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틀린 것 하나 없다(4)
그리고 시간은 다시 흘러 현재.
아르키피라는 셀리테라의 명에 따라 네 명의 인질을 데려왔다.
사실 천룡족인 그가 셀리테라의 명에 곧이곧대로 따를 이유는 없다. 원칙적으로만 따진다면 말이다.
이유는 하나였다.
"너, 예전에 나한테 받기로 하고 못 받은 거 있지? 거기에다 좀 더 얹어줄 테니까, 내가 하는 부탁 하나만 들어줘."
무전유죄다. 아르키피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보면 '그 일'은 유야무야 무산되었다. 수인족 무리를 대륙의 남쪽으로 열심히 옮기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안도혁에 의해 모조리 빼앗겼으니까. 아르키피라의 잘못은 아니지만, 아르키피라의 잘못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아르키피라는 이 일에 대한 대가는 하나도 못 받겠다며 낙심했다. 불가피한 일이 생겼다지만 임무 실패는 실패다. 뭘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셀리테라는 그 돈을 주겠다고 했다. 그것도 원래 받기로 한 것보다 조금 더.
원래대로라면 이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해적으로 살아오긴 했지만 인질극 따윈 벌인 적이 없었다. 어차피 해적 생활 따위 무료한 시간을 그럭저럭 때우기 위한 놀이에 가까웠다. 인간이 쓰는 화폐 따위, 용족인 그에게 대단한 가치는 없다.
결국 돈이 문제다.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인질을 생포해 왔다.
'그런데 저 놈이 인질극 따위로 흔들릴 만한 놈인가?'
동족들을 박살내고 있는 모양새를 보아, 인질을 잡으면 분노해서 더 힘이 끓어오를 것 같은 냄새를 풀풀 풍겼다.
어쨌든 명령은 명령이다. 아르키피라는 충실히 임무를 수행했다. 다만 인질을 인도한 시점에 그는 자신이 괜한 짓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휩싸였다.
'아무래도 이거, 아무 의미 없는 짓 같은데.'
안도혁은 300에 가까운 동족을 시체로 만든 여파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를 짓누르는 셀리테라의 꼬리 따위는 당장이라도 쥐어 터트렸을 터이나, 아무런 여력이 남아있지 않은지 그저 숨만 몰아쉴 뿐이었다.
안도혁과 아르키피라의 눈이 마주쳤다. 아르키피라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젠장. 죽어가는 놈의 눈빛이 무슨······.'
눈빛만으로 사람을 잡아 죽일 기세다. 지금이라면 안도혁보다 자신이 훨씬 강하겠지만, 두 번이나 개처럼 얻어맞은 그의 마음엔 이미 공포가 뿌리깊게 자라나 있었다.
일단 이 자리를 뜨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날아오르던 참이었다.
- 야, 이 병신 같은 새끼야!!
뻐어억
분노에 찬 천룡왕의 일격에 아르키피라의 의식이 휘청했다. 기껏 틀어막은 콧잔등의 상처가 다시 터지고, 이빨이 다섯 개쯤 날아갔다.
고통보다 억울함이 앞섰다. 아르키피라가 무례를 무릅쓰고 소리쳤다.
- 아니, 왜 때리십니까!
- 왜 때려? 왜 때리냐고? 너 말 잘했다.
캘러무스의 강철 같은 꼬리가 아르키피라의 등판을 거세게 후려쳤다. 땅바닥에 거세게 내동댕이쳐진 아르키피라의 머리 위로 욕설 섞인 노호성이 떨어졌다.
- 너는 이 새끼야. 대가리에 이 새끼야. 생각이라는 게 이 새끼야아아아아!!
분노로 가득한 천룡왕의 목소리에 아르키피라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지?
이어서 폭력이 또 한바탕 벌어질 예정이었으나, 급히 끼어든 마레아도스의 외침이 그것을 제지했다.
- 시간 없다. 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 그, 그렇지. 쏘자, 마레!
두 용왕은 입을 쩍 벌렸다. 압축된 공기와, 이글거리는 화염이 들끓는다.
목표는 셀리테라의 꼬리였다.
콰르르르
불꽃의 폭풍이 셀리테라의 꼬리를 덮쳤다. 정확히는 그 아래 깔린 안도혁을 향한 것이었지만, 그 와중에 셀리테라의 꼬리가 날아가 버렸다.
- 끼야아악!!
셀리테라가 잘린 꼬리를 움켜잡고 땅을 데굴데굴 굴렀다. 갑자기 터진 공격에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욕설을 내뱉으려 했지만, 살기까지 느껴지는 두 용왕의 눈초리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뭔가 일이 잘못됐다. 그 정도는 셀리테라도 느낄 수 있었다.
'내, 내가 뭔가 잘못했나?'
다른 용족들을 둘러보자, 대부분은 두 용왕의 행태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동자에 물음표라도 새겨진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전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약 열 명 정도의 소수 용족은 의아함을 표출하는 대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 제, 젠장.
- 가세하세!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눈초리였다. 그들은 즉시 용의 숨결을 안도혁에게 토해냈으며, 그 중 몇은 인질에게로 다가가 그들을 안전한 위치로 옮기기까지 하는 기행을 벌이고 있었다.
'대체 뭐야······.'
공격은 약 5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실로 엄청난 폐활량이 아닐 수 없었다.
쿠웅
폐부에 남은 마지막 한 조각의 공기조차 내뱉은 캘러무스와 마레아도스가 땅에 몸을 눕혔다.
- 허억, 허억.
- 크허억.
안도혁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았다. 고온을 머금은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인해 대기에 얕게 수증기가 깔리고, 먼지와 파편이 온 사방을 뒤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운이 쭉 빠진 캘러무스에게 다가간 셀리테라가 그를 잡고 짤짤 흔들며 쏘아붙였다.
- 캘. 미쳤어? 셀리한테 이게 무슨 짓이니?!
대답한 것은 해룡왕 쪽이었다.
- 미친 것은 너다. 이 멍청한 3인칭 관찰자 새끼야!
쫘아악
힘차게 휘둘러진 해룡왕의 꼬리가 셀리테라를 직격했다.
지룡족도 거대하지만, 마레아도스와 비교하면 어린아이와 어른 이상의 체급 차이가 난다. 어마어마한 중량을 얻어맞은 셀리테라의 몸이 수십 미터를 날아가 쳐박혔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셀리테라가 용암이 끓는 입으로 외쳤다.
- 마레아도스.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냐?
평소 같은 장난기가 없는 말투였다.
누가 봐도 피해자는 셀리테라 쪽이었다. 그러나 마레아도스는 아주 당당한 태도로 이를 갈았다.
- 그것도 좋겠군. 하지만 뒈지기 전에 네년이 뭘 잘못했는지는 알고 갔으면 좋겠는데.
영문 모를 말에 셀리테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이해할 수 없는 행동만 하고 있다. 마레아도스에게 묻고 싶었지만, 저 분노한 해룡왕이 제대로 입을 열 것 같지는 않았다.
용화의 의식을 치른 자는 본능이 이성보다 강해진다. 이것은 더 폭력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힘의 차이가 명확할 때는 쉽게 꼬리를 내린다는 말도 된다.
셀리테라는 죽어도 마레아도스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폭력성은 발휘되지 않았다.
- 흥.
폭력적이기는. 셀리테라는 입을 삐쭉이며 캘러무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기운이 다 빠진 천룡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 정말 이해하지 못한 거냐, 셀리?
셀리테라뿐만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2백여 명의 용족 중 그의 진의를 파악한 사람은 극히 소수라는 것을 눈빛만으로 알 수 있었다.
설명을 해야 하나. 캘러무스의 입에서 반쯤 쉰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 옛날 이야기가 있다. 주인공이 영웅인 옛날 이야기.
- 옛날 이야기라고?
- 고리타분하다 못해 통속적이기까지 한 이야기야. 인간 세상에선 어느 지방에서나 전해 내려올 법한 종류의 동화지. 영웅에 관한 설화야.
캘러무스는 짧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 옛날 이야기에 등장하는 영웅은 신체 강건하고 정의를 위해 싸운다. 모두들 그의 용맹을 칭송하고, 찬미를 아끼지 않아.
- ······그게 뭐?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다. 하지만 셀리테라는 기존의 경험을 통해 눈앞의 이 남자가 쓸데없는 소리로 시간을 허비하는 종류의 사람이 아님을 익히 알고 있었다.
- 영웅이 있으면 그에 맞는 악당도 있어야겠지. 하지만 악당은 영웅의 벽은 될 지언정 장애는 되지 못해. 결국 영웅은 벽을 뚫고 나아간다. 악당에게 승기는 없는 셈이야. 그렇다고 악당이 그대로 져 줄 수는 없는 법이지. 그렇기에 악당들은 악의에 찬 비책을 생각해 내.
캘러무스의 눈이 빛났다.
- 그건 바로 영웅의 부모를 비롯한 친인척을 납치하는 거야. 납치하고 고문해 죽이기까지 하지. 심한 경우에는 영웅의 바로 앞에서 처형을 진행하기도 해.
무언가가 떠오르는 듯한 말이다. 셀리테라의 뒷머리에 식은땀이 한 방울 흘렀다.
- 그럼 어떻게 될까. 절망을 통째로 쏟아부은 이 상황에, 영웅은 좌절하고 검을 꺾을까?
마레아도스가 끼어들었다.
- 아니지. 영웅은 분노를 양식 삼아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다시 일어난 영웅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각성해 버리거든.
두근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셀리테라의 머리가 혼란에 빠졌다.
- 예, 옛날 이야기일 뿐이잖아!
캘러무스가 땅을 쾅 내려쳤다. 답답하기 그지없다는 얼굴로 가슴을 쾅쾅 친다.
- 셀리테라, 셀리테라!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되냐? 양충학(養蟲學)을 익혔다는 사람이 그것도 몰라?!
셀리테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깨달아 버렸다. 깨달아 버리고 말았다.
- ······벌레의 성장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만, 가장 직관적인 것은 자극이야. 그렇기에 적절한 신체 단련 등을 통해 벌레가 잘 자랄 수 있도록 자극하지. 하지만 어떠한 경우, 너무 큰 자극을 받은 벌레가 갑자기 폭주하여 이례적인 성장을 하는 경우도 있어.
- ······.
- 당연히 보통의 경우엔 절대 발생하지 않아. 이 현상은 벌레의 크기가 크고 미성숙할 때나 간혹 일어나는 일이니까. 그런데 지금은 두 가지 요건을 다 갖췄네.
특이점이 가진 벌레의 크기는 일반적인 용족의 천 배. 가시화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니었지만 대략적으로 보면 그렇다.
- 지푸라기 하나에 떨어진 불씨는 화염으로 승화하지 못해. 하지만 밀짚에 떨어진다면 상황은 달라지지. 단 한 조각의 불씨도 세상을 불태울 겁화가 될 수 있는 거야.
절망이 가득한 목소리가 마음을 긁어낸다.
셀리테라는 악을 쓰듯 소리쳤다.
- 백 퍼센트 확률은 아니잖아! 그리고 너희가 펼친 맹공에, 각성하기 전에 사망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니?!
분명 용의 숨결은 빈사 상태에 놓인 안도혁을 처치하기엔 충분한 수준의 화력이었다. 몸이 멀쩡한 상태였더라도 중상을 피하기 어려울 정도의 공격이다.
캘러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 그래, 나도 그걸 바래서 공격한 거야. 그 판단이 옳았으면 좋겠는데······.
차차 먼지가 잦아들었다. 하늘을 덮을 듯 치솟은 안개의 장막이 서서히 무뎌져, 베일 뒤의 실체를 끌어내고 있었다.
후두두둑
떨어지는 먼지 속, 무언가가 그곳에 서 있었다.
하나의 인영일 뿐이었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한 두개는 더 큰 인영. 그것을 본 마레아도스가 허무감 넘치는 탄식을 내뱉었다.
- ······옛말에 틀린 것 하나 없군. 제기랄.
폭풍은 잦아들고, 열기는 식었다. 세상을 멸망시킬 만한 공격의 여파는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깡그리 찢고 불태웠다.
한 점의 잡초조차 생환하지 못할 멸망의 흔적.
안도혁은 그곳에 서 있었다.
"······."
그 원형을 찾기 어려운 지경에 놓였던 육체는, 상처라고는 입은 적 없다는 듯 말끔하기 짝이 없었다.
부러진 뼈는 붙었고, 뜯겨나간 살은 재생되었으며, 흉물스럽게 녹아 내린 피부는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매끈하게 바뀌었다. 초점을 잃은 눈에는 다시 빛이 돌아, 생명력이 다시 넘쳐 흐르기 시작했다.
꽈아악
안도혁은 주먹을 쥐어 보았다. 여태까지 있었던 것보다 더 큰 거력이 그의 손아귀에 잡혔다. 지금이라면 하늘이라도 잡아 뜯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문득 정수리를 타고 흐르는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생소하진 않았다. 어쩐지 그립고 낯익은, 그런 감각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안도혁의 손이 머리 위로 올라갔다.
스르르
한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 한 점의 초목도 자라지 못할 황폐한 대지가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치유하지 못했던, 잃어버렸던 모근.
두터운 손가락 사이로 공기만이 잡힐 터였다. 쓸쓸하고 차디찬 정수리를 슬픔 가득한 손길이 어루만질 터였다.
그리고 그것은 한때일 뿐이었다.
"그래. 이런 느낌이었다."
안도혁은 조심스럽고 상냥하게, 그러나 힘 있게 머리를 쥐었다.
정확하게는 머리카락을 쥐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황량한 대지는 어느새 대초원으로 변해 있었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군."
여행을 떠난 지 정확히 4년이 되는 해의 어느 날 저녁.
안도혁은 머리카락을 되찾았다.
추천, 선작,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당
- 작가의말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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