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풍노위파强風蘆葦擺
풍운난측風雲難測
바람과 구름은 쉽게 예측할 수 없고
인심경심人心更甚
사람의 마음은 더 심하다
공공의 부하 중 하나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법보를 강제명한테 건넸다. 흑수해에서 꺼내 사용하면 법보가 망가진다.
전투할 때 거리를 정확히 알려주는 보조계補助系 법보로, 덕분에 자신보다 강한 자들을 수두룩하게 이겼다.
'이젠 나도 끝이구나.'
법보가 없어 거리 감각이 흐려지면 지금처럼 승승장구할 수 없다. 그러나 부하는 공공에 대한 충성심으로 자신이 아끼는 법보를 선뜻 내놨다.
"얼음에 대고 사용하면 된다. 측정을 끝내면 밧줄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라."
치우와 강제명 그리고 공공의 부하 둘이 다시 얼음배를 타고 흑수해에 들어갔다. 만반의 준비를 끝낸 강제명은 흑수해에 풍덩 빠졌다.
'뭐지? 분위기가 이상해.'
밑으로 가라앉을수록 달라진 분위기가 확연하게 느껴졌다. 적막하기만 하던 흑수해에서 분주함 혹은 소란 같은 게 느껴졌다.
'삼매진화.'
강제명은 바닥에 닿기도 전에 삼매진화를 불렀다. 불빛으로 밝혀진 흑수해는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내가 예민한 건가?'
바닥에 닿기까지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강제명은 최근 경지가 빠르게 오르고 법력도 강해지면서 자기 감각이 흐트러진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빛으로 흑제를 가둔 얼음을 찾은 강제명은 일러준 대로 법보를 얼음에 갖다 댔다. 법보는 얼음 두께가 얼만지 감각을 통해 강제명한테 알려줬다.
'칠 촌이야. 내 감각이 맞았어.'
법보가 효력을 잃을 때까지 여기저기 계속 대 봤지만, 모든 곳의 두께가 칠 촌이라고 알려왔다.
[자네 누군가?]
밧줄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려던 강제명은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생각하면 내가 읽을 수 있다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을 생각하게.]
'당신은 누굽니까?'
[얼음에 갇힌 사람일세.]
같은 시각. 공공의 부하들과 함께 나뭇잎을 타고 얼음배를 바라보던 오작은 갑자기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다.
[같은 창녕산 출신으로서 부탁이 하나 있네.]
[창녕산이오? 저는 강척 출신입니다.]
[자네는 성이 어떻게 되는가? 난 창녕산 출신 즙씨汁氏일세.]
[저는 강 씨입니다.]
소리가 끊겼다. 이유는 모르지만, 강제명과 즙선기의 대화가 분명했다. 오작은 조바심이 이는 걸 억지로 참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한참 시간이 지나 다시 대화가 들렸다.
[자네 어머니의 성이 어떻게 되는가? 적 씨는 아니겠지?]
[미 씨입니다.]
[다행이군. 같은 편이어서.]
'창녕산. 남화교 교주 미천. 적무혈. 즙선기.'
뭔가가 오작의 머리를 간질였다.
[공공이 날 죽이려고 하네. 자네가 날 도와 공공을 죽인다면 원하는 바를 다 이룰 수 있도록 돕지.]
[뭐든지 다요?]
[그럼. 적제는 지금도 적표노인가? 그놈을 죽이고 적제 자리를 자네한테 줄 수도 있네.]
대화가 또 끊겼다. 오작이 귀를 쫑긋거리며 집중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신호를 받은 치우 등이 강제명을 흑수해에서 건져 올렸다. 강제명을 태운 얼음배는 노를 저어 흑수해 밖으로 나왔다.
"법보가 금방 사라져서 전부 재 보진 못했소."
강제명의 말에 법보를 내놓았던 자는 하늘이 무너진 표정을 지었다. 큰마음 먹고 가장 아끼는 법보를 내놨는데 아무 성과가 없었다.
"누군가가 나랑 함께 내려가는 건 어떻소? 내 판단을 못 믿겠다면 믿을만한 사람이 함께 가서 확인하면 될 거 아니오."
공공의 부하들은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결과가 좋으면 몰라도 만약 잘못 판단하여 일에 차질을 빚기라도 하면 공공의 분노를 감당해야 한다.
일을 웬만큼 엉망으로 해도 욕 몇 마디 하고 마는 공공이지만, 흑제와 관련된 일이라면 그저 욕으로 그칠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왕이 직접 내려가야 한다는 뜻인데."
"대왕한테 물어볼까?"
"공공은 내가 바로 부를 수 있소."
호언장담한 강제명이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주문 내용으로 봐선 소환술 계열의 법술이 분명했다. 위험한 법술이 아니라는 판단에 모두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건 뭐지?"
주문을 마친 강제명의 손에 커다란 조개껍데기가 들렸다. 전체적으로 붉은 가운데 검은 줄이 간간이 있었다.
"화룡패요."
잠시 시간이 흐르고 갑자기 바다가 갈라지며 푸른 고래가 나타났다. 고래 등에는 익숙한 체형의 사내가 타고 있었다.
"뭔 일이지?"
푸른 고래를 타고 나타난 자는 다름 아닌 공공이었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상황을 살피는 공공의 몰골은 꼴불견 세 글자로 함축할 수 있었다. 법보가 분명한 옷이 시커멓게 그을렸고 구레나룻도 반쯤 타 사라졌다.
강제명이 화룡패를 강제 소환하자 큰 문제가 생긴 줄 알고 축융의 공격을 몸으로 버티며 돌아온 탓이었다.
공공을 태우고 공간이동을 연속으로 하느라 지친 푸른 고래는 잠수하여 떠났다.
"강제명이 작업을 끝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날 이런 식으로 부른 거야?"
"누군가가 강제명과 함께 내려가서 작업이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누굴 보낼지 결정이 어려워서 고민하던 중이었습니다."
공공은 부하들을 쭉 둘러봤다. 시키는 대로 잘할 놈들이지만, 믿고 맡기기엔 조금씩 부족했다. 그러다 눈길이 오작한테 멈췄다.
"너는 설마 자단이 안고 다니던 그 꼬맹이? 여긴 왜 왔지?"
오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설마 흑제 찾으러?"
오작은 혼란스럽게 날뛰는 마음을 애써 안정시켰다.
"아닙니다. 의뢰받고 강제명 찾으러 왔습니다."
공공은 오작과 치우를 가늠했다. 치우는 느껴지는 강함 이상의 두려움을 자아내는 뭔가가 있었고, 오작은 기운을 너무 잘 갈무리하여 실력을 확실히 재기 힘들었다.
둘 다 자신보다 약하다는 확신은 있지만, 왠지 싸우기 꺼려지는 상대였다.
"진짜지? 자단처럼 멍청하게 흑제 안 도울 거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너희 가문을 멸문한 게 흑제잖아. 그런데 자단이 날 기습해서 흑제를 살렸단 말이지. 너도 똑같이 멍청한 짓을 벌일까 봐 걱정돼서 그래."
오작은 온몸의 핏줄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그래. 북부에 공공 말고 흑제도 있었지. 종적을 감춘 지 너무 오래되어 염두에 두지 못했구나.'
"세상엔 내가 흑제를 칠 때 너희 가문도 함께 사라졌다고 알려졌어. 그건 사실이 아니야. 정확한 순서는 흑제가 너희 가문을 공격하느라 약해진 틈을 타서 내가 흑제를 친 거야. 흑제가 먼저 너희 가문을 없애고 그다음에 내가 흑제를 친 거지. 어찌 보면 난 너희 가문이랑 같은 편이라고 할 수 있어."
"흑제가 왜 그랬습니까?"
"몰라. 너희 가문이 흑제의 가장 든든한 지지기반이었는데 말이지. 흑제가 너희 가문을 치는 바람에 지지자 중 태반이 등 돌렸다. 게다가 흑제를 계속 따르던 자들도 너희 가문과 싸우다 대부분 죽었고."
"이유를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단이 아는 줄 알았는데, 심각한 상처를 입고 도망가는 흑제를 도운 걸 보면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공공이 굳이 오작한테 공을 들이는 이유는 방해받지 않기 위함이다. 어떻게든 흑제의 주검을 확보해야 하는데 해결책은 강제명이 유일하다. 흑수해에 들어가는 건 법보만 있으면 누구나 가능하나 오직 강제명만 삼매화로 흑제를 찾아낼 수 있다.
오작과 치우가 강제명을 죽이거나 하면 공공은 말 그대로 닭 쫓다가 지붕만 쳐다봐야 한다. 그게 아니어도 둘이 얼음배를 타고 방해하면 흑제를 끄집어내는 일은 요원하다.
"흑제는 알겠군요. 죽지만 않았다면."
"그렇지. 굳이 도움도 바라지 않는다. 거기 가만히 있어. 만약 흑제가 죽지 않았다면 진실을 들을 기회 정도는 주지."
"그러죠."
"믿는다. 네 아버지 반만 닮아도 거짓말로 날 속이진 않겠지."
오작 쪽을 해결한 공공은 강제명을 바라봤다.
"칠 촌만 남겼다고 확신해?"
"그렇습니다."
강제명은 감히 공공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법술인지 타고난 감인지 모르지만, 공공은 강제명이나 부하들의 거짓말을 쉽게 찾아냈다.
"굳이 확인할 필요가 뭐 있겠느냐. 내려가서 얼음에 밧줄을 묶어라. 얼음을 묶은 밧줄은 우리가 끌어올릴 것이고, 널 묶은 밧줄은 저 둘이 끌어 올릴 것이다. 불만 없지?"
강제명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공이 모습을 드러낸 후 작업을 급물살을 탔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일행은 나뭇잎과 얼음배를 몰아 흑수해 중심으로 갔다.
강제명은 밧줄 하나 더 들고 흑수해로 뛰어들었다. 강제명이 바닥에 닿고도 시간이 한참 지나 밧줄이 흔들렸다. 흑제를 가둔 얼음을 묶었으니 당기라는 신호였다.
공공의 부하들이 먼저 밧줄을 당겼다. 치우와 오작은 공공 쪽에서 먼저 움직이는 걸 확인한 후에야 강제명을 묶은 밧줄을 당겼다.
"흑제가 안 죽으면 어떡합니까?"
"머리를 자른 다음 몸통을 흑수해에 던지면 돼."
흑제가 살아있을 걸 대비해야 하는 공공과 힘이 약해 방해만 되는 머리 좋은 놈은 오작과 치우를 감시하며 대화했다.
온전한 주검이 있으면 더 좋지만, 흑제의 강함을 떠올리면 안전하게 머리만 취해도 된다.
"그런데 저쪽이 질문할 시간을 줘야지 않겠습니까?"
"흑제 정도면 머리만 남아도 대화하는 데 지장이 없어. 오히려 반드시 죽는 상황이라서 솔직하게 대답할 거야."
그게 아니어도 치우가 귀박술로 흑제의 삼혼을 잡아 심문할 수 있다. 그래서 공공과 머리 좋은 놈의 대화를 듣고도 치우와 오작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왕. 이상합니다."
밧줄을 당기던 수하 중 하나가 악문 잇새로 힘겹게 말했다.
"뭐가?"
"점점 가볍게 느껴집니다."
공공의 눈알이 다급하게 굴러다녔다.
"강제명이 얼음을 녹이는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대답한 사람은 얼음배에 탄 오작이었다. 아까 들은 대화로 판단하면 강제명과 즙선기는 같은 편이 되었다. 이대로 올려지면 흑제는 머리가 잘려 죽을 게 뻔하니 미리 얼음을 녹이는 게 틀림없다.
"더 빨리하자."
공공은 상황이 급하다는 판단에 밧줄 당기는 행렬에 동참했다. 그러나 채 반도 끌어올리기 전에 무게감이 크게 사라졌다.
"밧줄만 남은 게 분명합니다."
"그쪽은 어때?"
공공은 밧줄을 놓고 뒤로 물러서며 오작한테 질문했다.
"여기도 밧줄만 남은 것 같습니다."
흑수해에서 얼음이 녹을 리는 없으니 분명히 강제명의 짓이다. 그러나 강제명은 얼음을 녹일 이유가 없다.
'흑제가 살아있는 게 분명해.'
흑제가 강제명을 설득 혹은 회유했다는 추측밖에 안 남았다.
빈 것으로 추측하는 밧줄을 빠르게 걷는 와중에 차갑고 고요하던 흑수해에 갑자기 소용돌이가 생겨 느리게 돌아갔다.
"대왕."
수하들은 공공을 바라보며 애타게 부르짖었다.
"밧줄 버리고 물러난다."
공공은 미적거리지 않았다.
수하들은 기쁜 얼굴로 밧줄을 던지고 노를 저었다. 밧줄을 당기느라 지친 근육들이 아우성치는데도 누구 하나 긴장을 늦추지 않고 이 악물고 노를 저었다.
"형, 뭔가 사고가 난 거 같지?"
"우리도 물러난다."
오작과 치우도 밧줄을 버리고 노를 열심히 저었다. 평범한 바다에선 법력을 주입하는 거로 움직이는 얼음배지만, 흑수해에선 노를 저어야 했다.
"흑수해가 줄어들고 있어."
흑수해의 면적이 소용돌이를 중심으로 빠르게 줄었다. 게다가 흡력도 없어 얼음배는 쉽게 흑수해의 영역을 벗어났다.
"위험한 거 같아?"
"아니. 별 느낌 없어."
그사이 공공 일행도 흑수해를 벗어났다. 흑수해에서 황갈색으로 말라가던 나뭇잎이 빠르게 생기를 되찾았다.
소용돌이가 점점 심해졌으나 흑수해에만 국한되고 주변의 바다엔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흑수해가 이대로 사라지는 거 아닐까?"
소용돌이를 중심으로 빨려가는 검은 바다를 보며 치우가 중얼거렸다.
오작도 비슷한 생각을 했고, 공공의 무리도 같은 결론을 떠올렸다.
"최소 수천 년 존재한 흑수해가 그냥 사라지진 않을 겁니다. 흑제의 짓이 분명합니다."
머리 좋은 놈의 말에 공공은 이마를 찌푸렸다.
"설마 다 회복한 건 아니겠지?"
세상엔 오제 중 법술이 가장 강한 자는 영위앙이고 무공이 가장 강한 자는 적표노라고 알려졌다. 실상은 백제가 청제보다 법술이 더 강하다.
그리고 흑제는 백제보다 훨씬 강하다. 축융과 비등하게 싸우는 공공도 멀쩡한 흑제가 두렵다.
모두가 걱정하는 가운데 시간만 무심하게 흘렀다. 어느새 흑수해도 소용돌이도 사라졌다.
"푸하!"
고요한 바다에 작은 물결을 만들며 모습을 드러낸 자는 강제명이었다.
"흑제는?"
공공은 평소와 달리 아주 진지한 얼굴로 강제명에게 질문했다.
"모릅니다."
강제명은 추위 때문인지 겁에 질렸는지 턱을 덜덜 떨며 대답했다.
공공은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늘 결정적인 순간에 실패하는구나.'
강한 힘을 보유했기에 웬만한 일은 술술 풀린다. 그러나 중요한 일은 늘 마지막 순간에 실패했다.
최근에만 해도 춘우산에 가뒀던 축융을 놓친 일이 있었고, 멀게 보면 흑제를 죽이려다 자단의 방해로 실패한 일도 있었다.
'내가 흑제가 될 명이 아닌 건가?'
이쯤이면 그냥 하늘이 공공을 싫어한다고 여겨도 무방하다.
- 작가의말
강풍 - 세찬 바람
노위 - 갈대
파 - 흔들리다
강제명은 강풍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오락가락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