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노양궁衡山老陽宮
축융험봉祝融險峰
축융봉이 험난하여
지난이퇴知難而退
어려움을 알고 물러나다
소소의 경공은 치우나 오작보다 훨씬 뛰어났다. 배를 탄 일행보다 먼저 대별산에 도착했던 거로 쉽게 추측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 며칠 동안 전력으로 달리는 치우한테 한 발짝도 지지 않았다.
종일 달리는 바람에 지쳐서 헉헉대는 치우와 달리 온갖 약초나 꽃을 따다 오행마 주변을 서성거리는 것만 봐도 수준 차이가 얼마나 큰지 대충 짐작이 간다.
"근데 너희 어디로 가?"
오행마의 환심을 사려고 며칠 노력했으나 아무 효과도 없었다. 소소도 지쳤는지 손에 든 꽃과 약초를 버리고 나무 아래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걸 이제야 물어?"
겨우 숨을 고른 치우가 기차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왠지 남부로 가는 느낌이어서 그래. 염환국으로 가는 거라면 난 빠질게. 강제명 할머니가 날 다시 보면 다리 분질러버린다고 그랬거든."
"화 별로 안 난 거 같네?"
치우의 질문에 소소는 누운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깝긴 하지만, 나여도 그랬을 거 같아."
시집가는 건 역시 어려운 일이라며 소소는 속으로 한탄했다.
"형, 우리 어디로 가는지 알아?"
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오작이 평소 표정으로 돌아왔다.
"글쎄다. 가다 보면 알겠지."
휴식을 마친 치우는 일어나서 장작을 줍고 과일도 따고 사냥도 했다. 다른 곳이었으면 서리 맞아 나무가 앙상한 시긴데, 남부와 가까워서 그런지 덜 마른 잎과 농익은 과일이 여전히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품에 과일 한가득 안고 손에 토실토실 살찐 사냥감을 든 치우가 돌아왔을 때, 오작은 화첨창을 휘두르며 창술을 수련하고 있었다.
창이 생명을 얻은 듯 먹이 노리는 뱀처럼 살아 꿈틀대는 모습에 법술 말고 무공엔 전혀 흥미 없던 소소마저 입을 헤 벌리고 오작의 창술을 구경했다.
한바탕 창으로 춤을 춘 오작은 갑자기 수련을 멈추고 양 손바닥에 화첨창을 올린 채 눈을 감고 명상했다.
그 상태로 돌이 되는 게 아닌지 걱정할 정도로 꿈쩍도 안 하던 오작이 약 반 시진이 흐른 뒤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비단 오작뿐이 아니라 손바닥 위에 들린 화첨창도 마찬가지로 꿈틀거렸다.
"왜 저러는지 알아?"
소소가 한껏 누른 목소리로 질문했다.
"무공에서 큰 경지를 뚫었을 때 저래. 법술보다 좀 요란하지?"
치우는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승화昇華하는 오작을 바라봤다.
예전부터 대결에서 힘과 체력이 강하고 법력도 많은 치우가 자주 우위를 차지했지만, 경지나 무공에 대한 이해 등을 놓고 보면 치우는 오작에게 한참 못 미쳤다.
그 차이가 또 벌어지는 걸 보니 좀 더 열심히 수련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근데 몸에서 왜 연기가 나는 거지?"
소소는 승화하는 모습을 처음 보는지 궁금한 게 많았다.
"새로운 경지를 깨달았어. 몸이 그 경지에 알맞게 급히 변화하느라 저러는 거야. 법술도 경지가 뛰었을 때 속에서 막 뜨거운 게 뛰어다니고 그러잖아."
"그러니까 열오름 같은 뭐 그런 거지?"
열오름은 법열法悅의 또 다른 표현이다.
"비슷한데 조금 달라. 열오름은 깨달음만으로도 가능하잖아. 그런데 무공은 깨달음과 고된 수련 모두 필요해. 깨달음을 얻어도 고된 수련이 받쳐주지 않으면 경지가 그대로일 수 있어."
그때 오작의 창이 환한 빛을 뿜어냈다. 웬만한 법보보다 귀해도 법보는 아니었던 화첨창이 오작의 깨달음과 더불어 법보로 진화한 것이다.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
귀한 재료를 제물로 바치지도 않고, 기운을 모으는 진법을 펼치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것으로 일반 무기를 법보로 진화시켰다.
소소의 상식으론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몰라."
치우 역시 오작에게 들은 바 없었다.
오작은 북망산의 첫 결계를 통과한 후 적무혈을 만났다. 그 과정에 수를 헤아리기 힘든 해골을 물리쳤고 무수한 무기와 갑옷을 부쉈다.
마지막엔 적무혈의 목뼈를 부숴 이겼고, 결과 적무혈의 주망창蛛芒槍이 부서졌다.
게다가 오작이 무아지경에 들었을 때, 높은 경지의 창법이 화첨창에 새겨졌다. 그때부터 수십 일이 지나 오작이 그간 얻은 깨달음을 끝내 수습해 경지의 승화를 이뤄낼 때, 화첨창도 당연하다는 듯이 법보로 진화했다.
"맙소사."
갑자기 소소가 새된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해."
치우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조화성보잖아."
치우는 미처 소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게 뭐?"
소소는 '세상에 이런 멍청이가'라는 표정으로 치우를 보며 말했다.
"선천영보 다음 등급인 조화성보라고. 너희가 탐내던 홍영창보다 한 등급 높은 법보야."
선천영보는 생겨날 때부터 법보다. 태극구는 천계에서 추방당해 삼계로 떨어질 때 바로 법보가 되었다. 소오와 현작 역시 법보가 되려 했는데, 실수로 새의 알로 들어가면서 요괴가 되었다.
그냥 존재하여 세월에 씻기고 기운을 머금으며 어느 순간 법보가 되는 걸 조화성보라고 한다. 선천영보와 달리 조화성보 중에는 가끔 진짜 쓸모가 없거나 능력이 약한 법보가 존재한다.
그러나 대부분 조화성보는 강한 요괴나 마수가 변한 요마화보보다 낫다. 품은 힘이 더 강한 경우는 드물지만, 쓰임새는 요마화보보다 월등하다.
오작의 승화는 약 일각 지속했다. 오작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멈춤에 따라 화첨창도 빛을 뿜어내는 걸 그만뒀다.
눈을 뜬 오작은 화첨창을 손으로 몇 번 다정하게 쓸어준 후 소매로 집어넣었다.
"형, 어떻게 된 거야?"
"그간 익혔던 창법을 화첨창과 일치시켰어. 그랬더니 승화가 오고 화첨창도 법보가 됐어."
오작이 익힌 창술은 물론, 적무혈과 싸우면서 배우고 깨달은 창법도 화첨창과 무관하다. 오작은 지금까지 자신이 배우고 익히고 깨달은 것들을 화첨창으로 어떻게 펼칠지 고민했고, 그 성과가 오늘 열매를 맺은 것이었다.
"그럼 반려伴侶 법보를 얻은 거야?"
가끔은 주인과 함께 태어나고 주인과 함께 소멸하는 법보가 있다. 비록 화첨창이 오작과 함께 태어난 건 아니지만, 오작의 승화와 함께 법보가 되었기에 반려 법보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맞습니다."
오작의 대답에 소소는 두 손을 모아 주먹을 그러쥐고 눈을 반짝였다.
"저기, 오 대협. 가여운 소녀한테 반려 법보를 얻는 방법 좀 가르쳐 주면 안 될까."
"오 씨 아닙니다. 오작은 아명입니다."
치우는 모닥불을 피운 후 바로 사냥을 나갔다. 승화를 이룬 오작은 벌써 치우가 채집한 과일을 다 먹어 치우고 모닥불에서 익어가는 고기를 침을 흘리며 쏘아보고 있었다.
단순한 식탐이 아니라 허약해진 몸을 회복하는 거여서 오작도 드물게 게걸스러운 모습을 드러냈다.
"네 형은 참 신비한 사람인 거 같아."
배불리 먹은 오작은 바로 모닥불 곁에 드러누워 코를 골았다. 늘 똑 부러지고 반듯한 모습만 보이던 오작이건만, 경지를 크게 올리고 마음에 꼭 드는 법보까지 얻은 덕분에 한껏 풀어졌다.
"언젠간 나랑 천하제일 자리를 다툴 사람이야."
치우는 저녁 내내 열심히 수련하겠다는 결심을 백 번도 더 내렸다. 영예주가 풀리는 순간 어마어마한 고수가 된다던 태극구의 말을 단단히 기억한 치우기에, 진짜 이대로라면 오작에게 형편없이 추월당할 거라는 위기감이 생겼다.
소소는 벌떡 일어나 치우 앞을 몇 번 오갔다.
"치우야. 네 얼굴은 평생 이대로겠지?"
치우는 손으로 자기 얼굴을 쓰다듬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마 그렇겠지. 어른이 돼서 얼굴이 변한다는 얘기는 못 들었으니까."
"그거참 아쉽네."
며칠 동안 대화하며 치우가 생각보다 똑똑하다는 걸 알아챘다. 사실 예전부터 쉽게 알 수 있었던 사실이지만, 늘 트집을 거는 치우가 싫어서 일부러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얼굴만 잘생기면 시집가도 괜찮은데.'
그 후 며칠. 오작은 길을 가다가도 갑자기 창을 꺼내 휘두르고, 식사하다 말고 창을 휘두르고, 가끔은 자다가 벌떡 일어나 창을 휘두르기도 했다.
그에 자극받아 치우 역시 쩍하면 칼을 꺼내 휘두르며 생전 안 하던 고민에 빠졌다. 덕분에 소소는 말동무를 잃어 심심해 죽기 직전이 되었다.
"설마 너희 목표가 태일봉太壹峰이었어?"
태일봉은 다른 이름으로 축융봉으로 불린다. 형산의 몇 개 봉우리 중에서 가장 높으며, 축융이 머무는 노양궁이 산꼭대기에 있다.
"여기 맞아?"
오작은 오행마의 갈기를 다정하게 쓸어주며 질문했다. 오행마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거로 긍정했다.
"설마 너희 축융을 죽이려는 건 아니지?"
소소가 뒷걸음질 치며 질문했다.
치우의 할아버지인 구망은 일곱 번째다. 앞에 구망이 여섯이나 있었다는 뜻이다. 북부의 공공은 세 번째고 서부의 욕수는 두 번째다. 그리고 남부의 축융과 중부의 후토는 첫 번째다.
지금까지 죽은 적 없이 축융과 후토의 자리를 쭉 지켜왔다는 뜻이다.
이는 단순히 둘의 강함을 나타내는 게 아니다. 그저 강하기만 해선 수백 년 세월을 축융과 후토의 자리를 지킬 수 없다. 이들은 강함뿐이 아니라 인망도 매우 높다.
축융을 죽일 수 있는지부터 문제고, 정말 기적처럼 성공했다고 쳐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복수를 외치며 일행을 뒤쫓을지 모른다.
"우리는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 당신까지 연루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어서 떠나십시오."
"아니야. 여자가 의리가 있지. 그리고 꽤 재밌을 거 같아."
소소는 몸을 한껏 움츠리고 조금씩 오작과 치우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이참에 떼려고 했는데 참 안타깝군요."
말을 마친 오작은 말머리를 돌려 오던 길을 되밟았다.
"형, 뭐야?"
치우는 너무 쉽게 물러나는 오작에게 멍한 얼굴로 질문했다.
"내가 천일도를 못 벗어났던 게 기억나지? 축융봉도 마찬가지야."
청룡주를 먹은 오작은 천일도를 구 년 동안 못 벗어났다. 주작란도 먹었기에 축융봉에 오르면 또 얼마나 갇혀 있을지 모른다.
자단이 축융봉에 있다는 확신이 서면 올라도 괜찮다. 그러나 여긴 오행마와 자단이 헤어진 곳일 뿐, 자단이 이곳에 반드시 있는 건 아니다.
"역시. 뭔가 이상하다 싶었어."
만약 소소가 방금 물러났다면 둘을 계속 따라다닐 염치가 없다. 다행히 마지막 순간에 의리를 지켰기에 정정당당하게 둘과 붙어 다닐 수 있게 됐다.
"소소. 부탁 좀 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나 의리 빼면 시체인 여자야."
"요수촌으로 가려고 합니다. 거기에 가서 사람 행방을 하나 찾으려고 하는데, 당신의 황금을 좀 빌려 써도 되겠습니까?"
"누굴 찾는지 알려주면 황금 빌려줄게."
"진짜 이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황룡도인黃龍道人이라고 하는데, 누런 도포에 흰 모자를 쓰고 다닙니다. 등에 검 두 자루를 멨고요."
자단과 오작을 몇 달 따라다니며 오작에게 글도 가르치고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준, 오작이 마음속으로 스승으로 생각하는 그 도인이다.
예전엔 자단과 마찬가지로 허풍쟁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새는 아니다.
황룡도인이라면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지를 다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숙부의 위치를 찾아달라고 부탁도 해보고.'
청룡주가 영위앙에게 있다는 것도 황룡도인이 알려줬다. 그때는 심지어 영위앙이 청제가 아니었다. 황룡도인은 청제가 된 영위앙이 청룡주를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늘 황룡도인을 허풍쟁이라고 타박하는 자단이건만, 그 말은 웬일인지 굳게 믿었다.
'다음에 복용해야 할 오행보가 백호정인지도 물어보고.'
처음에 현무루를 마셨기에 두 번째는 반드시 주작란을 먹어야 했다. 청룡주까지는 제대로 먹은 것 같은데, 네 번째가 꼭 백호정인지 확인할 필요도 있다.
"좋아. 그럼 황금을 빌려주는 대신 이자 좀 받아야겠어. 나한테 무공 가르쳐 줘."
"당신의 체형은 창술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나도 알아. 비수 쓰는 법 좀 알려줘. 상대에게 확실한 타격을 주는 초식 몇 개면 돼."
소소는 장작 줍기도 싫어하는 게으름뱅이다. 고된 수련이 필수인 무공을 제대로 익힐 생각은 없었다.
그저 위급할 때 써먹을 수 있는 초식 몇 개만 익히면 된다는 속셈이었다.
"무공도 법술과 마찬가지로 기본이 중요합니다. 위급할 때 초식을 성공시키는 건 집중력이 아니라 몸에 새긴 기본기죠. 비수를 잡는 법과 휘두르는 법을 알려주겠습니다. 기본기가 어느 정도 되면 그때 초식을 가르치죠."
그때부터 소소는 양손에 비수 하나씩 들고 기본기 수련에 매진했다. 어차피 오작도 종일 멍하니 있다가 창을 휘두르고, 치우도 달리면서 칼을 휘두르는 데 여념 없다. 오행마는 말을 못 할 뿐만 아니라 소소를 거들떠보지도 않기에 소소 역시 수련밖에 할 일이 없었다.
"형, 익숙한 냄새가 나."
요수촌으로 가는 길에 유웅국 근처를 지났다. 치우가 코를 킁킁거리며 이상한 소리를 했다.
오작은 발로 오행마의 배를 툭 차는 거로 속도를 줄였다. 치우와 소소도 칼과 비수를 소매로 넣고 숨을 가다듬었다.
천천히 언덕 위로 오르니 말 네 필이 끄는 마차가 보였다. 분주히 날아다니는 벌레들에 가려져 마부석의 희운이 흐릿하게 보였다.
- 작가의말
어제 문득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예전에 무협에 득세할 수 있었던 건 당시 시대상과 알맞았기 때문입니다. 강한 힘을 갖춘 슈퍼히어로가 나타나서 암울하거나 평이한 일상을 깨주길 바라는 심리가 강했죠.
그러나 자극적인 콘텐츠가 넘쳐나고 현실이 더 소설 같은 요새 무협은 독자한테 색다른 자극을 주지 못합니다.
더구나 익숙지 않은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글에 몰입하기 어렵습니다. 홍콩과 대만 드라마가 몰락하여 요즘 세대는 거의 한국 드라마만 보고 자라잖아요.
무협이든 판타지든 많은 사람한테 읽히려면 현대와 유사한 배경을 갖춰야 합니다. 사람들이 등장인물에 쉽게 공감할 수 있게 현대적 사고방식으로 움직여야 하고요.
옛날 무협처럼 여성의 정조를 강조하고, 주인공이 협을 따지며 이거 안 하고 저거 못 하고. 이런 식이면 몰입하기 어렵습니다.
요즘 인기 좋은 무협들 보면 배경만 무협이고 안에 사람들 언행이 현대인과 비슷합니다. 괜히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려고 여러모로 제약을 받는 것보다 차라리 현대 사회 시스템과 현대인 마인드로 이야기를 푸는 게 훨씬 낫긴 하네요.
현대 사회에 내공이 접목됐을 때 어떻게 변할지 고민해야겠습니다. 무공을 견제할 방법 등을 고민하고, 그에 걸맞은 시대상을 만들어서 소설로 펼쳐야겠습니다. 괜히 헌터물이 잘 읽히는 게 아니죠. 시대 배경이 현실에서 오니 이해도 쉽고 몰입도 쉽죠.
나 혼자 내공을 얻는 현대무협이 아닌, 진실로 무림이 존재하고 일반인과 공존하는 세상을 고민해서 글로 펼쳐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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