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제즙선기黑帝汁先紀
삼자대면參者對面
셋이 모이니
진상대백眞相大白
진실이 밝혀지다
"청이 하나 있습니다."
모두가 조용한 가운데 오작이 입을 열었다.
"강제명을 보내줬으면 합니다."
"그러지."
공공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이미 흑제를 놓친 마당에 굳이 구천현녀와 축융까지 확실한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신농만 죽이면 남부를 다 차지할 것처럼 큰소리치던 적표노는 이제 겨우 나라 두 개를 손아귀에 넣었다.
만일을 대비하여 구천현녀와 너무 틀어지는 것도 삼가야 한다.
"이 배는 법력으로 움직여. 남쪽으로 쭉 가다가 땅이 나타나면 배 버리고 집으로 가."
치우가 허공에서 얼음배 하나 꺼내 강제명을 태웠다. 강제명은 오작과 치우한테 고맙다고 인사한 후 배를 몰아 떠났다.
"우린 같은 편이지?"
공공이 오작한테 질문했다. 오작은 머리가 어지러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아무리 흑제여도 흑수해를 몸에 담으면 멀쩡할 리 없어. 넌 진실을 듣고 난 목숨을 취하고. 우리 힘을 합치자."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바로 강제명을 따라 여길 떠나야 한다. 그러나 자단을 구하고 싶은 마음만큼 진실을 알고픈 마음도 강렬했다. 더구나 공공의 말대로면 자단은 흑제를 죽이려는 공공을 방해하기까지 했다.
자단이 진실을 모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때. 바닷물이 쭉 갈라지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맣게 치장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자부터 신발까지 똑같은 검은색이고 오작만큼 잘생긴 남자의 정체는 의심할 나위 없는 흑제였다.
"오랜만이구나. 개산蓋傘."
바다 위에 편하게 선 흑제가 공공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그냥 죽어."
공공이 바다를 달려 흑제를 덮쳤다. 오작과 치우가 팔다리를 떨 만큼 강한 기세를 발산하는 흑제건만, 공공이 두려운지 몸을 돌려 도망쳤다.
그러나 아주 도망가진 않고 크게 원을 그리며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거기 잘생긴 청년은 견우 아들인가?"
오작은 억지로 숨을 깊게 들이켜며 떨리는 몸을 진정시켰다. 흑제의 기세는 천구나 반각 못지않게 강했다.
"네가 있어 다행이다. 내 이야기를 명심해 들어라."
흑제는 공공의 끊임없는 공격을 막고 피하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흑제가 보이는 여유에 공공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흑제가 될 때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이 네 할아버지다. 그때 네 아버지는 소문주였지. 너희 가문을 왕국으로 독립시키려고 했는데 네 할아버지가 거절했다. 계속 내 나라의 백성으로 남아 돕겠다고 했다. 피만 안 섞였을 뿐이지 우린 가족과 같았다."
오작은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흑제의 말에 집중했다.
"북부는 다른 지역보다 황량하다. 좋은 목재와 짐승 가죽이 있지만, 상대가 교역을 안 해주면 우린 굶을 수밖에 없다. 난 북부의 백성을 배불리 먹이고 싶다는 생각에 서부와 손잡으려 했다. 서부와 북부가 힘을 합치면 중부의 땅을 삼 할 정도 뺏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재야 중부가 누구도 넘보기 힘들 정도로 강해졌지만, 그때만 해도 북부와 서부보다 조금 강할 뿐이었다. 여와가 물러나며 자리를 이은 신농의 무력이 별로여서 방해 안 받고 비옥한 땅을 손에 넣기 좋은 시기였다.
"그땐 내가 흑제가 되고 십 년 정도 되었을 때다. 나는 심복만 데리고 직접 능소궁에 찾아가 백초거를 설득했다. 백초거는 다툼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어서 처음엔 극구 반대했지만, 우리 제안이 서왕모 귀에 들어가며 결국엔 힘을 합치기로 했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서왕모는 혼인 동맹을 원했다. 나와 혼인하기로 한 여자는 서왕모의 딸이자 칠선녀의 하나인 직선녀織仙女였다. 서부에선 자의선녀紫衣仙女로 불렸지."
오작은 자신의 팔괘자수선의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안타깝게도 그때 자의선녀는 이미 나와 함께 간 심복 중 하나와 사랑에 빠졌다. 능소궁에서 우연히 만난 견우와 마음이 맞은 거였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하늘의 조화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흑제는 공공이 던진 물방울을 피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그뿐이면 흠도 아니다. 어차피 정략결혼이니까. 문제는 자의선녀가 회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견우도 절대 물러설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텼다."
"그래서?"
흑제는 공공의 공격을 손으로 흘리며 탄식했다.
"어떻게 하긴. 없던 일로 하고 그대로 돌아왔지. 네 아버지가 가주 자리와 관직을 모두 내려놓는 거로 사죄하고 마무리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견우는 내가 아들처럼 생각하는 아이니까."
"그럼 뭐가 문제지?"
흑제의 이야기만 들으면 딱히 문제 될 일이 없었다.
"문제는 몇 년 뒤에 생겼다. 회임한 지 사십 달이 지나고 자의선녀가 너를 낳았다.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서왕모의 방해를 뿌리치고 널 북부에 보냈다. 그리고 서왕모가 나한테 거래를 제안했다. 널 돌려보내면 내가 원하던 군사 동맹을 맺겠다고."
서왕모가 서부를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서왕모의 강함을 아는 흑제는 감히 거절할 생각을 못 하고 어떻게든 견우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너희 가문 모두가 목숨 걸고 반발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부와 북부의 관계는 걷잡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하였다. 게다가 함추뉴가 요괴들과 협의를 이룬 덕분에 중부는 빠르게 강해졌다. 그리고 난 몸을 뺏겼다."
"몸을 뺏겼다고? 누구한테?"
공공은 물로 채찍을 만들어 흑제의 머리를 노렸다. 흑제는 공공의 질문을 무시하며 자기 할 말만 했다.
"그때 너희 가문을 공격하는 걸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몸을 뺏긴 난 반대를 무릅쓰고 공격을 강행했다. 견우와 정무가 함께 날 막았고, 난 견우를 먼저 죽이고 정무를 죽일 때 멸천칠절공에 당했다."
공공은 공격을 멈추고 치우와 오작이 있는 곳으로 물러났다. 이대로 계속 헛방만 치다간 기세가 완전히 죽을지도 모른다. 일단 마음을 다스리며 꺾인 기세부터 살려야 한다.
"내가 딱 저 때 도착했다. 멸천공에 당한 저놈을 기습해서 더 큰 상처를 입혔지. 그리고 도망가는 놈을 쫓아 거의 끝장을 보려는 순간 자단이 날 공격했다."
공공의 말에 흑제가 피식 웃었다.
"그때 널 유인한 거야. 조금만 더 가면 널 확실히 죽일 함정이 있었는데 자단이 어떻게 알았는지 거기서 널 막은 거다."
흑제의 말에 공공은 가슴이 괴롭게 울렁거렸다. 자단의 공격에 목숨을 부지한 걸 자랑으로 여겼는데, 흑제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대로 펼친 게 아니었다.
"커, 컥."
흑제가 갑자기 허리를 구부리고 검은 피를 연신 토했다. 공공은 공격할 기회를 잡으려고 애썼지만, 허리를 숙이고 피를 토하는 와중에도 틈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후. 바다 냄새는 여전히 비리구나."
고개를 든 흑제는 좀 전 모습 그대로였다.
"너 즙선기 아니지?."
공공은 기세마저 똑같은 흑제한테 질문했다.
"그럼. 난 즙무혼汁無魂이다."
"격대전이? 창녕산?"
불쑥 튀어나온 오작의 말에 즙무혼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별걸 다 아는구나."
"그게 뭔데?"
공공이 다급히 질문했다.
"후손 중에 자신과 피가 비슷하게 흐르는 존재 몸에서 부활하는 걸 격대전이라고 합니다. 창녕산은 북망산의 옛 이름이고, 즙씨는 창녕산 출신입니다. 미씨와 적씨 역시 창녕산 출신으로 추측합니다."
남화교의 제사를 본 후 오작과 치우는 한동안 그에 관한 대화를 자주 나눴다. 덕분에 치우가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고 오작도 북망산이 바로 창녕산임을 알게 되었다.
즙무혼은 긴장한 눈으로 오작을 훑었다. 상대가 혹시 자신의 약점까지 아는 게 아닌지 걱정되었다.
"뭐가 어찌 됐든, 네놈이 내 원수인 건 틀림없구나."
혼란한 마음을 수습한 오작이 기운을 일으켰다. 평소엔 평온한 호수와 같고 즐거울 땐 빛나는 별 같던 눈동자가 살의로 가득 찼다.
즙무혼의 수준에선 정말 미약한 기운이지만, 고요하게 타오르는 오작의 기세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도대체 이놈의 정체는 뭘까?'
공공만 해도 귀찮은데 생각지도 않던 오작마저 걱정거리로 떠올랐다.
오작은 기세를 다스리며 치우한테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치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눈알을 연신 굴리는 즙무혼한테 질문했다.
"네가 적무혈보다 강해?"
불쑥 나온 질문에 즙무혼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네놈이 적무혈은 어떻게 알지?"
예상대로 상대가 흔들렸다.
'기회다.'
오작의 몸이 사라졌다. 즙무혼은 황급히 양팔을 교차하여 심장과 목을 동시에 수비했다. 어느새 오작의 손에 들린 멸천창이 즙무혼의 팔과 부딪치며 거센 충돌음을 토했다.
미리 오작의 언질을 받은 치우 역시 칼을 들고 즙무혼을 덮쳤다. 마찬가지로 팔로 칼을 막으려던 즙무혼은 뒤늦게 뭔가 발견했는지 황급히 몸을 움직여 피했다.
오작의 창이 소리 없이 즙무혼의 목을 찔렀다. 칼을 다급히 피하느라 미처 몸을 추스르지 못한 즙무혼은 손바닥으로 창을 막았다. 손이 단단해 오작의 창에 뚫리진 않았지만, 찌르는 힘에 밀려 몸이 젖혀졌다.
"나쁜 새끼."
어느새 치우의 칼이 다시 머리를 노렸다. 즙무혼은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이며 치우의 마환도를 피했다. 그런데 채 굽힌 무릎을 펴기도 전에 오작의 창이 단전을 노렸다.
막을 엄두가 안 나 몸을 비틀어 피했다. 그새 치우의 칼이 발목을 노렸다. 훌쩍 뛰어 치우의 칼을 피하니 어느새 오작의 창이 다시 찔러왔다.
치우의 칼은 피하기만 해야 하기에 즙무혼은 반격 기회를 잡지 못했다.
"너흰 돌아가라."
공공이 나뭇잎에 탄 수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지면 흑제한테 고개 숙이고 북부를 위해 일해라. 내가 이기면 돌아가는 대로 북부를 통일할 거다. 뭐가 됐든 준비하고 기다려라."
부하들이 허리 숙여 인사하고 떠났다.
'새끼들. 감동했겠지?'
멀어져가는 수하들을 눈으로 배웅한 공공은 셋의 싸움에 끼어들 준비를 했다.
"틈이 생기면 강하게 찌르십시오."
오작이 등에 눈이 달린 사람처럼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정 없는 새끼. 방해하지 말란 말 한번 더럽게 꼬네.'
처음 보는 사이지만, 공공은 자신의 재능이라면 둘과 합을 맞춰 즙무혼을 몰아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작의 생각은 꽤 다른 듯했다.
"제길."
막고 피하며 반격 기회만 노리던 즙무혼은 공공까지 가세할 기색을 비치자 이를 악물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지만, 지금 상태론 셋을 당할 수 없다.
"두고 보자."
말을 마친 즙무혼은 바다로 쑥 들어갔다. 오작 역시 지체하지 않고 잠수했고 공공도 빠르게 입수했다.
수영에 자신 없는 치우는 바다를 밟으며 달렸다. 오작이 기세를 뿜어 알려준 덕분에 놓치지 않고 잘 따랐다.
'젠장. 일이 더럽게 꼬였구나.'
즙무혼은 격대전이에 성공하여 즙선기의 몸을 차지했다. 과정에 문제가 좀 있어 즙선기의 영혼이 꽤 멀쩡하게 몸에 남았다. 충격을 줘서 즙선기의 혼을 부수려고 오작의 가문을 습격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웅크리고 있던 즙선기가 방해하여 멸천칠절공에 당했다. 강한 공격은 아니지만, 당하고 보니 간단하지도 않았다.
거기에 공공이 홍도공洪濤功으로 기습하는 바람에 크게 다쳤다. 그래도 공공을 유인하여 미리 판 함정에 빠뜨려 죽였으면 흑제 노릇을 계속했을 것이다.
그런데 자단이 갑자기 튀어나와 공공을 공격했다. 큰 상처를 입은 공공은 추격을 포기했다.
공공의 존재 때문에 즙무혼은 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저 숨기만 하는 건 즙무혼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즙무혼은 검은 얼음으로 자신을 봉인하여 흑수해에 던졌다. 두꺼운 얼음의 보호로 몸을 지키며 흑수해의 힘을 조금씩 흡수했다.
그런데 강제명이 나타나 얼음을 녹이는 바람에 생각보다 빨리 몸을 드러내게 되었다.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하다가 강제명을 설득해 공공을 흑수해로 끌어들여 죽이기로 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공공은 위험을 무릅쓰고 흑수해로 내려오지 않았다. 다시 마음이 변해 공공의 지시대로 하려는 강제명을 어렵게 구슬려 얼음을 녹이게 했다.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긴 했지만, 흑수해를 급하게 몸에 담는 바람에 갖춘 힘의 채 일 할도 꺼내 쓸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흑수해를 흡수하느라 무리하는 틈을 타 즙선기가 몸을 차지한 후 비밀을 발설했고, 몸에 수작을 부려 운기를 방해했다.
'제길. 마지막 기횐데.'
이번에 죽으면 즙무혼은 영원한 죽음을 맞이한다. 순환에서 완전히 벗어나 존재를 말살당한다.
'그냥 환생하고 마는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죽었을 때 삼계윤회환으로 가는 게 나았다. 천계로 돌아가려는 욕심에 삼계윤회환을 거부했다. 특별한 방법으로 귀신이 되지 않았고 격대전이에도 성공했다.
그런데 즙선기의 영혼이 남은 바람에 모든 게 엉망이 되었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도망을 멈추고 한바탕 시원하게 싸우고 싶었다. 그러나 오작의 창은 몰라도 치우의 칼에 제대로 맞으면 어떤 꼴을 보게 될지 상상조차 두려웠다.
"게 멈추지 못할까!"
바다 위로 달리는 치우가 거슬리는 소리로 즙무혼의 속을 마구 긁었다.
- 작가의말
충격! 오작 아버지 차태현으로 밝혀져!
이해 안 되는 분은 ‘엽기적인 그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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