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화귀단暝火化鬼丹
결승미천結繩彌天
미천망에 결승법을 합치면
천라지망天羅地網
천라지망이 되느니라
무극보인이 돌아가며 내상을 치료했다. 팔괘자수선의가 아니었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공격이었다. 게다가 법력이 거의 바닥 난 상황에서 받은 공격이기에 내상이 가볍지 않았다.
"지혜과智慧果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군요. 명명 중에 하늘의 뜻이 확고한가 봅니다."
여와의 말에 오작은 이마를 찌푸렸다. 내상으로 갑갑한 가슴 때문에 머리가 평소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지혜과는 처음 들어봅니다."
"저도 잘 모릅니다. 남편이 지혜과가 뭔지 저한테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오작은 조금 더 고민하다가 반도원에서 먹은 복숭아가 생각났다. 살은 얼마 없고 씨만 커다랬던 복숭아 빼고는 지혜과로 의심할 만한 걸 먹은 적 없었다.
'여행하며 우연히 먹었던 과일이 하필 지혜과일 가능성은 없겠지.'
"제 일행은 무사한가요?"
"귀기에 잠식당하긴 했지만, 단전 일부와 광명대는 단단히 지켜내고 있습니다. 물론, 오래가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버텨준 것만 해도 놀라울 정도예요."
"해결책이 있으니 데려온 거겠죠?"
여와가 앳된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포근한 웃음을 지었다.
"데려올 때까지는 해결책이 딱히 없었습니다. 살업을 너무 쌓으면 아예 손쓸 방법이 없으니까 일단 데려온 겁니다."
"이젠 생겼다는 말씀이군요."
"당신이 왔으니깐요. 과정은 틀어졌지만, 결국 조건이 맞춰졌습니다."
오작은 눈을 꺼무럭거리며 말을 아꼈다.
"누군지 모르지만, 얼마 전에 무극을 깨달은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예상보다 수백 년 빠른 행보였죠."
오작은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덕분에 천기가 흐트러졌습니다. 원래 제 남편의 점괘술로는 당신과 그 아이가 함께 여기로 찾아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천기가 틀어지다 못해 새까맣게 변해 아예 보이질 않더군요. 그래서 남편이 직접 나가서 그 아이를 데려온 겁니다."
"무극을 깨달은 것과 천기는 무슨 관계인가요?"
"천기는 확실성입니다. 혼돈의 세상에 질서가 생기며 흐름이 이뤄졌습니다. 인간을 비롯한 미비한 존재의 힘으론 절대 바꿀 수 없지요. 음양과 오행의 기운을 빼고 남은 기운들이 쇠락하면서 거의 절대의 진리처럼 된 게 천기입니다. 그런데 무극이라는 새로운 해석이 나오면서 천기가 조금 흔들렸습니다. 다행히 제대로 깨달은 게 아니어서 방향이 완전히 바뀌진 않았습니다."
오작은 자신이 직접 깨우친 무극도 아직 전부 이해하기 벅찬 상황인데 그것마저 제대로 깨달은 게 아니라고 하자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어설프게 깨달은 것도 수습이 어려운데 진정한 무극은 어떻게 깨우칠지 막막했다. 현재 오작의 무공과 법술은 무극을 근간으로 바뀐 상태여서 자칫하면 평생 경지 상승이 막힐지도 모르는 중대한 사안이다.
"다행히 예전의 점괘술대로 당신과 그 아이가 모두 진용산에 왔습니다. 예상치 못한 손님이 한 분 더 계시지만, 천기를 거스를 정도는 아닙니다."
여와와 설영은 서로 마주 보며 해맑게 웃었다. 짧은 기간에 둘이 꽤 친해진 느낌이었다.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 그 아이가 정신을 차리게 해야죠. 수리건곤으로 숨긴 물건을 훔칠 재주는 저희한테 없습니다."
구망은 다른 사람이 수리건곤 법술로 보관한 물건도 훔쳐낸다. 법술에 대한 이해와 여러 기운을 세밀하게 제어하는 능력뿐 아니라 타고난 감각도 있어야 하기에 천하에 몇 없는 재주다.
"그러고요?"
"화접검을 죽이고 얻은 화보를 삼켜 단전으로 보내야 합니다. 단전에서 명화가 귀기를 제압하여 귀화로 정련精煉한 후 태극구의 기운을 북돋워 균형을 새로 잡으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다신 귀기의 영향을 안 받습니까?"
"아니요. 그저 원래 상태로 돌리는 것뿐입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우리도 모릅니다."
"바로 시작하죠."
오작이 어깨를 들썩이자 여와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먼저 내상을 회복하세요. 장기전이 될 겁니다."
오작은 평평한 바위를 찾아 앉아서 무극보인을 돌렸다. 단순히 법력을 모으는 게 아니어서 무작정 빨리 돌리면 안 된다.
다행히도 예전에 태극보인을 처음 얻었을 때 원래 기운을 버리고 새 기운으로 대체하는 작업을 한 경험이 있어 내상 회복은 빠르고도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러나 오작은 내상이 다 나은 후에도 계속 수련했다. 최근 무극에 관해 더 깊이 깨달은 것과 백호정의 복용이 겹쳐 오작의 법력은 빠르게 늘었다.
"대단한 집중력이군요. 사흘 동안 숨까지 멈추고 조금도 안 움직였습니다."
여와의 감탄에 오작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기껏해야 반 시진 정도 수련한 거로 추측했는데 사흘이나 흘렀다. 게다가 편하게 한 거 같았는데 숨도 안 쉬고 꼼짝도 안 했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자, 이제 그 아이를 만나러 갑시다. 제가 밟은 곳을 따라오세요."
오작과 설영은 여와를 따라 움직였다. 몇 번 방향을 틀고 나니 또 세상이 바뀌었다. 일행은 평평한 원반 위에 서 있었다.
지름이 채 열 장도 안 되는 투명한 원반에서 주위를 살펴보니 온통 별이다. 위로 봐도 별이고 아래로 봐도 별이고 사방을 둘러봐도 별이다.
"보천석補天石으로 친 결계입니다."
말을 마친 여와가 주문을 외웠다. 원반 중심에서 흰자만 남은 눈을 희번덕이는 치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치우야. 형이 왔다."
괴로움 가득하던 치우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여와나 설영의 눈엔 안 보이는, 이십여 년을 함께 지낸 오작만 알 수 있는 미소였다.
"조언을 주시겠습니까?"
구마소를 손에 든 오작이 말했다.
"마음 가는 대로 하세요. 정도를 걸으면 결과가 바르지 않을 리 없습니다."
구마소는 구혼勾魂·이혼離魂·단혼斷魂·진혼鎭魂·소혼銷魂·안혼安魂·시혼弑魂·구혼驅魂·서혼噬魂·전혼纏魂·색혼索魂·견혼牽魂·산혼散魂·출혼出魂·섭혼攝魂·수혼守魂·부혼附魂·추혼追魂·경혼驚魂 등 수많은 곡을 연주할 수 있다.
몇 개의 구멍을 막고 어떤 구멍을 막는지에 따라 다른 곡이 연주된다. 오작은 머릿속으로 모든 곡과 효과를 떠올리며 순서를 세심하게 짰다.
신중하게 정한 오작은 무극보인을 빠르게 돌리며 구마소를 연주했다. 치우의 몸을 차지한 귀기를 홀리고 어르고 달래고 꾸짖었다.
그러다가 틈만 보이면 시혼弑魂 혹은 서혼噬魂으로 겁을 줘 단전에 숨도록 했다.
'면면부절綿綿不絶.'
여러 곡을 섞어서 연주하던 중 거대한 깨달음이 오작을 덮쳤다. 오작은 깨달음을 거부하려다가 여와의 말이 생각났다.
'창술에 대한 깨달음이지만, 구마소 연주에 대한 깨달음이기도 하다. 거부하지 말자.'
여러 곡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다 뒤섞이며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정해진 구멍을 막고 정해진 방식으로 법력을 흘리던 연주가 손가락을 분주하게 놀리며 마음이 가는 대로 법력을 보내는 즉흥 연주로 바뀌었다.
동시에 오작의 무의식 속에서 창술들이 뒤섞였다. 모든 찌르기가 다르지 않음을 깨달은 오작이다. 그러나 지금은 한발 더 나아가 휘두르고 베고 찍고 후리는 모든 공격까지 하나로 섞였다.
섞인다고 찌르기가 베기가 되고 베기가 찍기가 되는 건 아니지만, 같음을 찾고 다름을 인정하는 과정을 통해 한 개 유파로 융합되며 오작의 독자적인 창법을 형성했다.
"형, 그만해. 머리 아파."
무아지경에 빠져 구마소를 연주하던 오작이 몸을 부르르 떨며 깼다. 어느새 눈동자가 정상으로 돌아온 치우가 힘없이 웃으며 오작과 눈을 맞췄다.
"화보를 꺼내."
오작의 말에 치우는 투덜거리며 소매에서 화보를 꺼냈다.
"정 없기는. 그간 잘 지냈냐고 안부 정도는 물었어야지."
"화보를 여기 주세요."
치우는 세상 귀중한 원령급 화보를 순순히 여와한테 넘겼다. 여와는 화보에 누런 진흙을 덕지덕지 바른 후 치우한테 돌려줬다.
"삼키세요. 씹지 말고."
설영이 참지 못하고 킥 웃었다. 흙으로 감싼 불덩이를 주며 씹지 말라고 당부하는 여와가 너무 웃겼다.
"요새도 이런 농이 먹히는군요."
치우도 헤벌쭉 웃으며 진흙으로 감싼 화보를 꿀꺽 삼켰다. 여와는 화보가 단전에 도착하기를 기다려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설영. 빙령도를 잠깐 빌려도 될까요? 당신한테도 좋은 일이에요."
여와의 말에 설영은 순순히 빙령도를 꺼내 건넸다. 여와는 빙령도 두 자루를 치우의 배에 갖다 댔다.
칙 소리와 함께 하얀 김이 생겼다.
"그저 고통을 덜어주는 거예요. 그리고 빙령도도 원령급 화보의 기운을 경험하면 더 강해질 겁니다."
치우는 짐짓 의젓한 척하려 했지만, 단전에서 명화가 귀기를 태워 귀화로 정제하는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빙령도 덕분에 고통이 조금 줄기는 했지만, 웬만한 공격은 신음도 없이 몸으로 감당하던 치우가 이마를 찌푸리고 이를 악물었다.
"아프면 소리도 지르고 그래. 참는다고 덜 아픈 것도 아니고."
오작의 타박에도 치우는 이를 악물며 아픈 소리 한마디 하지 않았다.
"제가 구마소로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요. 그렇게 되면 귀화까지 제압당합니다. 지금 귀화도 잠시 치우 편이 되어 귀기와 싸우고 있거든요."
귀화는 귀鬼인 동시에 화火다. 지금은 귀기에서 귀화로 갓 변했기에 화보를 같은 편으로 인식하며 귀기와 싸우는 중이다.
"귀화가 반기를 들 때 구마소로 도우세요."
"아까 진흙은 왜 바른 겁니까?"
"제가 황니병黃泥兵 법술을 타고난 건 알죠? 안에서 황니병이 화보를 도와 귀기를 제압하고 있어요. 저 아이에게 악영향을 안 끼칠 정도만 들여보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여와는 진흙을 뿌려 병사를 소환한다. 황니병 자체가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병사 수준의 전투력밖에 안 되지만, 타고난 법술답게 법력 소모가 적어 거의 무한정 펼칠 수 있다.
덕분에 세상을 다섯 구역으로 나누고 다섯 제를 뽑아도 이백여 개 왕국 중 반발하는 나라가 하나도 없었다.
시간이 하염없이 흘렀다. 여와와 설영은 따로 식사를 몇 번이나 했다. 오작은 지혜과를 먹었다는 이유로 식사에서 배제됐다.
어차피 치우가 걱정되어 음식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대놓고 자기들끼리 먹으니 서운한 마음이 조금 들었다.
'내가 많이 변했구나.'
예전 같으면 당연한 일로 여겨 염두에서 지웠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많은 일을 겪으며 오작 자신한테도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그때 누군가가 꺽 하며 트림했다. 음식을 배불리 먹은 여와나 설영 말고 치우 입에서 난 소리였다.
"다신 귀기한테 몸 내주는 허튼짓을 하지 마세요."
"알았어. 이쁜 누나."
치우의 대답에 여와가 활짝 웃었다.
"생긴 건 저쪽이 바람둥인데 행실은 이쪽이군요."
여와가 손을 휘젓자 세상이 바뀌었다. 수천 개 돌이 여와의 손짓에 따라 사라지며 일행은 다시 진용산으로 돌아왔다.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천기로 정해진 일입니다. 보답을 바라고 한 건 아니에요. 그래도 고맙게 느꼈다면 어려운 부탁 하나 하겠습니다."
"그저 분부만 하십시오."
여와는 잠깐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결승법을 양도할 수 있나요? 완전 양도를 말하는 겁니다."
예전에 황고류를 송곳에 담아 건넨 건 나눠준 거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오작은 다시 해당 법술을 펼칠 수 있다.
그러나 완전히 양도하면 오작은 결승법 법술을 잃게 되며 아무리 애써도 다시 익혀낼 수 없다.
"원하신다면 당연히 드려야죠."
오작의 대답에 여와는 기쁘게 웃었다.
"그럼 남편을 부를 테니 놀라지 마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커다란 뱀 머리가 나타났다. 경계사가 우스울 정도로 커다란 뱀 머리에 치우와 설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퉤!"
모습을 드러낸 복희는 입에서 커다란 송곳니를 하나 뱉어냈다. 여와는 주문을 외워 송곳니를 한 뼘 크기로 줄였다.
"뱀이 되면 말을 못 해요. 게다가 탈피하느라 예민한 상태여서 행동이 조금 거칠 겁니다. 이해해 주세요."
오작은 송곳니를 팔뚝에 꽂았다. 결승법 법술이 송곳니로 빨려갔다.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었던 허전함이 오작을 덮쳤다.
"퉤!"
복희는 다시 입에서 밧줄 하나 뱉어냈다. 손때가 빤질빤질하게 묻은 시커먼 밧줄에 송곳니를 갖다 대자 환한 빛을 뿜었다.
"결승법은 아버지가 만든 법술로 자질보다는 인연을 따집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제대로 익해 낸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습니다."
"태산노도도 익혔던데요."
"흉내만 낸 거죠. 당신은 풍신도 묶지 않았습니까? 태산노도라면 그러지 못했을 겁니다. 태산노도는 그저 이 법술을 당신한테 넘겨주기 위한 징검다리일 뿐이죠. 진정한 인연은 당신이었습니다."
"풍괴는 못 묶었는데 그건 왜죠?"
"풍괴가 당신보다 약했기 때문입니다. 풍괴가 강했다면 묶었을 겁니다."
결승법은 약자의 법술이다. 자신보다 강한 자는 확실히 묶지만, 자신보다 약한 자 중에서 풍괴처럼 잘 안 잡히는 놈이 있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조건부 절대 법술이구나.'
보잘것없는 듯 여겨지던 결승법이 조건부나마 절대에 속하는 법술이라는 게 너무 놀라웠다.
그때, 미천망과 송곳니의 결합이 끝났다.
- 작가의말
명화는 어두운 불입니다. 명화접의 명瞑은 앞에 목目자로 눈이 어둡다는 뜻입니다. 명화의 명暝은 앞에 일日자가 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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