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룡돌화창盤龍突火槍
무무지경武無至境
무공엔 끝이 없어
궁생난지窮生難止
평생 멈출 수 없다
"도망가라. 결계가 이상하다."
소리 지른 자는 인간이 아닌 요괴였다. 펄럭이는 귀나 흉측한 뻐드렁니를 보면 멧돼지 요괴 같은데 머리가 꽤 비상했다.
"이럴 때 꼭 멍청하게 혼자 도망치려는 놈들이 있지."
공공의 말에 오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일일수록 함께 하는 게 좋다. 그래야 내가 살 가망이 조금이라도 커진다.
멧돼지가 꽤 신망이 높은지 외침을 들은 인간과 요괴 대부분이 도망쳤다. 그러나 재물이나 법보 혹은 법술에 미련을 못 버린 자들이 여전히 창녕궁 근처를 서성거렸다.
무려 공공과 흑제가 모습을 드러냈으니 뭐든 있을 거라는 추측 때문이었다.
그리고 반대로 북망산을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공공께 인사드리오. 인도의 여덟 번째 제자 악불산岳拂山이오."
악불산은 회색 장포에 흰 가죽신을 신었다. 그리고 등에 창 한 자루 멨다. 길이가 팔 척 정도 되는 다소 짧은 창은 법보가 분명했다.
"서창 악불산이라. 당신이 여긴 무슨 일이지?"
"중요한 일이오. 독대했으면 하오."
천하에 창을 다루는 자 중 유명인이 셋 있다. 북엔 자단이 있고 서엔 악불산이 있으며 남엔 적표노가 있다.
반각이 인정한 세 창술을 각각 이어받은 자들이다.
"같이 들어야겠소. 우린 지금 운명공동체거든."
악불산은 오작과 치우를 연신 훑었다. 나이에 비해 대단하긴 하지만, 공공과 공동체 어쩌고 할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태상노군의 여섯째 제자를 뵈어 영광입니다."
오작은 악불산이 뭔가 중요한 정보를 알 것 같다는 생각에 대화에 끼어들었다. 자신을 인도의 여덟 번째 제자라고 소개한 악불산은 오작의 말에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말이지?"
질문은 공공이 했지만, 치우 역시 무척이나 궁금한 눈치였다.
"인도의 첫 제자는 태상노군입니다. 남은 제자들은 다 태상노군을 사부로 모시죠."
"그럼 일곱째 제자가 아니냐?"
"태상노군의 셋째 제자가 본인입니다."
공공은 믿기지 않는다는 티를 팍팍 내며 악불산을 바라봤다.
"두 제자를 가르치다 부족함을 느끼셨다고 합니다. 홍균노조한테도 배울 게 남지 않아서 고심 끝에 본인이 가르치고 본인한테 배우기로 하셨습니다."
태상노군을 언급하는 악불산의 얼굴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
'미친놈인가?'
입 밖에 꺼내진 않았지만, 공공과 치우는 표정으로 말했다.
"즙무혼이 격대전이로 즙선기 몸을 빼앗았고 환혼노조는 남부에서 부활을 꿈꾼다는 정도는 나도 압니다. 그러니 감추지 마시고 시원하게 털어놓으시죠."
"더 아는 게 있으시오?"
"적무혈은 내가 해치웠고 환혼노조는 내 아우가 없앴습니다."
오작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느낀 악불산은 그제야 결심을 내렸다.
"즙무혼은 원래 육신을 흡수하여 힘을 키우고 있소. 그리고 결계를 바꿔 출입을 어렵게 했소. 지금 북망산에서 결계를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즙무혼 빼고 나밖에 없을 거요."
"인도와 북망산은 무슨 관계입니까?"
"북망산은 천계 출신 인간이 사는 곳이고 내 사부는 삼계에서 태어난 완전한 인간이오. 태생부터 물과 불과 같아 절대 어울릴 수 없는 관계요."
매미 유충을 먹이로 삼는 개미나 일개미를 습격해 먹이를 뺏는 매미처럼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사이다.
오작의 노력 덕분에 개미와 매미의 동선이 겹치지 않게 변했지만, 북망산과 인도는 그렇지 않았다.
"혼자 오신 걸 보면 대책이 있는 것이겠지요?"
"격대전이의 약점을 알고 있소."
"뭡니까?"
악불산은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이게 널리 알려지면 미무골이 계속 숨을 거요."
"미무골을 꼭 죽여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공간을 이동하는 법술이 어려운 건 다들 아실 거요. 그 이유가 미무골 때문이오. 그자의 법술로 삼계가 왜곡되었소. 유독 공간계 법술만 발전하지 못해 삼계의 전체적인 법술 수준이 한계에 이르렀소. 미무골을 해치워 공간계 법술이 발전하면 다른 법술도 더 강해질 수 있소."
악불산의 말에 뭔가 깨달은 오작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법술을 골고루 익힐 필요가 있구나.'
법술에 필요한 운기 경로는 대부분 인간이 타고나지 못한 거다. 새로운 경로를 만들 수 있는 자만 법술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운기 경로를 다 뚫어야 비로소 법술을 펼친다.
현재 공간계 법술이 너무 적어 관련 운기 경로가 많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전체적인 법술 수준까지 영향받은 거다.
'창법도 마찬가지겠지?'
오작은 이제 창녕산이 북망산인 걸 안다. 적무혈의 창법과 비등하게 싸운 오작의 창법 역시 자단이 만든 게 아니라 봉래도의 창술이라고 보는 게 맞다.
남은 건 인도의 창법이다. 오작은 즙무혼을 죽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단과 적표노와 함께 창의 고수로 추앙받는 악불산의 창법도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세 분은 무슨 이유로 즙무혼을 쫓는 것이오?"
"나야 흑제 하려면 놈 주검이 필요하니까."
"가문의 원수입니다."
"나도 원수."
셋의 대답에 악불산은 기꺼운 표정을 지었다.
"목표가 일치하군. 힘을 합쳐 꼭 놈을 해치웠으면 하오. 그리고 주의할 점이 있소. 난 이 결계 안에서만 놈을 공격할 수 있소."
"이유가 뭡니까?"
"격대전이의 약점을 알아낸 걸 미무골한테 들키면 안 되니깐. 안에서 놈을 해치우지 못하면 밖에선 세 분이 힘써야 하오."
결계 때문에 시간의 흐름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오작 일행은 누구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번갈아 법력 수련도 하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왔소."
다시 모습을 드러낸 즙무혼의 기세는 대단했다. 그러나 허망하게 펄럭이는 오른쪽 소매 때문에 왠지 하찮아 보였다.
"고맙다."
즙무혼이 치우를 보며 이를 갈았다.
"네가 팔 하나 자른 덕분에 멸천공과 홍도공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다. 그리고 네 칼도 이젠 두렵지 않다."
"말로만 고맙다고 그러지 말고 절이라도 해."
치우가 불퉁하게 대꾸하자 공공이 킥 웃어버렸다. 자신의 약점이 사라졌음을 알려 상대 기세를 누르고 자기 기세를 북돋우려던 즙무혼의 시도는 허무하게 끝났다.
"근데 못 보던 놈이 하나 늘었네?"
"남의 몸에 빌붙어 사는 하찮은 미물이 있다고 해서 인도의 이름으로 죽이러 왔다."
"침암불괴신砧巖不壞身을 너희가 뚫을 수 있을까?"
무공과 법술을 결합한 침암불괴신은 그간 급하게 흡수한 흑수해의 기운에 저항하느라 즙무혼의 육신을 지키지 못했다.
기회만 엿보던 치우가 불쑥 튀어 나갔다. 즙무혼은 전과 달리 왼팔을 들어 치우의 칼을 막았다. 새된 깡 소리와 함께 치우의 마환도가 튕겼다.
즙무혼은 기쁘게 웃으며 허공에서 수정 막대기를 꺼냈다. 모습을 드러낸 수정 막대기는 오른쪽 소매로 들어가더니 팔로 변했다.
손가락이 영활하게 움직이는 걸 보니 가짜 팔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틈을 만든다."
말을 마친 오작이 멸천창을 꺼내 즙무혼의 목을 찔렀다. 즙무혼은 반대편이 투명하게 보이는 오른팔을 들어 멸천창을 막았다.
회선창에 실린 힘이 예상보다 강해 창을 막은 즙무혼의 상체가 살짝 흔들렸다.
오작이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줄 걸 안 치우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마환도를 휘둘렀다. 즙무혼은 왼팔로 마환도를 막으며 충돌하는 힘으로 균형을 되찾으려 했다.
그때 공공이 오작과 치우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홍도공을 펼쳤다. 즙무혼은 오른팔로 오작의 이어지는 공격에 대비해야 하고 왼팔은 치우의 칼을 막아야 했다. 그래서 홍도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봤지?"
홍도공에 정통으로 맞았는데도 즙선기는 멀쩡했다. 옷까지 멀쩡한 걸 보니 공격에 당하고 버티는 게 아니라 잘 막아낸 게 틀림없다.
"어딘가 약점이 있을 겁니다. 골고루 두드립시다."
상대 기세가 가파르게 치솟는 걸 확인한 오작이 약점을 언급했다.
"강한 힘은 더 강한 힘으로 깬다."
공공 역시 자존심이 상했는지 이를 악물며 주먹에 힘을 더했다.
"꼭 내 칼로 네놈 몸을 부수겠다."
치우 역시 투지를 불살랐다.
그러나 전과 다르게 즙무혼은 그저 막기만 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먼저 당한 건 셋 중에서 수비가 제일 부족한 치우였다. 동주철갑 덕분에 치명상은 입지 않았으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물에 잠수하여 일각도 버티는 치우기에 단순히 숨이 막혀서만은 아닐 것이다.
"나한테 맡기시오."
오작과 공공 역시 즙무혼의 반격에 밀려났다. 그 자리를 차지한 건 뒤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악불산이었다.
'쌍두창雙頭槍이구나.'
길이가 다소 짧은 악불산의 창은 양쪽에 날을 세운 쌍두창이었다. 악불산은 창의 중간을 양손 혹은 한 손으로 잡고 돌리며 예상치 못한 시점에 공격을 발동했다.
'공간을 빼앗고 시간을 훔친다.'
즙무혼은 오히려 셋을 상대할 때보다 더 허둥거렸다. 악불산의 창은 공격 범위가 넓어 상대가 쉽게 수비할 수 없고, 회전하는 중에 언제든 공격할 수 있어 상대 반응을 느리게 했다.
'쉽게 예측하지 못하게 하여 상대의 판단을 느리게 한다.'
오작 일행 셋은 빠르게 공격하는 거로 즙무혼을 몰아붙이려 했다. 악불산은 셋과 달리 공격을 자제했다. 창을 왼손 혹은 오른손 혹은 양손으로 돌리며 공격 기회만 노림으로써 즙무혼이 함부로 못 움직이게 묶었다.
'다 아는 건데.'
알기만 하는 이론은 쓸모없음을 다시 깨우쳤다. 나이에 비하면 경험이 넘치는 오작이지만, 상대해야 할 적을 생각하면 또 형편없이 부족해 보였다.
"도울 수 있겠소?"
악불산의 말에 오작은 바로 전투에 뛰어들었다.
"두 분은 필살의 공격을 준비하시오."
주저하는 공공과 치우한테는 허점을 찌르라고 당부했다.
악불산 옆으로 간 오작은 바로 공격하지 않고 창끝으로 동그라미 하나 그렸다. 동그라미를 본 즙무혼의 몸이 멈칫했다.
진룡산을 떠날 때 반각을 고분고분 물러나게 했던 바로 그 동그라미였다.
그러나 생긴 틈을 누구도 찌르지 못했다. 강한 공격을 준비하기엔 너무 짧은 기간이었다.
"공공. 결계 칠 줄 알아?"
치우의 질문에 공공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근데 결계는 왜?"
"저놈이 도망 못 치게 가둘 수 있어?"
공공은 자존심 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어려울걸."
"그럼 내가 도망 못 가게 가둘 수는 있어?"
"넌 가능할 것 같긴 해."
오작은 창끝으로 동그라미를 천천히 그리면서 즙무혼을 노려봤다. 가문의 원수이고 부친과 큰 숙부를 직접 죽였다고 인정한 놈이다. 놈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필살의 기회를 노렸다.
거기에 악불산까지 호시탐탐 노리니 즙무혼은 셋을 상대할 때 보이던 여유가 사라졌다. 둘의 공격이 아주 두렵운 건 아니지만, 그 공격으로 생긴 틈을 다른 자들이 찌를까 봐 걱정이었다.
"어!"
갑자기 치우의 몸에서 괴이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즙무혼의 감각이 연신 위험을 알려왔다.
즙무혼은 팔 하나 잘리면서 멸천공과 홍도공 그리고 치우의 마환도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러나 치우와 오작 그리고 공공을 마주할 때 저도 모르게 위축되는 건 여전하다. 바다에서 시작해 북망산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먼 거리를 셋한테 쫓겼으니 당연한 일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셋을 상대할 때 느끼는 위축감이 커진다. 그래서 결계까지 치면서 셋 모두 죽이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공공이 결계를 치고 치우가 이상한 기운을 뿜자 위기감이 무럭무럭 자랐다.
"넌 죽는다."
오작은 창끝으로 작은 원을 그렸다. 원 안에서 창이 튀어나와 자신을 찌르는 환각에 흡무혼의 몸이 또 한 번 흠칫했다.
그 기회를 타 악불산이 공격했다. 격대전이의 약점이 되는 곳은 아니지만, 꽤 가까운 곳이어서 즙무혼도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몸을 움직여 피했다.
"귀곡멸살!"
공손부보를 죽였던 귀곡멸살이었다. 그때보다 기운을 훨씬 잘 다루고 무기도 그냥 천강도가 아닌 천강마환도다. 게다가 오작과 악불산의 견제로 즙무혼이 제대로 방비하지 못했기에 공격이 확실히 적중했다.
시커먼 기운이 즙무혼의 상체를 감싸고 으르렁댔다. 공손부보를 비롯한 서른이 넘은 요괴는 가볍게 해치운 귀곡멸살의 초식이건만, 즙무혼 상대로는 쉽지 않았다.
"후."
악불산이 숨을 길게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반룡돌화창."
쌍두창이 휘면서 두 창날 모두 즙무혼을 향했다. 악불산이 초식 명을 외치자 창날이 불길을 토해냈다.
두 불길은 즙무혼을 덮치기 전에 만나 불의 용이 되었다. 불의 용은 오작의 회선창 초식처럼 회전하며 즙무혼의 오른쪽 가슴을 공격했다.
"크크크."
당하기만 하던 즙무혼이 갑자기 괴이한 웃음을 흘렸다.
"드디어 미친 건가?"
귀곡멸살로 기운을 다 쓴 치우가 헐떡이며 말했다.
"다들 조심하시오."
반룡돌화창으로 기운 태반을 소모한 악불산은 뒤로 물러났다. 대신 법력 소모가 상대적으로 적은 오작과 공공이 즙무혼 앞을 막았다.
"인도 참 대단하구나. 내 격대전이의 약점까지 알아냈어."
귀곡멸살의 기운이 사라지며 즙무혼의 모습이 드러났다. 옷이 바스러지며 건장한 상체가 그대로 드러났고, 악불산이 공격한 오른쪽 가슴엔 호심경 하나 있었다.
- 작가의말
태상노군은 변태입니다. 스승으로 모실 만한 사람이 없으니 자신한테 배우고 자신을 가르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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