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체자폭기閤體自爆技
곤륜왕모昆崙王母
곤륜에 사는 서왕모는
서계최강西界最强
서쪽에선 최강이다
몸매는 풍만하고 얼굴은 푸짐하다. 열여섯 색의 천으로 만든 옷은 알록달록 이쁘면서도 품위가 넘쳤다.
꾹 눌러 쓴 모자 밑으로 삐져나온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손에 든 채찍만 아니면 어느 부유한 국가의 여왕 혹은 왕비로 여겼을 것이다.
"하. 이 도둑놈 새끼들. 감히 무슨 낯짝으로 내 땅에 기어들어 와?"
소오와 현작을 본 서왕모가 이를 갈았다.
"멍청한 건 여전하군. 우린 지금 땅 안 밟고 하늘에 있는데."
소오의 말에 서왕모는 발을 탕 구르며 손에 든 채찍을 강하게 털었다.
"주둥이는 여전히 가볍구나."
"주둥이는 네 주둥이가 주둥이고. 난 부리라니까."
"놈. 내가 네 진체를 아는데 무슨 헛소리냐. 수천 년 새대가리로 살더니 진짜 자기가 새인 줄 아느냐?"
"야, 그냥 싸우자. 해볼 만해."
현작의 말에 서왕모가 입술을 깨물었다.
능소궁이 있는 등천봉에 친 결계, 도산에 친 결계, 서왕모의 거처인 천주봉에 친 결계 모두 서왕모의 법력으로 지탱한다.
이것만으로도 서왕모의 많은 법력이 묶였다. 게다가 얼마 전에 두꺼비를 요지에 가두느라 적지 않은 법력을 소모했다.
소오와 현작 역시 평소 상태는 아니지만, 서왕모보다는 낫다. 절반 이상의 법력이 묶인 건 단순히 사용할 수 있는 법력 양의 문제가 아니다. 펼치는 법술의 위력 역시 큰 영향을 받는다.
"흑우개천黑羽蓋天."
소오가 별다른 말이 없자 현작은 날개를 퍼덕여 공격을 펼쳤다. 현작의 시커먼 날개에서 음침한 검은색 깃털 수백 개가 서왕모를 향해 날아갔다.
고작 수백 개밖에 안 되지만, 하늘을 덮는 기세로 서왕모를 향해 쏘아졌다.
서왕모는 가시 가득한 금속 채찍을 휘둘러 수백 개 깃털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러나 깃털이 채 사라지기 전에 하얀 불덩이가 서왕모 얼굴을 노렸다.
서왕모는 채찍을 들지 않은 왼손 손바닥을 불덩이로 향한 후, 손가락을 오므려 잡는 시늉을 했다. 기세등등하던 불덩이가 강풍을 만난 촛불처럼 픽 꺼졌다.
"퉤."
현작이 양 부리를 최대한 벌리고 목구멍으로부터 화살을 쐈다. 평범한 까마귀 크기의 소오와 달리 현작은 늑대 정도로 덩치가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쏘아낸 화살은 현작의 입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크고 굵었다.
서왕모가 왼손을 살짝 떨자 접시처럼 생긴 둥그런 금속 원반이 나타났다. 서왕모가 원반을 멀리 휙 던지자 현작이 쏜 화살이 궤도를 바꿔 원반을 따라 멀리 사라졌다.
서왕모는 멀어지는 화살에 눈길도 안 주고 고개를 숙여 발밑을 확인했다. 소오가 소환한 화화사가 서왕모의 발목을 감으려 했다.
서왕모는 왼쪽 발끝으로 화화사의 칠촌柒寸을 꾹 밟았다. 화화사는 환수에 속하지만, 뱀의 약점인 칠촌을 공격받자 아주 쉽게 흩어졌다.
퉤 소리와 함께 화살 하나 더 쏜 현작은 소오에게 질문했다.
"근접해서 싸워도 돼?"
불타는 발톱을 서왕모 명치로 쏜 소오는 현작의 말을 부정했다.
"우리 둘이 합친 것보단 약하지만, 근접하면 네가 불리해."
둘의 대화가 서왕모를 자극했다.
"삼계에 통천교주 말고 내 적수는 없다."
통천교주는 자기 입으로 말했듯이 홍균노조와 태상노군 그리고 원시천존 셋 중 둘이 힘을 합친 것보다도 강하다. 서왕모는 셋 중 하나보다 강할 뿐 둘이 손잡으면 필패다. 그러나 자존심 때문에 통천교주를 적수라고 표현했다.
"죽으면 다 부질없어."
소오는 다시 불덩이를 토해 서왕모를 공격했다. 다른 공격들은 맞아줘도 큰 피해가 없지만, 소오의 불덩이와 현작의 화살은 서왕모도 되도록 피해야 한다.
"협상하자."
수비만 하면 서왕모도 며칠 버틸 수 있다. 그러나 소오와 현작의 합친 법력은 서왕모보다 많다. 비록 공격하는 둘의 법력 소모가 더 빠르지만, 서왕모는 혼자 법력을 회복하고 저들은 둘이 회복한다.
결국, 먼저 법력이 고갈하는 건 서왕모다.
"우리 사이에 그게 가능할까?"
소오와 현작은 잘하면 서왕모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협상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다.
"반도를 돌려주면 곱게 물러나겠다."
"이미 먹어 치웠는데."
"끼아악!"
화가 치솟은 서왕모는 째지는 목청으로 소리를 지르며 손에 든 채찍을 마구 휘둘렀다. 채찍에 박힌 가시들이 사방으로 튀자 소오와 현작도 공격보다는 수비에 치중했다.
"감히. 감히 내 반도를."
서왕모는 단순히 누군가가 자기 반도를 먹어 치웠다는 것에 화난 게 아니다. 소오와 현작이 반도를 훔친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 우려가 훨씬 컸다.
서왕모는 해마다 한 번 여는 반도연蟠桃宴을 큰 자랑거리로 삼았다. 천교나 서방교는 물론이고, 고고하기 짝이 없는 태상노군의 인도도 사람을 파견해 축하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반도를 함부로 훔쳐낼 수 있다면 반도연의 유일성이 파괴되고 권위도 사라진다.
"그거 귀한 거였어? 고작 이천 년도 안 된 복숭아 갖고 너무 유난 떠는 거 아니야?"
소오는 서왕모가 이성을 잃고 발광하자 신나서 도발했다.
서왕모는 공격으로 법력을 허비하는 만큼 자신이 열세에 처한다는 걸 뻔히 알지만, 치솟는 화를 누를 수 없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고부터 누구한테 지거나 양보하며 산 적이 없었던 서왕모는 원래부터 원한이 깊은 둘을 상대로 약간의 참을성도 발휘할 수 없었다.
소오와 현작은 서왕모의 공격이 조금만 늦춰지면 불덩이나 화살로 괴롭혔다. 괜히 쉴 틈을 주면 강한 공격을 준비할까 봐 걱정되어서였다.
그렇게 셋은 긴 시간 서로를 소모했다.
"근접!"
소오의 외침과 함께 현작이 발톱을 세우고 부리를 휘두르며 서왕모에게 접근했다. 현작은 부리와 날개 그리고 발톱으로 다양한 공격을 펼쳐 서왕모를 괴롭혔다.
거리가 가까워 주 무기인 채찍이 무용지물이 되자 서왕모도 손발이 어지러웠다. 현작의 공격은 수호계 법보에 의지해 막아내며 소오가 몰래 쏘는 불덩이를 수비하는 데 정신을 집중했다.
덕분에 법력 소모가 훨씬 빨라져 날이 어두워지자 명확한 열세에 처했다.
"진짜 날 이렇게까지 핍박할 거야?"
"넌 예전에 우리 사정 봐줬어?"
서왕모가 채찍을 세게 휘둘렀다. 강한 법력이 담겨 근접을 고집하던 현작도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했다.
"결계結界 파破!"
"뭐 한 거야?"
현작의 물음에 소오가 떠듬거렸다.
"결계. 결계 법력 회수했어."
"제길."
서왕모는 둘의 핍박에 유지하던 세 결계 중 하나를 깨고 법력을 회수했다. 단순히 법력만 증가한 게 아니라 법술 위력도 세지기에 소오와 현작의 우위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때부터 소오와 현작은 서왕모의 채찍을 피해 도망 다녀야 했다. 그러나 피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어서 둘 다 몸에 채찍 자국을 몇 개씩 새겼다.
"야. 이대로는 우리가 죽겠어."
"결계結界 파破!"
서왕모는 이 악물고 결계 하나를 추가로 회수했다. 힘의 차이가 더 커지면 둘을 죽이거나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떡하지?"
전보다 훨씬 강해진 채찍에 맞아 현작은 땅을 굴렀다.
"같이 죽어야지. 이대로는 도망도 힘들어."
채찍을 한바탕 휘두른 서왕모가 잠깐 숨을 고르는 사이에 소오와 현작이 가까이 붙었다.
"제길. 다시 천계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낭패를 볼 줄은 몰랐구나. 그래도 서왕모랑 같이 죽으면 부끄럽지는 않지."
"너희 뭘 하려고?"
서왕모는 점점 강해지는 둘의 기세에 살짝 겁먹었다.
"합체자폭기 펼치려고. 어차피 우리 둘은 죽은 목숨인데, 마지막 가는 길 화려하게 꾸며야지."
서왕모는 황급히 성점술星占術을 펼쳤다. 실제 사실을 점치는 점괘술과 달리, 성점술은 가설을 세우고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아도 어떻게 될지 추측하는 법술로, 서왕모를 비롯해 펼칠 수 있는 술사가 몇 없다.
'도산의 칠 할이 날아가고 능소궁이 있는 등천봉에까지 영향을 미치는구나.'
"다신 서부에 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바로 떠나면 이대로 보내주겠다."
"너무 일방적인데?"
"큰 피해를 보기는 하지만, 내가 꼭 죽는다는 보장도 없어. 나도 여기까지 양보하는 게 한계야."
결계 두 개나 회수하여 강해진 서왕모의 기세에 힘겹게 저항하며 소오와 현작은 눈빛으로 상의했다.
천계에서 떨어진 후 실수로 새알로 들어가 까마귀와 까치로 태어난 둘은 운명처럼 만나 힘을 합쳐 수많은 요괴를 물리쳤다. 천계를 제외하고 삼계에서 함께 지낸 시간만 수천 년이 되기에 빠르게 의견을 일치했다.
"좋다. 대신 너도 예전에 한 약속 꼭 지켜라. 안 그럼 우리도 다신 서부로 안 온다는 약속을 깨겠다."
으름장을 놓은 소오와 현작은 날갯짓 몇 번으로 서왕모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둘이 떠나자 서왕모는 분을 못 이겨 채찍으로 땅과 주변의 나무를 마구 두드렸다.
싸움에서 손해를 본 건 제치더라도, 대규모 결계 두 개를 다시 펼쳐야 한다는 생각에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한편.
오작과 치우와 형천은 등천봉의 결계에 막혀 전진하지 못했다.
"함부로 들어가면 들킨다."
호기귀를 불러 들어가는 방법을 물어보려고 해도 대가로 줄 만한 귀중품이 없다.
그냥 싸우거나 누굴 죽이려는 게 아니라 소소를 구출하는 게 목적이기에 소란을 피워 주의를 끄는 방법도 쓸 수 없다.
그렇게 치우는 조바심을 내고 오작은 고민하는 중에 갑자기 결계가 사라졌다. 그리고 능소궁과 등천봉을 감싼 수많은 진법이 결계가 사라지는 충격에 휘말리며 효과를 상실했다.
"형. 함정이 아닐까?"
오작은 치우의 말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백제가 고작 우릴 경계해서 이런 함정을 판다고? 지금 사라진 결계를 다시 만들고 파괴된 진법을 설치하는 데 얼마나 많은 재물과 시간이 들어가는지 알아?"
"그럼 어서 가자."
"기운이 안정된 다음에 움직이자. 안 그럼 네 은신술도 들킬 거야."
치우는 조급한 마음을 다잡으며 오작이 신호 주기를 기다렸다.
"형천. 넌 여기 남아. 내일 이 시각에도 우리가 나오지 않으면 풍령으로 돌아가 영생과를 피운 후 복수해주든지, 그냥 들어와서 같이 죽든지 해."
"형님. 차라리 함께 들어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우린 싸우러 가는 게 아니야. 치우가 요즘 법력이 불안해 너까지 데리고 가긴 힘들다. 만약 우리가 안 나오면 돌아가서 힘을 키워 네 복수를 먼저 마치고 우리 복수까지 하는 걸 추천한다."
형천은 오작이 예전과 조금 달라졌음을 알아챘다. 예전엔 듣는 사람 기분은 고려 안 하고 필요한 말만 했는데, 지금은 약간 배려심 같은 게 느껴졌다.
"그럴 거면 형천은 왜 불렀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형천과 달리, 치우가 툴툴댔다.
"우리가 나오는 과정에 어려움이 있으면 형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잖아. 우리가 아예 못 나오면 형천 목숨까지 얹을 필욘 없고."
형천은 무성한 나무에 올라 몸을 숨겼다. 법술이 서투른 면도 있지만, 괜히 어설프게 숨기다가 들키면 변명하기도 힘들다는 생각에 그저 편히 누웠다.
오작과 치우는 등천봉에 사는 자들이 혼란한 틈을 타 능소궁 근처까지 어렵지 않게 도착했다.
적이라고 부를 존재가 없는 백제기에 결계가 갑자기 사라지고 진법이 깨졌는데도 능소궁 주변의 경계는 강화되지 않았다.
- 나누자. 난 흔적을 따라가겠다. 넌 은신술로 소소를 찾아.
- 소소 찾으면 어떻게 하지?
- 찾으면 데리고 나가. 내가 먼저 찾으면 중부에 있는 풍령으로 갈 거야. 넌 남부로 넘어가서 우릴 소환하면 돼. 네가 먼저 찾으면 형천과 함께 남부로 넘어가 무릉산武陵山에서 날 기다려.
오작의 말이 어려워서 둘은 글자를 쓰며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교류를 끝낸 둘은 헤어져서 능소궁으로 따로 침투했다.
오작은 소소가 남긴 흔적을 따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오작의 은신술은 기척과 존재감만 숨긴다. 비록 저녁이어서 어둡긴 하지만, 초롱을 밝힌 곳이 여럿 있어 누군가의 눈에 띌 염려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게다가 능소궁의 시종이나 수위는 인간이 아닌 요괴였다. 비록 도행이 높은 자는 눈에 띄지 않지만, 후각이든 청각이든 시각이든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자들이어서 갑절 조심해야 한다.
'춘소궁이라. 궁 안에 궁이 또 있는 건 서화국밖에 없을 거야.'
이백 개가 넘은 국가 중, 궁전이 있는 왕국이 채 백 개도 안 된다. 그나마 대부분 궁전이 달랑 하나 있다.
서화국의 능소궁처럼 안에 또 궁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커다란 건물이 여럿 있는 곳은 오작이 아는 한 둘 존재하지 않는다.
"몰래 찾은 손님은 누구신가?"
백초거는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춘소궁에서 보낸다. 비록 소소 때와 마찬가지로 상대의 위치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오작이 자기 기척과 존재감을 숨기느라 생긴 이질감을 용케 느끼고 누군가가 방문했음을 짐작했다.
'조화. 너무 숨기는 데만 급급했다.'
오작은 주변에 녹아들지 못하고 감추는 데만 집착한 자신을 뉘우쳤다. 웬만한 상대라면 안 들켰겠지만, 오방제의 하나인 백초거는 웬만하지 않다.
"결례를 사과드립니다. 동료의 종적을 추적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 작가의말
서왕모는 싸움만 따지면 통천교주 다음입니다. 법술이나 경지 등 종합적으로 따지면 얘기가 달라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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