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드마스터(3)
서석진의 옷을 북북 찢어내고 허겁지겁 응급처치를 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그 이상 다급해보일 수가 없었다. 서석진을 미라로 만들 듯 붕대를 둘둘 감고 또 감고 있었던 것이다.
별채에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이 있었다.
"세상에, 이제 어쩌죠?"
"저 괴물은 대체 뭐지······."
서석진이 뒷목을 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깨어났다.
애초에 연수치기로 사람을 기절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순간적인 충격에 잠시 기절하던지, 아니면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지경으로 만드니까. 차라리 순수한 기절을 원한다면 경동맥을 조르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그렇게 깨어나서 전투를 바라보는데, 모든 부하들을 전부 쓰러뜨리는 걸 보자 안도와 걱정이 동시에 들었다. 군인을 저렇게까지 상하게 하고도 무사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금발의 미녀가 나타나더니 미친 듯한 무위로 서석진을 박살내버렸다.
거리가 조금 멀었지만, 귀가 좋은 레이나는 그녀가 서석진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저 사람, 저대로 잡혀 갈 거예요."
"네에? 그, 그럼 어쩌죠."
레이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잡아가기만 한다는 거라면 그나마 낫다. 어떻게든 틈을 봐서 빠져나올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분위기상 저 여자는 그 이상의 것을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여자의 감이라기보단, 제스쳐와 말투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분명한 증거가 여기저기 깔려 있었던 것이다.
'아, 예스타껜 뭐라 말씀드려야 한단 말인가.'
한탄하고 있을 무렵, 서석진을 붕대 덩어리로 만든 마리아가 별채 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소리쳤다.
"거기 있는 두 사람, 당장 나와라. 반항은 하지 않길 바라지."
레이나는 깜짝 놀랐다. 분명 다른 병사들은 거의 기절하거나 도망쳐 있어, 자신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사람은 없을 텐데.
'기감만으로 느꼈단 말이야?'
이 먼 거리에 있는, 그것도 건물 안에 있는 사람을.
몸서리칠 정도의 실력이다. 레이나는 잠시 도주 방법을 고민했으나, 베르시엘라가 보무도 당당하게 밖으로 걸어나가는 걸 보고 잠시 휘청했다.
"아니, 고민도 안 해보고 따르는 겁니까?"
"그럼 어떡해요. 당신은 저 괴물에게서 달아날 방법을 알겠어요?"
물론 그런 방법은 없다. 폭탄을 던져도 의미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지금 떨어지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신랑감이 도망가면 큰일이다. 아직 제대로 어필도 못 했는데.
둘은 순순히 걸어나왔다. 포승줄까지도 필요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마리아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엘프에 수인족이라. 둘 다 상당히 미인이네.'
이색적인 조합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마리아는 동료 모두가 여자라는 것에 더 신경이 쓰였다.
'설마 이것들······.'
억측일지도 모르지만, 이만한 남자면 여자들이 꼬여도 이상할 게 하나 없다. 꽃에 모여드는 벌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인생 처음으로 찾은 최고의 신랑감이다. 목에 칼을 들이밀어도 빼앗길 수 없었다.
병사들이 모두 중상을 입었기에 마리아가 직접 그들을 이송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녀는 포승줄도 묶지 않았다. 도망가도 얼마든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라기보다는, 도망가도 잡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가짐이었다.
'경쟁자가 없어지면 나야 좋지.'
저 멀리서 밤 늦게 불려온 신관이 병사들을 치료하는 모습이 보였다.
화아아
금빛 광채가 눈이 부실 정도로 밤을 밝혔다. 신관의 손에서 뿜어진 황금의 기운은 병사들의 몸으로 스며들더니, 잘려 나갔던 신체부위가 하나하나 이어지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기적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대륙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직접적으로 '신력'이라는 것을 사용할 수 있는 종교는 이레이시아밖에 없었다. 황금룡 이레이시아의 신관만이 치유의 기적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를 믿는 모든 사람이 전부 쓸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믿음이 정점에 달한 신관이나 성녀 정도만 이적을 발휘할 수 있다.
마리아는 팔다리가 원래대로 아물어가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신관이 있어서 다행이야. 만약 누가 죽기라도 했으면 일이 조금 힘들 뻔했어.'
그보다 왜 이렇게 느린가.
부상당한 병사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치유의 이적이라 해도 그들을 모조리 치료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마리아는 손톱을 깨물며 안절부절못했다. 병사들의 목숨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병사들이 대강 치료된 것 같자 그녀는 소리쳤다.
"신관님! 이 사람도 치료해 주세요. 실혈사하겠어요!"
얼굴 빼곤 온통 둘둘 묶인 서석진의 얼굴은 새하얬다. 원래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던 그의 얼굴은 창백에 가까울 정도로 질려 있어서, 잘 보지 않으면 시체처럼 보일 정도였다.
늙수그레한 신관은 몸이 성치 않은 듯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왔다. 다급해진 마리아는 서석진을 끌어안고 신관에게 달려갔다.
붕대 너머로 서석진의 탄탄한 몸이 느껴졌다. 마리아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돌았다.
신관은 허리를 두드리며 투덜거렸다.
"늙은이를 너무 부려먹지 마시오. 이러다 이레이시아 님 곁으로 돌아가겠소이다."
"끙, 죄송합니다."
아무리 장군이라고 하더라도 이레이시아의 신관에게 하대를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적을 쓸 정도의 신관이라면 상당한 신앙을 가지고 있을 터, 가볍게 볼 수만은 없는 인물이다.
서석진의 몸에 얹은 노인의 손에서 광채가 빛나더니, 곧 서석진의 몸에 혈색이 도는 게 눈에 띄게 보였다.
숨소리가 평안해진 서석진. 그러나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마리아가 소리쳤다.
"왜죠! 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거에요?!"
"아가씨, 귀청 떨어지겠소이다. 늙은이를 죽일 셈이오?"
"그, 그건."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었다. 부끄러움에 마리아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남자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추태인가.
"상처는 치료됐지만, 딱 봐도 체력이 떨어진 몸이오. 튼튼한 자이니 하루 정도 지나면 일어날 수 있을 게요."
마리아가 보기에도 그렇기는 했다. 하지만 확언을 받은 것과는 다른 법. 그녀는 기쁨에 신관에게 경례를 올려붙였다.
"감사합니다. 신관님!"
"군인이셨던 모양이군. 여하튼 늙은이는 이제 돌아가 보겠소이다. 고생하시오."
신관이 사라지고, 서석진 일행은 성으로 압송되었다.
병사들이 다 죽을 뻔했다는 소식을 듣고 영주는 처형하겠다며 길길이 날뛰었으나, 마리아의 말에 조용해졌다.
"내가 제압했으니, 이들 셋 모두 내 병사로 차출해 가겠어요. 이견 있나요?"
"······없소이다."
영주가 나이는 훨씬 많았지만, 계급이 깡패였다. 제국 중장인 그녀의 위에 서는 사람은 정말 얼마 없었던 것이다.
날이 밝자, 마리아는 이송을 도울 병사 몇을 빌려 자신의 부대가 있는 곳으로 출발했다.
졸지에 제국에 들어오고 얼마 되지 않아 잡혀가게 된 서석진 일행이었다.
서석진은 기절한 지 딱 하루만에 깨어났다.
'여긴 또 어디냐.'
낯선 천장······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작은 기둥이 세워져 있고, 그 위로 천막이 덮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천막에서 자본 적이 없는 서석진에겐 나름대로 신선한 경험이었다.
몸 상태가 완전하진 않았다. 아직 곳곳이 쑤셔오는 것이 느껴졌다. 서석진은 한숨을 내쉬며 상황을 복기해 보았다.
'정말 강했지.'
다시 싸운다고 해도 이길 것 같지 않았다. 지금보다 훨씬 더 단련해야 그 무력의 편린이라도 잡을 수 있을까.
'그래도 승산이 아주 없진 않았어.'
부족한 게 무엇인지 확연하게 느껴졌다.
'힘의 배분과 기술.'
반사신경에 의존해 몰아치는 본능적인 싸움 방식을 채택하는 자신과 달리, 마리아는 체계적인 검술로 차근차근 그를 압박했다. 전력을 다한 휘두름이 가벼운 손목 움직임에 흘러나가는 기술은 경탄할 지경이었다.
물론 하루 아침에 그와 같은 기술을 익히긴 무리일 것이다. 지금까지 쌓아 온 경험의 방향이 다르니까.
하지만 깨달음의 계기는 되었다.
'좋은 걸 배웠어.'
안도혁 한 명과만 단련해 왔던 폐해였다. 괴물 같은 힘으로 몰아쳐오는 그를 상대하려면 기술이고 뭐고 일단 살아남으려고 반사신경을 길러야 했으니까. 자연스레 그의 전투 방식은 검과 검이 맞닿는 것을 상정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 더 자려던 찰나였다.
'잠깐. 이거 분명히 침낭 아니야?'
서석진은 번데기마냥 침낭 속에 누워 자고 있었다. 그건 확실했다.
지금은 겨울이다. 침낭 하나만으로는 아무리 텐트 안에서 잔다고 해도 춥기 마련이다. 그리고 텐트 안에서 열기는 느껴지지 않고, 타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다. 모닥불이나 휴대용 난로를 피운 것은 아니란 뜻이다.
그런데······.
'아니, 왜 왼쪽이 따뜻하지?'
우반신과 달리 좌반신에선 열기가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꿈틀거려 본 서석진은, 이윽고 팔이 무언가에 의해 구속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손가락을 꿈틀거리자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끼긱
녹슨 기계장치에 비견될 만큼 딱딱한 움직임으로 서석진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금발의 여자가 아름다운 푸른 눈을 뜨고 서석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지금 나 분명······.'
자유로운 오른손으로 몸을 더듬어 보자, 자신이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왼쪽 팔에 느껴지는 감각은······.
"일어났네?"
서석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리아가 그와 같은 침낭에 들어와 알몸으로 그를 껴안고 있었던 것이다!
"으악!"
서석진은 바둥거렸으나, 마리아의 팔이 그를 강하게 옥죄었다.
둘의 근력은 거의 동등하다. 체력이 떨어진 서석진이 그녀를 뿌리칠 수는 없었다.
"체온이 떨어지면, 체온으로 덥히는 게 가장 좋다고 하더라. 안 그래?"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도대체 이 여자와 왜. 그것도 서로 알몸으로!
"이, 이게 무슨 짓이야."
"무슨 짓이냐니? 생명의 은인한테."
이것 역시 틀린 말은 아니다. 물론 마리아가 없었더라면 생명의 위기까지 가지도 않았겠지만.
서석진은 벌벌 떨며 그녀를 직시했다.
'무슨 생각이야, 이 여자!'
마리아는 곱고 청아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분명히 약속했지? '내 밑'으로 들어오겠다고."
그 제안에 답한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암묵적으로 동의된 사실이고, 서석진은 나름대로 각오를 굳히고 있었다. 병사로 복무할 생각도 약간이지만 들었다!
'하지만 이 형태는 아니잖아!'
마리아의 푸른 눈이 웃음을 띠었다. 분명 아름답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으나, 서석진은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 이상의 기분이 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그 청아한 음성이, 그러나 악마의 왜곡된 속삭임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내 거야. 지금부터, 그리고 앞으로도!"
차라리 기절해 있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서석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서석진은 목청껏 소리쳤다.
"끄악! 사, 사람 살려어!"
"닥치고 누워. 도장 찍을 거니까."
"무슨 도장을 찍는다는 거야!"
"후후. 걱정 마. 누나가 다 알아서 할께. 처음이지만 몸을 움직이는 건 자신 있어."
"뭘 알아서 한다고!"
"가만히 있어. 하늘의 별이라도 보고 있으라구."
"천장 막혀 있잖아!"
애초에 자신이 지금 남자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잊은 듯, 서석진은 필사적으로 발버둥쳤다. 지금은 이 암사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생전 믿지도 않았던 신에게 기도까지 드릴 정도였다.
그런 그의 바램이 헛되지는 않았다.
파악
천막이 거세게 들춰졌다. 레이나와 베르시엘라였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마리아는 정색하며 손짓했다.
"나가. 지금 부부의 의식을 치를 참이니까."
"누, 누가 부부야! 강간범으로밖에 안 보이잖아! 거기서 당장 안 나와?"
서석진과 마리아는 아직 침낭 안에 있었다.
"어허. 어서 나가보도록."
"당신 끌어내기 전엔 죽어도 못 나가!"
서석진의 눈망울에 눈물이 맺혔다.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된 건지.
다행히 서석진은 침낭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필사적으로 빠져나왔다기보다는, 외부인의 침입에 흥이 깨진 마리아가 '시도'를 멈춘 것이다.
하얀 살결과 늘씬한, 그러면서도 나올 데는 나오고 들어갈 데는 들어간 육감적인 몸매가 드러났지만, 서석진은 눈이 가지도 않았다. 침낭을 끌어안고 벌벌 떨 뿐이었다.
옷을 입은 마리아가 서석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다음 기회에 하자?"
뱃속을 싸늘하게 적시는 공포심을 애써 뿌리치며, 서석진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시, 싫어어."
"후후. 그런 얼굴도 매력적인데."
애초에 최고 수준의 미남이니 무슨 표정을 짓든 다 잘생겨 보일 수밖에 없다.
한 번 더 서석진의 이마에 입을 맞춘 마리아는 천막을 나갔다. 그러나 그녀의 체온과 잔향은 서석진에게 아직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었다.
이제 편히 잘 수 있는 밤은 오지 않을 것이다.
서석진은 그렇게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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