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태극즉순無太極卽純
독피계경獨闢蹊經
홀로 새로운 길을 찾아
자창일파自創壹派
자신의 유파를 만들다
"운이 언제까지 좋으리라는 법은 없지. 실력 좀 키워야겠다."
자단과 함께 다니며 시비가 붙은 요괴는 대부분 도행이 백 년도 안 된 약한 놈들 뿐이었다. 강한 요괴는 자단의 강함을 알아보거나 통천교주가 두려워서 자단을 피했다.
부지불식간에 형성된 편견으로 요괴를 조금 쉽게 생각했던 오작에게 청익혈편복은 충격이었다. 혈박주에 묶인 혈편복의 기세에 눌려 오뢰굉이 일각 동안 거듭 실패했던 걸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떨렸다.
"치우 넌 하루에 여섯 시진 법력 모으는 수련을 하고 두 시진은 법술을 수련해."
당장 실력을 높일 수 있는 건 치우다. 삼태극을 열심히 돌려 귀령성모의 내단을 소화하면 법력을 비약적으로 늘릴 수 있다. 귀갑선에서는 그저 내단이 반항하지 못하게 굴복시킨 거고, 실제로는 채 일 푼의 힘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내단은 신체가 담을 수 있는 기운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본능적으로 만드는 덩어리다. 내단이 생기면 기운에 대한 흡착력이 강해짐으로써 더 많은 기운을 몸에 담게 된다.
귀령성모가 만 년 수련했다고 하여 오천 년 수련한 요괴보다 법력이 많다는 법도 없고, 귀령성모의 내단 역시 만 년의 법력이 담기지 않았다. 즉, 치우가 귀령성모의 내단을 전부 흡수한다고 만 년의 법력이 생기는 건 절대 아니다.
그래도 가공된 기운이 뭉치며 만들어진 것이기에 자연에 제멋대로 떠도는 기운을 모으는 것보단 효과가 수십 배 훌륭하다.
"형은?"
"나야 법력이 늘지 않으니 법술을 빨리 펼치는 수련이나 해야지."
혈편복 앞에선 내색하지 않고 태연함을 유지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두려움이 엄습했다. 천만다행으로 치우가 오뢰굉이 성공할 때까지 버텨줬으니 마련이지, 아니었다면 지금쯤 오작과 치우는 길이 일 장과 십이 척의 바싹 마른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치우는 법력을 높이고 적응하는 수련에 매진했고, 오작은 어떻게 하면 저주의 방해를 물리치고 무공과 법술을 더 확실하게 펼칠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한편.
풍운십삼기는 오랜만에 마구간에서 살만 찌우던 늙은 말에 고삐를 씌웠다. 그리고 갈우의 집에 모여 손수 병장기의 날을 갈고 암기의 녹을 제거하고 독을 발랐다.
북부로 내쳐지고 처음 몇 년은 그래도 희망을 품었었다. 자기들만큼 빠르고 잘 죽이는 부하는 얼마 안 되니까.
그러나 오장국의 인구가 십만을 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모두 절망했다. 그렇게 강한 국가의 힘을 얻으면 명성을 더럽히면서 풍운십삼기를 쓸 이유가 없다. 그때부턴 수련도 멈추고 각자 소일거리를 찾아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갈우가 얻은 준마로 다시 희망의 불씨가 튀었다. 이는 다시 중용 받으리라는 하늘의 계시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빤히 보는 앞에서 준마가 사라졌다.
희망의 불씨가 분노의 겁화를 피워올렸다.
"키가 십이 척 정도로 보이는 청년과 자색 옷에 맨발을 한 소년이라고 했지? 상대 배후가 어떻든 우리 풍운십삼기의 자존심을 걸고 반드시 찾아 죽인다."
대형의 말에 모두 살기를 강하게 뿜어낼 때 녹구가 찬물을 끼얹었다.
"근데 둘이서 그런 말을 끌고 다닐 정도면 실력이 만만치 않을 것 같소."
"그래서? 그냥 이대로 참고 지내자고? 계속 이제까지처럼 사실을 외면하고 즐거운 척 사는 흉내나 내자고?"
갈우와 녹구는 풍운십삼기 중에서도 사이가 각별하다. 서열로는 녹구가 열다섯째로 더 높지만, 동갑이고 실력도 비슷하며 술 좋아하는 것도 똑같아서 쭉 친하게 지냈다.
다른 형제가 말했다면 갈우도 조금 참았겠지만, 편하게 생각하는 녹구가 힘 빠지는 소리를 하자 화를 버럭 냈다.
"그게 아니라 우리 목적을 분명히 하자는 거야. 말이야 복수야?"
"무슨 차이가 있지?"
"말이 목적이면 어떻게든 우리끼리 해야지. 그러나 복수가 목적이라면 승산을 높일 조력자를 찾아야지 않겠어?"
"조력자라면 누굴 말하는 거요?"
막내가 입을 열었다. 무공 실력은 열셋 중에서 중간에도 못 미치지만, 머리가 빨라 임기응변에는 가장 능하다.
"태산노도泰山老道."
녹구의 말에 모두 손을 멈췄다.
"그 수인씨의 제자라고 허풍치고 다니는 늙다리?"
수인씨燧人氏는 수명국燧明國 사람으로 이름이 풍윤착이다.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인데, 바로 그 유명한 복희와 여와의 아버지다. 신농 이전에 각각 천황天皇과 지황地皇의 칭호를 얻어 천하를 다스렸던 두 황의 아버지.
"실력은 확실하오. 몇 년 전에 흑호黑虎가 태산에 침범하여 수비대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때 태산노도가 나서서 수습했소."
주변의 대부분 요괴는 태산을 수비대의 영역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가끔 떠돌이 요괴가 영지로 욕심내는 일이 있는데, 정말 드물게 흑호처럼 강력한 요괴가 넘보는 일도 있다.
"그거 풍백 짓이 아니었어?"
"청제 체면 때문에 밖으론 그렇게 알려졌지만, 사실은 풍백이 오기 전에 태산노도가 흑호를 생포했소."
형제들은 갈우를 바라봤고, 갈우는 대형을 쳐다봤다.
"말이 대수냐? 복수가 우선이다."
무기와 암기를 모두 수습한 풍운십삼기는 살기를 피우며 태산으로 말을 달렸다. 비록 수비대에 편익조를 날릴 수준의 술사가 없어서 답신은 안 왔지만, 이미 말을 가진 자는 관문을 못 넘게 잡아두라고 전달했기에 놓칠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태산에 도착한 풍운십삼기는 오작과 치우가 나타난 적도 없다는 말에 분노가 더 거세게 타올랐다. 그래서 많은 재물과 둔각까지 대가로 약속해 태산노도를 끌어들였다.
풍운십삼기가 태산노도와 함께 태산 주변을 누비며 오작과 치우를 찾느라 뼈마디가 쑤실 때, 둘은 먹거리가 넘치는 혈편복의 영역에서 편하게 수련했다.
물론, 몸과 마음 모두 편하게 수련한 건 치우뿐이었다. 오작은 몸만 편하고 마음은 매우 불편했다.
'태극은 뭘까?'
태극이 뭔지 알아내면 태극구는 더 높은 등급으로 진화한다고 했다. 즉, 태극이 뭔지는 태극구도 모른다.
그때 수련을 마친 치우가 터덜터덜 걸어왔다. 어깨가 살짝 처진 걸 보니 수련이 마음에 안 든 느낌이다.
"형, 음양에 관한 얘기 좀 해줘. 뭔가 거슬리는 게 있어."
오작은 태음과 태양, 극음과 극양, 순음과 순양에 관해 자신이 아는 만큼 얘기해줬다. 오작의 말을 귀담아들은 치우는 올 때와 똑같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돌아갔다.
'부러운 자식.'
오작은 지식을 쌓아 지혜를 얻어 논리적으로 고민한다. 그러나 치우는 그냥 직감으로 문제점을 인지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해결한다.
최고의 경지까지 이르는 데 어느 게 더 유리한지 모르지만, 오작은 치우가 부러웠다. 반대로 치우는 오작이 무척 부럽고.
치우에 대한 작은 질투로 마음이 어지러웠다. 오작은 도랑 넓이의 개울을 찾아 몸을 담갔다. 차가운 물이 몸을 시원하게 보듬어주자 복잡하던 머리와 어지럽던 마음이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그렇게 머리도 마음도 비우고 도랑에 그저 누워있었다.
"형. 순음과 순양은 왜 존재할 수 없지?"
갑자기 치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작은 멍한 상태에서 입을 열어 대답했다.
"존재한 적 없으니까. 존재한 적 있었다면 누구도 존재를 부정하지 못했겠지."
"예전에 없었다고 이후에도 없을까?"
"태극이라는 이름을 생각해. 태음과 태양, 극음과 극양. 이 둘에서 한 글자씩 따서 태극이잖아. 만약 순음과 순양이 있다면 순태극 혹은 태극순으로 이름 짓지 않았을까?"
꼬르륵 소리와 함께 차가운 물이 오작의 입을 통해 식도를 타고 위로 들어갔다. 깜짝 놀란 오작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머리를 돌려 주위를 살폈으나 치우는 없었다.
'작은 섬에서 나눴던 대화야.'
삼태극을 못 만들어 쩔쩔매는 치우에게 사고의 폭을 넓혀준다며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사고의 폭을 넓히려면 많이 듣고 많이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 진실만 들을 필요도 없고 옳은 생각만 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부담 없이 생각을 안 거치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었다. 가끔 말도 안 되는 억지도 부렸고.
"태음과 태양은 극음과 극양이다."
태양은 양의 기운이 정말 상상도 어려울 정도로 거대하게 뭉친 것이다. 그래서 클 태太를 붙여 태양이라고 부른다.
그 정도로 크게 뭉친 기운은 알아서 음의 성질을 배척한다. 그래서 태양은 극양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극양은?"
극양은 음을 배척한다. 그러나 세상 만물은 음양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극양은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진화하여 태양이 되든지, 아니면 음양의 조화를 이루든지.'
양이 극에 달하면 음이 되고 음이 극에 달하면 양이 된다. 극양이 특정 조건에서만 존재하는 건 안정적인 상태가 아닌 과도기이기 때문이다. 극양이 계속 존재하려면 태양이 되는 방법밖에 없다. 아니면 일부가 음으로 변해 결국엔 음양이 조화를 이룬 상태가 된다.
수많은 생각이 오작 머리에 떠올랐다. 오작은 굳이 정리하지 않고 생각들이 자유롭게 떠돌게 놔뒀다.
형편없는 생각은 알아서 사라졌고, 비슷한 생각들끼리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나도 천재네.'
엄밀히 따지면 오작의 깨달음은 삼십 년에 가까운 기간 쌓은 지식과 지혜의 결정체다. 치우의 선천적인 재능과 달리 후천 노력으로 얻은 천재성인 셈이다.
'태양은 거대한 극양이다. 음을 배척하며 극양이 되지만, 극에 달하면 일부 양이 음이 된다. 기운이 작다면 음양의 조화를 이룰 테지만, 태양은 양의 기운이 너무 거대하여 일부가 음으로 변해도 티가 안 난다. 그래서 태양은 극양의 상태를 쭉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태극은 태양 혹은 태음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태극을 이루는 건 불가능하다. 인간의 몸으로 어찌 해와 달을 품을 수 있단 말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오작을 괴롭히던 생각들이 드디어 정리되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태극은 실제와 반대 개념이구나. 진짜 태극은 극양 혹은 극음이 큰 기운을 얻어 태양 혹은 태음이 되는 건데, 우린 극양과 극음이 태양이나 태음이 못 되고 음양의 조화를 이룬 걸 태극이라고 여긴다.'
오작의 단전에 자리 잡은 태극보인이 삐걱거렸다.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으니 존재할 힘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래서 삼태극이 정도라고 하는 거구나. 음양태극은 태극이 되지 못한 잔재일 뿐이다.'
태극보인이 금세라도 깨질 듯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말이야."
오작이 소리 내 말했다.
"진실이 아니라고 거짓은 아니야. 진실만 진실인 게 아니라고. 넌 그저 모든 진실을 품지 못했을 뿐, 거짓은 아니야."
태극보인이 떨림을 조금씩 멈췄다.
"기다려. 내가 널 진실로 바꿀게."
인간은 태극을 품을 수 없다. 모든 힘을 음 혹은 양으로 바꿔버리는 힘은 음양과 오행의 조화로 이뤄진 인간과 상극이다.
'극양은 음으로 변하고 극음은 양으로 변한다. 이 변화로 음양은 조화를 이룬다. 태양이나 태음도 이러한 변화에 큰 힘으로 저항할 뿐이지, 양이 음이 되고 음이 양이 되는 걸 막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극이 없다면?'
천만 갈래의 벼락이 오작에게 떨어졌다.
"극이 없어 양은 양대로 음은 음대로 있는 게 순양과 순음이구나. 음이 없어 순양이 아니고 양이 없어 순음이 아니다."
"이 역시 절대의 진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진리다."
태극보인이 반대 방향으로 회전했다. 그러다 또 방향을 바꿔 원래 방향으로 회전했다. 그러나 뭔가가 계속 마음에 안 드는지 회전 방향을 수시로 바꿨다.
'그래. 무극無極이다. 순음과 순양이 존재하려면 무극을 이뤄야 한다.'
음과 양이 반반씩 조화를 이뤄 원반 모양으로 존재하던 태극보인은 동그란 구가 되었다. 태극구를 닮은 작은 구에서 음은 음대로 양은 양대로 아무렇게나 뒤섞여 존재했고, 모든 기운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이건 음이고 이건 양이라고 구분할 필요 있을까? 음이고 싶으면 음으로, 양이고 싶으면 양으로. 기운이 알아서 순수하게 존재하면 되는 것을.'
복희가 천황이 되며 음양설을 퍼뜨렸고, 여와가 그 뒤를 이어 지황이 되면서 오행론을 펼쳤다. 그리하여 천하는 다섯으로 나뉘었고, 각각 제帝를 배출하여 국가 사이의 다툼을 줄였다.
여와의 뒤를 이어 인황이 된 신농 역시 천하를 오행으로 나눠 상생과 상극으로 발전하게 하고, 음양의 조화를 이룬 태극으로 태평성세를 이뤄야 한다고 여겼다.
이렇게 삼황은 우주의 진리와 하늘의 이치로 천하를 다스리려 했다. 그리고 태산 근처에서 영예주에 걸려 성장이 막힌 한 소년이 우연히 무극을 깨달았다.
기존의 음양태극을 부정하는 무극의 탄생은 굳이 알리는 사람이 없어도 도행이 극에 달한 자들에게 전해졌다.
원시천존과 태상노군 그리고 통천교주. 삼존으로 불리는 세 거인이 무극의 탄생을 알아차리고 무거운 엉덩이를 들썩였다.
'치우는 못 익히겠네.'
삼존이 무극의 탄생을 감지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오작은 그저 삼태극을 이룬 치우한테 무극을 가르치지 못하는 것이 애석하기만 했다.
- 작가의말
무극 이론은 비유하자면 뉴턴의 삼대 법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같은 겁니다. 음양론이나 오행론 그리고 태극 역시 물리 법칙이라고 생각하면 편하겠네요.
뉴턴이 사과 떨어지는 걸 보고 중력의 법칙을 떠올렸듯이 오작 역시 냉수욕하다가 무극을 깨달았습니다.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발견 혹은 이론이 널리 알려져 물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듯이, 오작의 무극은 오작 혼자만 알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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