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족과보巨人族誇父
거인과보巨人誇父
과보는 거인이며
후토지자後土之子
후토의 아들이다
정보가 빠르고 정확하다는 곳 몇 군데 찾아 오행마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하나같이 오행마가 금계산에 도착한 이후 떠난 적이 없다고 했다.
금계산에 가서 백이 넘은 무리가 조공명의 지휘를 받으며 산을 샅샅이 뒤지는 걸 확인한 오작은 일단 북부로 가서 축융부터 찾기로 했다.
"근데 강제명 찾아도 문제 아니야? 조공명이 계속 있으면 문을 못 열잖아."
"강제명이 없으면 조공명이 없어도 문 못 열어."
"좀 다정하게 말하면 안 돼?"
"다정하게 말하면 똑같이 멍청한 소리 다시 안 하나?"
치우는 입술을 가득 내밀고 화난 표정을 지었다.
"넌 이미 애가 아니잖아.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응석 그만 부려."
치우는 어떻게든 남부에 남아서 형천과 소소를 먼저 찾으려고 했다. 어차피 강제명이 없으면 금계동이 안 열린다. 자단은 안전한 셈이니 위험할지도 모르는 소소와 형천을 먼저 찾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소소는 서왕모의 딸이고 형천은 이번 일과 아무 상관도 없어. 그러니까 둘이 숙부보다 더 안전할 거야. 네 직감도 빨리 강제명 찾으라고 하지 않았어?"
치우는 할 말이 궁했다. 소소를 찾으려는 마음이 굴뚝 같은데, 치우의 직감은 어서 강제명을 찾으라고 했다.
"그냥 좀 툴툴댔다고 마구 타박하네?"
"속에 담은 게 없으면 입으로 왜 나와. 그리고 강제명을 찾는 게 소소 찾는 것과 반드시 관련이 있어. 어쩌면 강제명이 북부로 간 게 소소의 흔적을 따라서 간 걸지도 모르잖아."
치우는 눈을 번뜩이며 오작을 바라봤다.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빛을 받은 오작은 뒷덜미가 서늘했다.
'경지도 무력도 나보다 훨씬 높구나. 부러운 놈.'
귀화 덕분에 경지를 쉽게 올린 치우다. 다른 사람이라면 갑자기 높아진 경지로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겪었을 게 불 보듯 뻔하다. 그런데 치우는 타고난 성격과 타고난 재능으로 아주 쉽게 극복했다.
태극보인을 뽑아 천강도와 합치며 경지보다 힘이 약해진 것도 호재로 작용했다. 비록 경지에 어울리진 않지만, 치우의 깨달음에 비교하면 적절한 힘이다.
복희의 조언대로 목진액을 급히 쓰지 않은 덕분에 반 이상이 구망을 비롯한 사람들한테 간 것도 우연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치우가 반 모금 정도만 더 먹었다면 깨달음 부족으로 꽤 고생했을 것이다.
"형 말에 일리가 있어."
치우는 강제명과 만난 소소가 변심할까 봐 걱정되어 남부에 대한 미련을 탈탈 털어버렸다.
"그럼 그 지하 시장인지 하는 곳으로 가는 거야?"
오작은 혹시 불의의 사고로 치우와 흩어질 것을 대비하여 자기 계획을 몇 번이나 들려줬다. 그러나 마음이 콩밭에 가 있던 치우는 오작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버렸다.
"응. 거기에 아는 환수도 있고 해서 도움받을 수 있을 거야."
인면홍지주의 영지에서 눈이 세 개인 원숭이를 구한 적 있다.
"어서 가자."
겨우 설득하여 칭얼거림이 멎은 건 좋았으나, 치우가 강제명을 찾는 데 너무 적극적으로 나서는 바람에 오작은 더 피곤해졌다.
밤에도 잠 제대로 못 잔 오작과 치우는 형천한테서 들은 곳에 도착했다. 상이 열두 개인 꽤 커다란 객잔이었다.
대부분 객잔은 그저 긴 걸상을 놓고 손으로 접시를 들고 식사해야 하는 걸 생각하면 꽤 고급 객잔으로 치부할 수 있다.
"손님, 뭘 드시겠습니까?"
"하늘에도 없고 바다에도 없는 거 있나?"
오작의 말에 점소이는 양손을 싹싹 비볐다. 시동어도 없이 작은 결계가 셋을 감쌌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구 소개받았지?"
형천은 지하 시장을 딱 두 번 출입했다. 그래서 추천인 자격이 없다.
"염환원이랑 아는 사이야. 인면홍지주라고 말하면 돼."
점소이가 손가락을 이상하게 구부려 입에 넣고 후 부니 특이한 휘파람 소리가 생겼다. 오작이 소리를 분석하려 했으나 휘파람이 너무 빨리 끝났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염환원이 나타났다.
"오, 함께 거미 요괴 때려잡은 동지 아닌가. 생각해보니 그때 통성명도 안 했군."
"오작이라고 합니다. 여긴 치우입니다."
"그래. 내가 뭐 도울 게 있나?"
"적혈인친의 법술을 펼칠 수 있는 법보가 필요합니다. 일회성이라도 괜찮습니다."
"가서 얘기하지."
염환원이 신원을 보증한 덕분에 오작과 치우는 뇌령비를 통해 지하 시장으로 들어갔다. 땅 밑이라서 횃불이 가득할 거로 생각했던 게 무색하게, 지하 시장엔 하늘이 있었다.
"늘 밤이야. 여기 영주가 태양을 싫어한다더군. 올빼미 요괴라는 말도 있고."
별밖에 없는 하늘이지만, 지하 시장은 꽤 밝았다. 염환원은 두루미 요괴를 찾아 한참 흥정한 후 적혈인친 법술을 펼치는 일회용 법보 다섯 개를 얻어 오작에게 건넸다.
"보답이야. 목숨이야 잃을 걱정이 없었지만, 영지에서 얻은 법력은 꽤 짭짤했거든."
오작이야 특별한 은신술 덕으로 정말 쉽게 해치웠지만, 염환원이었다면 멀쩡하게 도망칠 순 있어도 인면홍지주를 해치우는 건 어려운 일이다.
목숨 구원받은 거야 딱히 고맙지 않지만, 무리를 짓는 요괴의 영지를 부순 덕분에 법력이 꽤 는 점은 오작의 공이 확실하다.
"고맙습니다. 필요할 때 서로 돕고 살면 좋죠."
오작과 치우는 일회용 법보를 두 개와 세 개로 나눠 보관했다. 만일을 대비하여 재물도 둘이 반씩 나눴고 미천의 피도 반씩 나눴다.
"뭐 더 필요한 거 없어? 너무 귀한 거 아니면 내가 사줄게."
염환원의 말에 오작은 고개를 저었다. 좀 더 구경하고 싶기도 하지만, 얼른 축융을 만나 강제명의 행방을 알아내는 게 우선이다. 거리가 너무 멀면 적혈인친 법술이 실패할 가능성이 크기에 강제명이 있음 직한 곳부터 찾아야 한다.
그때, 비슷한 옷을 차려입은 자들이 한쪽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쯧. 또 손님이 난동을 부리는 모양이군."
마침 출구와 같은 방향이었다. 재밌는 구경 생겼다며 좋아하는 염환원까지 셋 모두 경비원들 뒤를 따랐다.
"먹어 보고 진짜면 돈 준다고."
"먹고 배 째라 그러면? 우린 뭐 땅 파서 장사하나?"
"야, 너희 땅 파서 장사하잖아. 이거 땅에서 나온 거 아니야?"
키가 약 석 장(5m) 정도 되어 보이는 청년이 장사치와 실랑이했다.
"나 저번에 여기서 가짜 물건 산 적 있어. 그러니까 먼저 먹어 보고 돈 치를 거야."
"그거 돌려받았다며? 영주가 귀찮아서 자기 돈 줬다던데."
"돈은 돌려받았지만, 마음의 상처는 지금도 아파."
"또 저놈이군."
"아는 사람이야?"
치우의 질문에 염환원은 머리와 꼬리를 함께 끄덕였다.
"과보라고 유명한 놈이야. 후토의 아들이기도 하고."
후토라면 구망이나 욕수와 마찬가지로 오방신 중의 하나다. 중앙신이자 토신으로 중부 백성들의 추앙을 받는 존재다.
"후토 아들이면 돈이 안 아까울 텐데?"
"모르는 소리. 후토는 후토가 된 다음 자기 부족과 연결을 끊었어. 그리고 저 덩치를 봐. 얼마나 먹어야 저 배를 채우겠어. 그러니까 가난할 수밖에 없다고."
치우는 자기 배를 어루만지며 격하게 공감했다.
"그런데 저 경비원들은 왜 가만히 있습니까?"
"못 이기니까. 거인족이어서 힘이 장사거든."
상대가 힘이 세다는 말에 치우가 나섰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어서 오작은 말릴 생각도 못 했다.
"야. 나랑 팔씨름하자. 네가 이기면 내가 그거 사줄게."
치우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과보가 코웃음 쳤다.
"야, 너 끼니 거르냐?"
"잔소리 말고 팔씨름하자. 지면 너 내 동생 해."
치우의 자신만만한 표정에 자극받은 과보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지고 딴소리하기 없기."
치우가 나서자 경비원들이 안도의 숨을 쉬었다. 과보가 이기면 치우가 돈을 내니 소란이 끝날 것이고, 과보가 지면 기분이 좋다. 결과가 어찌 되든 경비원들한텐 나쁘지 않다.
사람들이 알아서 자리를 내자 과보와 치우는 거의 동시에 엎드렸다. 바닥에 엎드린 둘은 상대 손을 잡았다.
과보는 치우보다 키가 한 배 반이나 더 클 뿐만 아니라 팔 길이도 손 크기도 월등했다.
누가 봐도 치우한테 불리한 내기였다.
"시작!"
어느 오지랖 넓은 놈이 제멋대로 시작 구호를 외쳤다. 치우와 과보의 손에 푸른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내기는 안 벌이네요."
오작의 말에 염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 장사치니까. 도박 같은 건 손도 안 대."
시간이 흘러도 둘의 팔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과보는 거인족으로 타고난 힘이 있고 치우는 역법전이 덕분에 법력을 전부 힘으로 바꿀 수 있다.
"누가 이길 거 같아?"
"제 동생이 이깁니다. 힘은 비슷한데 지구력은 제 동생이 훨씬 낫죠."
이마에 맺혔던 짭짤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용케 눈을 피했는데 결국 입으로 들어갔다. 텁텁한 짠맛에 뱉어버리고 싶지만, 그러다 질 것 같아 참았다.
'저 자식도 죽을 맛일 거야.'
자신과 마찬가지로 땀을 비 오듯 흘리는 치우를 보며 과보는 생각했다.
과보의 추측과 달리 치우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황소 오십 마리와 줄다리기를 하면서 지구력을 키운 덕분에 별로 힘들지 않았고, 괜찮은 상대와 전력을 다해 겨루며 역법전이 법술이 성장하고 있어서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야, 우리 그만 비길까?"
과보가 힘겹게 입을 열자 구경꾼들이 비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조금만 더. 그럼 이겨도 저걸 사줄게."
치우가 아이 달래듯 말하자 구경꾼들의 비웃음이 더 커졌다. 그러나 과보는 치우가 자신이 원하던 토룡주土龍珠를 사준다고 하자 이를 악물고 버텼다.
"됐다."
조금 시간이 더 흐르고 치우가 손을 놔버렸다. 과보는 감각이 사라진 손을 연신 흔들며 치우를 바라봤다.
"그거 얼마야?"
가격을 물은 치우는 허공에서 재물을 꺼내 값을 치렀다. 멀쩡한 손으로 토룡주를 받은 과보는 고맙다고 인사하곤 바로 삼켰다.
볼일을 모두 마친 셋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나온 곳은 입구와 달랐다.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입구와 출구가 계속 바뀌는 듯했다.
"졌으니까 형으로 부를게."
"그거 장난이야. 나 이제 열다섯인데."
"승부에 장난이 어딨어. 난 과보. 오백 살이 조금 안 됐어."
"지금 이거 진신 아니죠?"
오작의 질문에 과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키가 삼십 장이 넘어. 그 몸을 유지하려면 얼마나 먹어야겠어. 그래서 토룡주를 먹으며 작은 몸으로 사는 거야."
거인족은 많이 먹는다. 아무리 풍요로운 곳도 거인족이 살면 몇 년 못 버티고 황무지가 된다.
다행히 토룡주를 비롯해 거인족의 몸을 줄여줄 수 있는 영약들이 있다. 덕분에 거인족들은 정착할 수 있었다.
"혹시 황룡신의 행방을 아는 거 있습니까?"
"먹어도 소용없어. 우리 아버지가 후토거든. 너무 세서 후토 자리 못 뺏을 거야."
"다른 용도가 있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찾아볼게. 근데 찾으면 어떻게 얘기하지?"
"구려국에 얘기하면 돼. 구려국 왕이 내 할아버지고 구망이 외할아버지거든."
"역시. 형이 그래서 강했구나."
그때 오작과 치우의 냄새를 맡은 둔각이 멀리서 달려왔다. 과보는 둔각을 타고 싶은 눈치가 역력했지만, 염치가 있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내가 밥 살게."
거하게 한 끼 산 과보는 북부 경계까지 둘을 배웅했다.
"아쉽구나. 내가 부족장이라서 자리를 오래 못 비우거든. 부족 위치를 아니까 심심할 때 편익조 띄우고 그래."
과보는 치우와 오작과 떨어지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치우와는 말이 통해서 좋았고 오작은 아는 게 많아 좋았다. 특히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법을 많이 알아서 동행하는 내내 즐거웠다.
"중요한 일 끝내면 꼭 찾아갈게."
치우가 해맑게 인사했다.
"시간 나면 꼭 들를게."
과보의 친화력이 웬만하지 않아서 오작도 이젠 편하게 대했다.
셋은 헤어지면서도 자주 고개를 돌렸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아쉬운 작별을 한 오작과 치우는 축융이 갇혔다는 춘우산을 향해 말을 달렸다.
"형. 그런데 설영은 어떡해?"
"편익조를 보냈어. 중요한 일 때문에 당분간 바쁘니 안전하게 빙령도로 돌아가 있으라고."
"같이 다니면 좋잖아."
"계속 빙령도에만 살다가 갑자기 큰 세상을 보고 정신이 흔들렸잖아. 우리랑 함께 다니면 심마가 더 깊어질 뿐이야.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 정신 안정을 취하는 게 최선이다."
치우는 더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오작은 늘 많은 부분을 깊이 고민하여 결정한다. 언뜻 보기엔 부족한 결정 같더라도 여러 입장을 동시에 고려해보면 또 기막힌 해결책이다.
"근데 형. 축융을 방해하는 사람이라면 그 근처에 있을 거잖아. 그렇게 되면 우리가 축융과 접근하는 걸 알아채지 않을까?"
"그럼 어떻게 할까?"
"일단 법술 한 번 써보는 거지. 축융을 안 만나고 강제명을 찾을 수 있다면 훨씬 좋은 거 아니야?"
"좋은 생각이야."
오작의 칭찬에 치우는 헤벌쭉 웃으며 법보와 미천의 피를 담은 병을 꺼냈다.
"하지만, 웬만하면 북부 중심에 가서 쓰는 게 좋지 않겠어?"
치우는 무안한 얼굴로 법보와 병을 넣으며 조급한 마음을 차분하게 달랬다.
- 작가의말
과보 : 내가 두 달 굶지만 않았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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