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15)
놀란 것은 안도혁뿐만이 아니었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루나가 냉큼 달려왔다.
"오빠! 손, 손······!"
강한 사람인 줄은 알고 있다. 이 세상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걱정한다는 어필을 해왔다. 대륙 최강이니 뭐니 해도, 그 전에 연인이니까.
이 생각은 항상 같았다. 그러나 은연중에는 그저 무적의 남자로 인식하고, 의지하기만 하지 않았을까라고 누군가 그녀에게 질문한다면, 루나는 쉽사리 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즉, 그러한 기둥 같은 사람이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 것에는 적잖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안도혁은 막 울려 하는 그녀를 황급히 제지했다.
"그냥 긁힌 것 뿐이다."
중수골이 손등 밖으로 튀어나온 게 긁힌 상처라면 어느 정도나 되어야 중상일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지만, 안도혁은 애써 어떠한 내색도 하지 않은 채 뼈를 손 안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하는 마족들도 그 모습에는 오싹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오늘 밥은 다 먹었군.'
'힘만 센 게 아니잖아?'
만약 이 정도의 희생이 있었는데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면 안도혁은 미련 없이 물러났을 것이다.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건 조금 충격이지만, 거기에만 매달리고 있을 만큼 그가 바보는 아니었다.
그러나, 소득이 없지는 않았다.
"흐음."
안도혁은 방금 전의 충격열 때문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마정을 지긋이 응시했다.
그것은 분명 한 변이 1미터인 정방형의 물체였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찌그러진 고무공처럼 한쪽 면이 움푹 패여 있었던 것이다. 두말할 것 없이 안도혁의 주먹이 작렬한 자리였다.
"가능성이 아주 안 보이진 않는군."
안도혁은 에스턴을 불러 루나를 떼어놓고, 다시 몸을 풀었다.
인체에 존재하는, 타격계 기술을 위한 부위는 보통 한정되어 있다. 손가락을 위시한 손 부위 전반, 팔꿈치, 어깨, 발과 무릎, 조금 더 나아가도 이마 정도이다. 총합 열 부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소리지만, 바꿔 말하면······.
'열 번 안에 내가 침몰할까, 이 놈이 백기를 들까?'
안도혁은 다시 한 번 달려들어 왼쪽 주먹을 마정에 작렬시켰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종류의 폭음이 울렸다.
꽈아악
"응?"
"뭐지?"
방금 전에 있었던 충격음은 대포라도 쏘아댄 양 요란하기 그지없던 이전의 소리와는 달랐다. 마치 공기가 압축되고 일그러지는 듯한 음성으로, 공기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게다가 현재 진행형이었다.
꽈아악 끼긱
기묘한 소리가 공기를 타고 흐른다. 어떤 생물의 목소리와도 다르다. 자연적으로 날 수 있는 종류의 사운드가 아니었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눈을 비볐지만, 분명히 그것은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었다.
마정은 비명을 토하고 있었다.
거대한 지하의 공동에서 마정이 내지르는 비명은 벽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자연계에서 찾을 수 없는 왜곡된 소리가 반향음이 되자, 마치 귀신의 울부짖음 같은 음산함이 물씬 흘렀다.
이 상황에서 공포에 얼어붙지 않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이제 울부짖는군."
안도혁은 피가 철철 흐르는 왼손을 어떻게든 꽉 묶어 지혈했다. 일격에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은 오른손보다는 상황이 나았지만, 왼손 역시 당분간은 젓가락도 잡지 못할 정도로 분쇄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낼 수 없었다.
같은 부위에 비슷한 종류의 일격을 2회 맞은 마정은 심각하게 비틀려 있었다. 이미 정사각형이라는 모양은 찾아볼 수 없었고, 구겨진 원통형의 물체 같은 느낌이었다.
안도혁은 직감할 수 있었다.
'앞으로 한두 방이면 부술 수 있다.'
이번엔 어느 부위를 희생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있을 무렵, 어처구니없게도 안도혁은 마정이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 눈, 코, 입, 귀 등 소통에 필수적인 기관은 없었다. 그렇기는커녕 표면이 온통 매끄럽기만 한 흑색이라, 특이한 점을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도혁은 마정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감정까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안 된다고?'
자비를 구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래선 안 돼'라는 정도의 느낌일까.
만약 상대가 입으로 말하던지, 글자로 나타내던지 하는 등의 확실한 모습을 보였다면 안도혁은 망설였을 것이다. 최소한의 흥미가 생겨 주먹을 멈추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엔 조금 상황이 달랐다.
느낌이니 뭐니 해도 결국은 추상적인 감정이다. 실제로 저 마정이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안도혁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기묘하게 비틀린 소리를 토해내고 있긴 하지만, 적어도 현재까지 안도혁에게 마정은 무생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만약 진짜 생물이었다면 미안하게 됐다. 잘 가라.'
피를 철철 흩뿌리며 안도혁의 몸이 몇 바퀴를 회전했다.
선택한 공격 수단은 오른발 족도(足刀)였다.
꽈지직
마정의 옆구리에 안도혁의 발이 꽂혔다.
초인으로 각성한 이후, 이렇게 단단한 물체를 공격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발생할 것 같지는 않았다.
분명한 것은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도혁은 웃을 수만은 없었다.
"······뭐지?"
발이 파고드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저것은 생물이 아니다. 그러나 무생물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정체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수없이 많은 톱니바퀴가 회전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분명 마정은 생명 활동이라는 것을 하고 있진 않았지만, 내부에선 분명 '움직임'이 느껴졌다.
뒤틀려 부서진 마정의 표면에 혈관 같은 무언가가 무수히 튀어나와 있었다. 혈액이 흐르지 않기에 그것을 혈관으로 부를 순 없었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다.
파직 파지직
강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향연이었다. 여기 있는 사람 중 누구도 마정의 진정한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카푸트만이 넌지시 한 마디를 던졌을 뿐이다.
"기계······?"
물론 저런 기계 따윈 없다. 혈관 같은 무언가가 내부에 있고, 몸에서 스파크를 뿜어 내는 기계가 있을 리 없잖은가? 하지만 모두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것 외엔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마정은 죽어가고 있었다.
- 끼긱. 끼기긱.
녹슨 고철 톱니바퀴가 맞물려 비틀리는 것 같은 기묘한 음성이었다.
분명하다. 마정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생물의 소리라고 하긴 어려웠다.
"신기한 물건이군. 별로 관심은 없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이 물건에게 남은 길은 죽음뿐이다. 수리할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 수리는 고사하고 여긴 이것의 작동 원리조차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불현듯 세멜리트가 한 말이 떠올랐다.
- 그게 무슨 물건인지 아느냐······?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하면 안 될 일을 저지른 것만 같았다.
'나는 전혀 모르지만······.'
분명 이 물체가 평범과는 한참 떨어져 있는 것임은 알 수 있었다. 저 내부의 생김새, 기이할 정도로 튼튼한 외골격, 몬스터를 생산하는 능력 등 하나도 평범한 구석이 없다.
내려오는 도중 카푸트에게 마정이 언제부터 있었냐는 물음을 한 적이 있다.
1군단장은 입맛을 쩝 다시며 자신 없는 말투로 말했다.
"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계속 존재했습니다. 일족의 노인들은 신으로 모셔야 한다는 말도 하더군요."
마치 태양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진다는 법칙처럼, 해가 지면 달이 뜬다는 법칙처럼 이것은 오롯이 존재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한 치의 쇠함도 없이.
앞으로 몇백 년의 세월이 더 지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안도혁이 없었더라면 결코 부술 수 없는 물건이란 뜻이다.
그 용에게서 설명이라도 토해내게 만들 것을 그랬나. 안도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담배라도 물려고 했지만, 손가락을 타고 올라오는 끔찍한 고통에 그 단순한 동작조차 힘겨웠다. 담배를 피우길 포기한 안도혁은 마정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라. 애초에 나쁜 짓을 한 건 네 쪽이잖나?'
대륙에 평화를 되찾겠다는 거창한 목적 따위는 없지만, 적어도 몬스터 공장을 파괴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울 수는 있다.
하늘까지 치솟을 듯 뻗은 다리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정을 내리찍었다.
수백 장의 종이를 동시에 구기는 듯한 괴음과 함께, 마정은 그 순간 침묵했다.
콰지지직
터지고, 일그러진 마정은 더 이상 동작하지 않았다. 이제 그것은 마정이 아닌, 고요히 침묵하는 정체불명의 기계장치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마정은 곱게 죽진 않았다.
퍼엉
포탄이 터진 것 같은 폭발이었다. 그 규모는 매우 작았으나, 안도혁이 불길에 휩싸이게 만들 정도의 범위는 되었다.
누군가가 짧은 비명을 흘렸으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안도혁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안도혁의 육체가 튼튼한 것도 있었지만, 애초에 폭발 규모가 크지 않았다. 함정이라 하면 저것보단 더 광범위하고 위력적인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기능이 다하면 폭발하는 장치인가?'
마정의 안을 들여다보자,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약간 그을린 쇳덩어리만이 남아 있을 뿐, 아까까지의 기계 장치 같은 면모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확실해졌다. 마정은 이제 없다.
그 순간, 군단장들이 휘청했다. 마치 현기증이라도 난 듯 비틀거리고 있었다.
"뭐, 뭐지?"
"으응?"
정신을 가장 먼저 차린 것은 역시나 카푸트였다. 1군단장이라는 직함은 허명이 아닌 것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이.
"갑자기 왜 그러나."
"모, 모르겠습니다. 정확히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족쇄가 풀린 듯한 느낌이······."
그 자신도 이 현상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마족들은 죽어버린 마정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저주와도 같은 물건이었지만, 막상 없어지고 나니 시원섭섭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부턴 어떻게 되는가."
"알 수 없습니다만······아마 몬스터가 갑자기 대지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것 같은 기현상은 이제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자연 법칙에 따라 번식하고, 사라질 개체는 사라지겠지요."
"그게 아니라, 너희 마족들은 어떻게 살아가냐는 것이다."
마정을 부숨으로 인해 인간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다만, 그것은 인간 세상으로 한정할 때의 이야기다.
북방의 대침공이라는 위협이 사라진 인간이야 평화롭겠지만, 당장 전력을 소실한 마족 측에선 큰일이 아닐 수 없다. 방패를 잃어버린 것과 다름이 없으니까.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일족이 살아남을 방편은 많습니다. 적어도 10년마다 한 번씩 뿔을 자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힘을 온존할 수 있을 테니까요."
"······힘들겠군."
숨어 살아야 한다는 말과 별반 다르게 들리지 않았다. 지금까진 반 자발적 노예 신세였다면, 지금부터는 추방자 혹은 도망자 신세다. 인간 세상이 번성하고 부유해진다면 이 넓은 북방의 땅을 침략하지 않을 리가 없을 테니까.
"후손들은 저희를 원망할 수도 있겠지요. 아니, 정확히는 당신을 원망할지도 모릅니다. 명목상 저희야 어차피 힘에 굴복한 것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안도혁은 피식 웃었다.
"솔직해서 좋군. 하지만 가급적 날 공격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약간의 담소가 있었지만, 더 지체해서 좋을 것은 없다.
안도혁 일행은 떠나갔다. 마경의 가장 깊은 곳까지 진입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고작 두 달에 지나지 않았다. 역사에 다시 없을 쾌진격으로, 겪지 않은 사람은 믿지 못할 속도였다.
이젠 고철에 지나지 않는 마경을 내버려두고, 지상의 성으로 올라가 옥좌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군단장들이 중얼댔다.
"근데 이제 우리 뭐 먹고 사냐?"
지금까진 마왕의 명에 따라 수동적으로 살아왔지만, 이젠 알아서 살아가야 할 처지다.
아니, 오히려 마왕이 오면 도망쳐야 한다. 마정을 부수게 놔둔 군단장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테니까.
"······몰라. 농사라도 짓던지."
"여기 인간으로 변신하는 법 아는 사람 있냐? 그쪽 영주라도 되면 그럭저럭 편하게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베르곤 놈이 그건 잘 알 텐데.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도망쳐 버려서 알 수가 없네."
"젠장. 뭐 그런 놈이 다 있어? 난 그놈이 언제 도망쳤는지도 몰랐어."
푸념과 한탄, 그리고 미래에 대한 걱정이 사위를 가득 메웠다. 온통 용족의 시체로 가득한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지만, 마족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대륙의 상황은 판이하게 바뀌었다.
추천, 선작,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당
- 작가의말
이번 챕터가 드디어 끝입니다.
어제 못 올려서 죄송합니다. 몸이 아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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