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13)
안도혁의 표정이 썩어들어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이건?'
약과 독은 이음동의어다. 독도 잘 쓰면 약이 되고, 약도 남용하면 독이 된다. 결국 양과 용법을 조절해서 인체에 적절하게 사용하냐 아니냐의 차이니까.
그러나 일단 설명을 계속 들어보기로 했다.
"물론 초인들에겐 독이 통하지 않습니다. 아주 들이붓는 경우 정도를 제외한다면, 일반적인 수준으론 전혀 통하지 않는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러나 단 한 가지, 어떠한 인간이라도 피해갈 수 없는 맹독이 있습니다. 비록 그 사람이 초인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안도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과연 그게 무엇일까. 어느 심산유곡에서 오랫동안 살다 나온 구렁이의 독 같은 거려나.
대답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튀어나왔다.
"용의 피입니다."
"······예?"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용의 피라고?
의심을 불식시키겠다는 듯 아도니스 후작은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그저 단순한 용의 피입니다. 직접적으로 복용하든, 피가 눈 같은 점막에 닿든, 혹은 단순히 피부에 접촉하든 상관없습니다. 이것은 초인을 병상에 눕게 만들 정도의 맹독입니다. 특이한 점은 초인이 아닌 일반인에겐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점입니다."
"일반인에겐 효과가 없습니까?"
"예. 신기하지 않습니까?"
안도혁은 생각에 잠겼다. 일반인에게 효과가 있고 없고는 나중 문제였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얼마 되지 않은 최근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 분명······.'
눈을 감으면 생생하게 떠올랐다. 놈의 꼬리를 이 주먹으로 분쇄하고, 놈이 꼬리를 도마뱀처럼 잘라내고 도망갔던 일이.
그 과정에서 피가 과연 묻지 않았을까?
그럴 리가 없다. 바다에 빠져서 망정이지, 안도혁의 몸보다 더 커다란 꼬리에서 흐르는 출혈량은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과장 좀 보태서 피로 목욕을 할 수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왜?'
그야말로 아무런 신체 징후가 없었다. 몸이 아픈 것도, 머리카락이 자라나는 일도 없다. 언제나 그렇듯 건강 그 자체인 몸으로 살아왔다.
'석진이 녀석도 분명······.'
용족과 검술을 겨루며 그의 몸에도 분명히 피가 튀었음이다. 그런 사생결단의 장에서는 좋든 싫은 상대방의 피가 묻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서석진 역시 피를 맞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득 아도니스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아'하며 손뼉을 쳤다.
"생각해보니 한 가지가 더 있군요. 용의 피로 인해 사경을 헤메는 자들은 모두 비능력자였다는 점입니다. "
생전 처음 듣는 소리가 나왔다.
"비능력자······라고요?"
"그렇습니다. 왜, 초인들은 각자 고유의 능력을 한 가지씩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능력을 깨우치지 못하는 자들도 물론 있지만."
이게 무슨 소리일까. 일행의 백과사전을 돌아보니, 그녀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바람을 일으키고, 누군가는 손을 대지 않고도 물건을 허공에 띄우기도 하죠. 단순히 신체능력만 높다고 초인이라고 불리겠어요?"
아연실색이 된 안도혁이었다.
단언컨대, 그는 그러한 '비현실적'인 일은 한 번도 가능했던 적이 없었다!
표정만 봐도 대충 심리상태를 유추할 수 있게 된 루나가 안도혁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도혁······당신은 아무것도 쓰지 못해요?"
"······오늘 처음 듣는 소리입니다만."
루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어? 그럴 리가 없는데. 당신보다 한참 약한 사람도 가능한 건데······."
"그게 강함이랑 상관이 있습니까?"
"물론이에요. 반사신경, 근력, 체력 모두가 달라요. 기술적인 면에서는 몰라도, 육체 능력만으로 비능력자가 이능을 가진 초인을 압도하는 경우는 전혀 없다구요. 전혀."
아예 못 박듯이 말해버린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그게 사실이자 정설로 굳어진 거겠지.
"왜 지금까지 말해주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물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당연히 알 줄 알았죠."
당연히 몰랐다. 심지어 그가 아는 바로는 서석진 역시 그러한 종류의 이능을 쓴 적이 없었다.
상황이 심각해지는 것을 보자, 아도니스 후작은 창가로 다가가더니 창문을 활짝 열고 소리쳤다.
"안톤 경! 안톤 경 거기 있소?"
창문 밖에서 누군가가 답했다.
"예, 후작님. 무슨 일이십니까?"
"응접실로 올라와 보시겠소?"
잠시 후, 가벼운 차림의 기사 한 명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다지 특징적인 면은 없는 보통의 무인이었다.
"우리 영지의 단 한 명뿐인 초인 기사, 안톤 경이오. 물론 이능은 당연히 쓸 줄 알지요. 안톤 경, 한 번 당신의 이능을 보여줄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안톤은 정신을 집중하더니 검을 뽑아들었다.
아무 장치 없는 평범한 검이었다. 척 보기에도 그저 철덩어리 이상의 물건은 되지 못하는 검.
하지만 검에선 곧 빛이 나기 시작했다. 미약하고 아스라하지만 그것은 분명 붉은 빛이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화르륵
검은 발화했다. 불이 탈 매개가 아무것도 없음에도 표면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올랐던 것이다.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뿌듯한 얼굴의 아도니스, 신기해하는 루나와 에스턴, 그리고 표정이 바위처럼 굳어진 안도혁.
불타는 검을 잠시 바라보던 안톤은 다시 눈을 감았고, 곧이어 화검(火劍)은 평범한 철로 돌아왔다.
"검의 수명이 줄어 자주 쓰지는 않는 기술입니다. 영주님 명이니 어쩔 수 없었지만."
장난스레 말하는 기사를 보며 아도니스는 웃었다.
"알았소. 검 값이야 언제든 더 쳐줌세."
"감사합니다."
둘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지만, 안도혁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심각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아도니스가 말했다.
"안도혁 공, 혹시 안톤 경과 팔씨름을 한 번 해보지 않겠소?"
"······팔씨름 말입니까?"
갑자기 뜬금없는 주제에 안도혁이 당황하고 있을 때, 안톤은 손사래를 쳤다.
"어휴. 전 그런 것 못합니다. 저 분의 팔뚝을 보십시오. 제가 일 초나 버티겠습니까?"
"걱정 마시게. 저래 봬도 저 분은 비능력자니까."
저쪽에서 힘없는 표정으로 안도혁이 고개를 끄덕였고, 비능력자라는 말을 듣자마자 안톤의 태도가 돌변했다.
"아, 그렇습니까?"
비능력자는 절대 신체적으로 이능을 가진 자를 이길 수 없다. 겉보기에는 차이가 없어 보이더라도 내실이 확연히 다른 것이다.
초인들 사이에선 공공연한 말이지만, 초인들은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자를 초인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비능력자나 이능을 가진 자 모두 건물 지붕쯤은 휙휙 날아다니는 수준이지만, 그들 사이에서는 완연한 차별이 존재한다.
난감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던 안도혁은 곧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렸다.
안톤은 속으로 그를 비웃으며 안도혁과 마주했다.
'대단한 일을 했기에 존경했건만, 결국 미숙아였군. 능력도 각성하지 못한 자였다니.'
저 거대한 근육이 아깝다. 그렇게 생각하며 안톤은 안도혁의 손을 맞잡았다.
"잘 부탁합니다."
"······저야말로."
곧이어 안톤은 손아귀에 힘을 콱 주었다. 이 덩치만 큰 떡대에게 잠시나마 경외심을 품었던 과거의 자신에 대한 분노를 약간 담아서.
비능력자 나부랭이가 버틸 힘이 아니었다. 분명 이 덩치는 곧 아파 죽겠다며 비명을 지르겠지.
······라고 생각했었다.
'응?'
안톤은 당황했다. 상대방은 그야말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위를 움켜쥐어도 이것보다 더 단단하진 않겠다 싶은 기분이었다.
무언가가 잘못됐다. 이게 비능력자라고?
"이익!"
안톤은 있는 힘을 다 쏟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손에 핏줄이 선명하게 내비치는 모습은 그가 전력을 다해 이 승부에 임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안도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뭔가가 잘못됐어.'
이어 그는 아주 천천히 손을 잡아 눌렀다.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기 그지없는, 그러나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상대방의 저항 따위는 아예 없다고 생각이 들 만큼 자연스러웠다.
안톤은 악을 쓰며 최대한 버텼다.
아니, 그걸 버텼다고 해야 할까.
무슨 힘을 써도 요지부동이었다. 안톤은 눈앞의 이 괴물이 자신을 아예 가지고 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순간, 그러나 누군가에겐 영겁에 가깝게 느껴진 팔씨름의 장이 끝나자, 얼굴이 시뻘개진 안톤이 소리쳤다.
"왜 거짓말을 한 거요? 힘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소?"
이게 비능력자라고, 이게?
멱살을 잡을 듯한 기세를 뿜어대는 안톤을 보며 안도혁은 파이프를 물었다.
"말했듯이 나는 능력을 쓸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저도 알고 싶습니다만."
"······."
씩씩거리던 안톤은 고개를 홱 돌려 아도니스를 바라보았다.
"영주님. 혹시 이 분에게 대련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아도니스는 눈을 깜빡였다. 이런 상황까지 바란 것은 아니었는데.
추천, 선작,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당
- 작가의말
소제목 선정을 잘못 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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