오작에게 시커먼 세상을 비추는 한 줄기 광명이었다.
오작한테만.
"그냥 익히는 방법이나 가르쳐. 달랑 구결 알려주고 알아서 익히라는 게 말이 돼?"
어느새 잠이 달아난 치우가 씩씩거렸다. 법력을 몇 배나 빠르게 쌓을 수 있는 법술이라는 말에 혹해서 졸음을 다 쫓아냈는데, 물이 비친 달처럼 보이기만 하고 만질 수 없는 허망한 것이었다.
[아니. 생긴 것과 달리 왜 이리 멍청해? 구결에 익히는 방법이 다 있잖아.]
"헤헤. 내가 총명하게 생겼어?"
[응. 주인 놈은 뭔가에 갇혀서 답답하게 생겼는데 넌 시원하게 쭉쭉 뻗었잖아.]
치우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오작을 바라봤다. 그러나 오작은 구결을 곱씹느라 둘의 대화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무슨 말이야? 팔다리 시원하게 뻗은 건 형이지."
[난 외형을 안 봐. 너희 존재 자체를 보는 거지.]
치우는 이해를 포기하기로 했다. 오작은 어려운 걸 쉽게 풀어서 잘 설명하는데, 태극구는 조금 멍청한 것 같았다.
"일월동휘 다시 설명해 줘. 쉽게."
[그래. 잘 들어. 음양의 구분은 상대적이라는 말 이해했어?]
치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었지만,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음과 양은 정하기 나름이라는 뜻인데, 그렇다면 해도 음이 될 수 있고 달도 양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해는 태양太陽이고 달은 태음太陰이잖아. 이 둘은 바뀔 수 없는 거 아니야?"
[그럼 질문 하나 할게. 해에는 양의 기운만 가득하고 달에는 음의 기운만 가득할까?]
"당연히 그렇지 않을까?"
[하충하어빙!]
태극구가 버럭 소리 질렀다.
"무슨 말이야? 쉽게 하라니까."
[하충은 여름벌레야. 여름벌레 주제에 어떻게 얼음을 입에 올리느냔 말이다. 봄에 태어나 가을만 되면 죽는 놈들이. 넌 해나 달에 가보지도 않았는데 왜 해는 양의 기운만 있고 달엔 음의 기운만 있다고 생각하냐고.]
"넌 가봤어?"
[물론이지.]
"달에 진짜 토끼가 살아?"
[토끼만 사는 게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토끼랑 다르지만.]
치우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원래부터 신기한 일 앞에서 쉽게 신나는 성격인데, 할아버지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훨씬 들떴다.
[집중해. 넌 다음 주인 후보자야. 그러니까 일월동휘를 익혀서 강해져야 해.]
"알았어. 달 얘기는 천천히 하자."
[우선 순양純陽과 순음純陰, 극양極陽과 극음極陰, 태양太陽과 태음太陰의 구분부터 확실히 하자.]
약 일각의 시간을 소모하여 태극구는 치우의 머리에 셋의 다른 점을 각인했다.
"한 가지 기운만 있는 게 순양과 순음이고, 반대 기운을 배제하는 게 극양과 극음이고, 기운이 너무 크게 뭉쳐서 한 가지 성질만 띠는 걸 태양과 태음이라고 한다는 말이지?"
[그래. 아주 멍청이는 아니구나.]
"해는 양의 기운이 너무 크게 뭉쳐서 음의 기운이 있어도 느껴지지 않고, 달은 그 반대라는 뜻이지?"
[순음과 순양은 존재할 수 없고, 극양과 극음은 특별한 환경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태양과 태음은 해와 달뿐이니, 세상의 음양은 상대적이다. 네가 생각하기에 달렸다는 말이지.]
"좀 더 생각해 볼게."
말 자체를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걸 진리마냥 받아들이는 건 어려운 일이다. 말 자체가 이치에 맞는다고 실제로도 그렇다는 법이 없으니까.
일월동휘는 몸에 각인하는 법술이다. 일월동휘를 각인하면 법력이 절로 모인다. 의도적으로 수련하면 원래보다 법력이 몇 배 빠르게 모이는 효과를 보이며, 상성이 좋은 수련법은 열 배 이상도 기대할 수 있다.
[보통 낮에는 양의 기운을 수련하고 밤엔 음의 기운을 수련하지. 음양을 함께 다루는 자들은 여명과 황혼에만 수련한다. 그러나 일월동휘를 깨닫고 몸에 각인하면 어떤 환경에서든 음양을 동시에 수련할 수 있다.]
"알았어. 구결이나 한 번 더 읊어줘."
태극구는 오천 자의 구결을 느리게 한 번 읊어줬다. 구결을 다 들은 치우는 아까보다는 조금 더 알 것 같았지만, 여전히 뭔가가 풀리지 않았다.
[근데 준비 안 해? 곧 폭풍이 몰아칠 텐데.]
"폭풍? 이렇게 조용한데? 파도도 별로 없고."
[바다는 원래 그래.]
한 줄기 벼락이 어두운 하늘을 환하게 갈랐다. 그리고 바로 산이 무너지는 듯한 우레 소리가 들려왔다. 잠잠하던 바다가 어느새 넘실대며 너울을 타기 시작했고, 세찬 바람이 갑자기 생겨난 것처럼 불어왔다.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오작과 치우가 뭔가 대비해 보려고 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며칠 지속한 폭우 앞에서 둘은 가랑잎처럼 바람과 파도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형. 이번엔 진짜 끝이겠지?"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치우가 맥빠진 얼굴로 말했다. 그간 두 번이나 폭풍우가 잠깐 멈춘 적이 있다. 그러나 채 반 시진도 안 되어 더 큰 폭풍우로 성장해서 둘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몰라. 일단 점검이나 하자."
약초는 이미 다 사라졌다. 진주는 물론 무거운 산호석도 모조리 바람에 날려갔다. 남은 거라곤 이불 몇 개와 밧줄 몇 개 그리고 둔각이 변한 알이었다.
"여기 금이 간 거 같은데?"
치우의 말에 깜짝 놀란 오작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치우가 있는 곳으로 가보니 귀갑선의 바깥에 크게 갈라진 부분이 있었다.
껍데기가 하도 두꺼워서 아직 완전히 갈라지진 않았지만, 폭풍우가 한 번만 더 들이닥치면 버텨내기 힘들 것 같았다.
"자연력自然力은 참 대단하구나."
백팔염주에 백팔번뇌의 법술을 펼친 후 대력귀가 증폭하여 삼백만 근의 힘으로 눌렀을 때도 멀쩡하던 껍데기다. 그런데 며칠 폭풍우에 시달리며 암초에 이리저리 부딪쳤다고 금이 가버렸다.
[가까운 섬으로 가서 다음 폭풍에 대비해. 세 시진 뒤면 더 센 폭풍이 온다.]
잠깐 상의한 치우와 오작은 태극구의 말에 따라 껍데기를 버리고 가까운 섬으로 가기로 했다.
다행히 폭풍우에 겁먹은 귀갑어들이 바다 깊은 곳에 숨었기에 짝짓기하겠다고 덤벼드는 놈은 없었다. 둘은 이불에 감싸 밧줄로 꼭꼭 묶은 알을 챙겨 희미하게 보이는 섬으로 갔다.
지름이 오십 장(85m) 정도밖에 안 되는 자그마한 섬은 바위뿐이었다. 치우와 오작은 굴러다니는 바위로 바람을 조금 막아줄 벽을 쌓고 폭풍우에 대비했다.
태극구의 경고대로 이번 폭풍우는 며칠 동안 괴롭히던 그놈보다 훨씬 강했다.
한편.
서른여섯 섬이 합쳐서 대봉래가 되고 귀령성모의 죽음이 널리 알려졌다. 통천교주의 제자들은 벽유궁에 모여서 대책을 상의했다.
"교주께 아룁니다. 서방교의 호법인 접인이 귀령성모를 자신이 죽였다고 떠벌리며 다닌다고 합니다."
"서방교와 천교는 사실상 한 몸이나 다름없습니다. 당장 천교에 선전포고하고 전면전을 벌어야 합니다."
"귀령성모가 비록 요괴 출신이라곤 하지만, 엄연히 사부의 제자입니다. 이대로 좌시하는 건 절교와 사부의 위엄을 해하는 일입니다."
통천교주는 본인조차 얼마나 많은 법보가 있는지 모른다. 기분이 좋을 때나 필요할 때에 제자들에게 법보를 빌려주기도 하고 그냥 주기도 한다.
그래서 대부분 제자는 천교와 싸움을 벌여 공을 세우길 원했다. 공을 세워 법보를 받든지 새 법술을 배우든지 해야 서열을 높일 수 있다.
"다보多寶. 넌 어찌 생각하느냐?"
통천교주가 입을 열자 모두 숨소리를 죽였다.
"안 그래도 점을 쳐봤습니다. 귀령성모를 죽인 자는 접인이 아니라고 나오더군요."
다보도인은 통천교주의 첫 제자다. 그리고 천교와 절교와 서방교에 인도人道까지 합쳐서 삼존參尊을 제외하면 가장 강한 술사다.
서방교의 교주이자 천교 부교주인 연등도 싸움으론 다보한테 안 된다.
"그래, 누구라고 하더냐?"
"죄송합니다. 무명소졸이어서 그런지 점괘로는 안 나옵니다."
다보는 원래 다른 이름이었는데 사부한테서 받은 법보가 천 개를 넘은 순간부터 다보도인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법보 중에는 점괘를 보는 법보도 있었는데, 귀령성모를 죽인 자의 이름을 알아내지 못했다.
"교주. 조공명趙公明이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조공명은 외문제자다. 다른 사부를 모시고 수련하다가 통천교주의 눈에 들어 제자가 되었다. 절교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고수인데, 다보처럼 순수한 술사는 아니고 무공도 무척 뛰어나다.
"그래. 여기서 네가 그나마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를 잘 알지 않느냐."
조공명은 통천교주를 향해 공손히 머리를 숙인 후 말을 이었다.
"귀령성모를 죽인 건 무명소졸일 수 있습니다. 독을 비롯한 비겁한 수단을 썼을 수도 있고 함정을 파서 유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일에 접인이 연관되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정식으로 천교에 항의하여 접인의 죄를 물어야 합니다."
"교주, 결단을 바랍니다."
외문제자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그런 외문제자들을 통천교주를 사부라고 부르는 '순혈'들이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다.
통천교주는 이마를 찌푸리고 잠깐 고민했다. 통천교주 역시 귀령성모가 죽은 이유를 알려고 점을 쳤다. 그러나 다보도인과 마찬가지로 누가 죽였는지 알 수 없었다.
'점괘술은 음양오행에 기반을 둔 법술이다. 이 법술이 안 먹힌다는 건 음양오행을 벗어난 힘이 간섭했다는 뜻인데. 세상에 귀령성모를 죽일 만한 자 중에 특이한 힘을 사용하는 녀석이 누구지?'
귀령성모의 죽음은 오작과 치우의 합작품이다. 접인은 탕마저의 공격에 귀령성모가 죽은 줄로 알지만, 실상은 치우와 오작이 찌른 창이 귀령성모의 심장을 쪼갠 덕분이었다.
공교롭게도 영예주로 오행을 봉인 당한 오작과 단전에 귀갑어의 내단을 수십 개 담은 치우기에 점괘술에 걸려들지 않았다.
만약 점괘술로 진실을 알았다면 통천교주도 웃고 넘어갔을 것이다. 실력 차이가 너무 현저하여 당한 놈이 바보다. 접인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일월주로 기운을 무한히 보충받는 귀령성모라면 절대 지지 않을 싸움이었다.
"무당無當. 자단의 행방은?"
정통 제자든 외문제자든 모두 얼굴을 찡그렸다. 통천교주가 자단에 대한 총애는 누가 봐도 질투 날 정도다.
"죄송합니다.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여전히 못 찾았습니다."
무당성모는 통천교주의 모든 제자 중에서 가장 신비한 여자다. 무슨 법술을 익혔고 무슨 법보를 보유했는지 누구도 모른다.
하나 확실한 건, 비밀을 보장해야 할 중요한 일은 대부분 무당성모한테 맡긴다는 것이다.
"만 년도 넘게 살았는데 근래에 와서 갑자기 마음이 급하구나."
통천교주가 뜬금없이 한탄했다.
"너희는 내가 왜 유독 자단에게 관심이 많은지 궁금하겠지?"
"송구하옵니다."
정통이든 외문이든 나누지 않고 입을 모아 외쳤다.
"마지막으로 들인 제자여서가 아니다. 자단의 재능이 너희 중 누구보다도 부족한 건 다 아는 사실이고. 헛소문처럼 나랑 혈연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통천교주는 비밀의 일부를 공유하기로 했다.
"내 사부인 홍균노조鴻鈞老祖와 큰 사형인 원시천존原始天尊 그리고 둘째 사형인 태상노군太上老君. 난 셋 중 둘이 힘을 합친 것보다 더 강하다."
통천교주의 말에 제자들은 불경도 잊고 크게 술렁였다.
"그런 내가 왜 봉래도에 웅크리고 있는지 아느냐? 바로 천명天命(하늘이 부여한 운명) 때문이다."
"내 사부는 반고와 직접 대화했을 정도로 오래 살았고, 원시천존은 반고의 피를 이었다. 태상노군은 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났고."
통천교주의 말에 벽유궁에 모인 수백 명 제자는 소름이 확 돋았다.
"이들에겐 천명이 있다. 그 천명이 너무 커서 나와 너희의 힘을 모두 합쳐도 거스르지 못한다. 내가 봉래도를 벗어나지 않는 이유다. 괜히 육지로 가서 세상을 어지럽히면 나 역시 하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
"사부. 그게 자단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통천교주는 다보가 시의적절하게 끼어들자 기껍게 웃었다.
"천명을 거스르는 힘이 있다. 그리고 자단이 그 단서다. 자단이 그 힘을 갖췄는지 아니면 그 힘을 얻는 방법을 아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리고 자단도 모른다. 다만, 자단이 천명을 거스르는 힘과 아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점만 확실하다."
"자단 주변을 조사하면 더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통천교주는 이마를 찌푸렸다. 통천교주의 화난 눈길을 받은 제자는 벼락 맞은 개구리처럼 바르르 떨기만 했다.
"네 멍청한 머리로 생각하는 방법을 내가 몰랐을까?"
소리를 조금 키웠을 뿐인데 벽유궁 전체가 세게 흔들렸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제자는 황급히 대전에 엎드려 잘못을 빌었다.
"나가라. 이후 벽유궁 출입을 불허한다."
얼굴이 퍼렇게 질린 제자는 엎드린 자세 그대로 엉금엉금 뒤로 기어 벽유궁을 떠났다.
"너희 중 내가 생각지 못한 방법을 떠올리는 건 다보와 무당 그리고 조공명밖에 없다. 셋이 함께 자단을 찾아라. 힘을 합쳐도 좋고, 경쟁해도 좋다. 자단을 하루속히 찾아서 내 앞에 데려와라."
- 작가의말
일월동휘는 쉽게 말하면 오토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법력이 쌓이거든요. 주인공이라면 이 정도 편의는 줘야 하는 게 국룰 아니겠습니까.
선호작 2백 기념으로 한 편 더 올립니다.
Commen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