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1)
더 듣고 싶으냐? 나는 이 이야기가 뭐가 재밌다고 계속 듣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말해서 잘 알겠지만, 내 짧은 여행은 폭력과 파괴로 점철된 길이었다. 남에게 알리기는 커녕, 숨기기에도 급급한 부끄러운 과거란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 일은 더더욱 말하고 싶지 않구나.
······지금까지 말한 것과 별로 다를 것도 없는 통속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도 정말 듣고 싶은 거냐?
"세상의 인식을 단기간에 바꾸기 위해선 어떤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레틴의 물음에 안도혁은 쉽사리 답을 내놓지 못했다. 당장 떠오르는 일이 없다.
"예로부터 정치가들 사이에서 격언처럼 내려오는 말이 있지요. 국가의 내부가 혼란스러우면, 외부의 적을 만들어 사람들의 사고를 그곳에 집중시키는 게 상책이라고. 공통의 적이 생기면, 우매한 민중들은 냄비처럼 끓는 감정을 그쪽으로 쏟아붓기 마련입니다."
"그런 걸 나한테 말해도 되는 거냐?"
레틴은 어깨를 으쓱했다.
"형님도 알고 계시겠지만, 민중은 매우 단순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고, 그 와중에는 현인이라 불릴 만큼 지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의 일일 뿐, 군중에 묻힌다면 사고는 편협할 정도로 단순해집니다. 숲을 가리키면 나무만 보고 있는 수준이 아니라, 숲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는 겁니다."
푸우우
레틴은 연기를 가볍게 내뿜었다. 담배 연기는 왠지 모를 씁쓸함을 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가 중요합니다. 손가락의 방향을 제대로 잡아 줄 군주가 말입니다."
묘한 애환이 담긴 어투였다. 분위기는 살짝 가라앉아 있었다.
안도혁은 주제를 환기시키려는 듯 자신의 담배를 비벼 껐다.
"왜 이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겠군. 이론은 나도 이해했다. 그래서 결론이 뭔가?"
"아주 커다란 사건이 필요한 겁니다. 사람들의 인식 따위를 단숨에 종식시켜버릴 거대한 사건이."
레틴은 안도혁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응접실로 들어온 지 시간이 상당히 지났다. 차는 이미 반쯤 식어 있었지만, 마시기에 딱 좋은 온도로 바뀌어 있었다.
"형님께서 전쟁을 종식시켜주셔야 합니다."
"······뭐라고?"
갑자기 스케일이 다른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안도혁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레틴의 말이 이어졌다.
"전선에 가셔서, 북방의 침략을 모두 격퇴해 주십시오. 그것으로 형님의 주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갈 겁니다."
"잠깐, 잠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안도혁에게 이는 상식 밖의 일이었다.
"자꾸 정천 정천 하니까 날 무적 비슷한 걸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그저 한 명의 인간이다.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칼로 찌르면 상처가 나는 평범한 인간이란 말이다."
"뭐라는 겁니까. 그 근육엔 총알도 안 박히잖아요."
"······."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논리적 근거가 되진 못한다.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내 위상이 아무리 높아진들 수인족들의 처우가 높아질 리는 없을 거다. 그렇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나?"
"맞습니다. 그렇기에 형님은 지금 모인 수인족들을 모두 데리고 마경을 제패하셔야 합니다. 이 계획이 성공하는 기점에 수인족들의 사회적 지위는 복구됩니다. 기피해야 할 대상에서, 목숨을 걸고 제국을 위해 싸운 영웅들로."
천진난만하게 엄청난 소리를 하고 있다.
기가 막힌 안도혁은 기어이 한 마디를 내뱉고야 말았다.
"······너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니냐?"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 어디까지나 상식적으로는요. 하지만 저는 형님과 백일 가량을 마경에 있었습니다. 제가 말한 게 아주 허황된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
세상을 두부처럼 대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건만, 의동생은 두부로 전골을 해 오라는 소리를 하고 있다.
더욱 짜증나는 것은 그것이 현실적으로 아예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번 일이 끝나면 한적한 곳으로 떠나 살아야겠다. 바깥 세상에 있어서 좋은 점이 없군.'
어째 피곤한 일만 계속되는 기분이다. 비록 은혜를 갚기 위한 일이라고는 하나, 이쯤 되면 본말전도가 아닐까.
안도혁의 속도 모른 채 레틴은 떠들어댔다.
"제국 전체의 수인족을 모이게 하는 공고를 붙이겠습니다. 이러이러한 일로 정천 경께서 마경을 정벌하러 원정을 떠나신다는 공고를."
"타란토스엔 수인족이 안 살잖나."
"통계에만 안 잡힐 뿐이지, 재야에 은거하고 있는 사람이 정말 없을까요? 어쩌면 그 희귀하다는 인어들도 몇 명 있을지 모르는 일이죠."
"······좋을 대로 해라."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일이었다.
"야, 이 하등 쓸모라고는 없는 환자 새끼야아아아아!!!"
선생은 바락바락 소리지르며 아르키피라를 걷어찼다. 비록 용족이라고는 하지만 전사의 힘을 가지지 않았기에 현저히 약한 그 발길질 앞에, 아르키피라는 움츠리며 연신 고개를 숙여댔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해? 죄송, 그래. 죄송하다 이거지!"
선생은 잠시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곧 흑색 광택이 반짝반짝하게 도는 막대기 비슷한 물건을 가져왔다.
인세에는 저러한 사물이 없다. 아니, 대륙 어디를 뒤져보아도 저와 같은 물건은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아르키피라는 정체를 알고 있었고, 곧 그의 얼굴은 머리카락만큼이나 새파랗게 질렸다.
"아니, 30mm 대물 저격······그게 왜 병원에 있습니까?!"
"원래는 장식용이다만, 방금 용도가 바뀌었다! 너 같은 머저리 새끼들 대가리를 날려버리는 걸로!"
탄환을 막 장전하려는 선생. 기겁한 간호사들이 하나 둘 달려들어 선생의 사지를 붙잡았다.
"진정하세요!"
"진짜 죽일 셈이세요?!"
간호사라 해도 용족이다. 완력이 약한 선생이 수 명의 힘을 당해내진 못했다.
"놔! 이거 안 놔! 너희들 월급 깎는다?"
"아, 치사하게 왜 그러세요!"
"빨리 놓으라고! 방아쇠만 당기면 된다니까?!"
간호사와 선생이 옥신각신하던 중, 아르키피라의 움직임이 멎었다.
아르키피라의 얼굴이 흙빛이 되어 가고 있었다. 눈이 데굴데굴 구르더니, 실핏줄이 터진 듯 새빨갛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내, 그는 무릎을 꿇듯 주저앉았다.
"웨에에엑!!"
아르키피라는 피를 토했다. 단순한 각혈이 아니라, 마치 와인병의 마개를 따고 거꾸로 뒤집은 듯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이 사실은 한 가지를 의미한다. 선생은 머리를 싸쥐며 비명을 질렀다.
"또냐, 또야? 회복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당장이라도 막대기를 휘두르고 싶었지만, 선생은 엄연한 의사였다. 폭력을 행사하는 대신 선생은 간호사들에게 소리쳤다.
"저 새끼 용의 모습으로 변하기 전에 수조에 쳐넣어! 3번 수조가 비었으니 그리로!"
"네, 선생님!"
"자네는 가서 수술 도구 소독해오고, 자네는 혈액 탱크 잔여분 확인하고 연결 준비하게! 시간이 없어, 서둘러!"
"알겠습니다!"
간호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선생은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머리를 벅벅 긁으며 신경질적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의사 때려치우던지 해야지!"
살얼음판 위라도 그보다 더 긴장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또 싸우러 나가겠다고?"
"으음."
이미 손수건도 두 장이나 준비해 왔고, 위로의 말도 건넬 준비가 되었다.
그러나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고 볼 수는 없다. 애초에 만반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 상황에서 통용될 리가 없다.
"오빠, 이리 와서 앉아 봐."
"······."
"빨리."
앉으라는 말이 이렇게나 무겁게 들려올 수 있는 것인지 안도혁은 오늘 처음 깨달았다.
용왕과 싸움을 벌이는 것보다 지금이 훨씬 더 무서웠다. 머리카락이라곤 한 점도 없는 머리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간신히 자리에 앉자, 루나가 손을 잡아왔다.
"있잖아. 나 오빠 정말 좋아해. 알고 있어?"
"······으응."
알고는 있지만, 저 말을 상대에게 직접 듣는 것은 상당히 낯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면서 힘을 함부로 남용하지 않아. 사람을 대함에 있어 신분이나 직업의 고하로 구분짓지 않지. 말은 항상 진중하게, 입 밖으로 내뱉은 것보다 생각을 우선하지. 그렇기에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잘 하지 않아."
칭찬의 연속이 이어졌다. 비꼬는 어투는 전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안심하면 바보다. 그리고 안도혁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런데 말이야."
루나가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왜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건데?"
쿵
뒤통수를 슬렛지 해머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안도혁은 갑자기 들어오는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 알아. 오빠 엄청나게 강한 거. 아마 이번에도 아무렇지 않게 일을 해결하고, 별 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돌아와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있으리라는 걸. 이제 그 패턴에도 익숙해졌어."
"······."
"그런데 있잖아. 그렇다고 내가 걱정을 안 하는 줄 알아? 이 말을 도대체 몇 번이나 해야 하는데?"
어느새 루나의 눈에선 눈물이 한 두 방울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안도혁은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아아, 이런.'
세상을 구하겠다는 거창한 목표는 없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평온한 일상이었다. 한가로이 일상을 보내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목가적인 나날을 보내는 것.
그 평온한 일상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이 울고 있다. 오로지 안도혁 한 사람 때문에.
"내가,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가슴 졸이며 살아야 해. 또 기다리고만 있으라고?"
안도혁은 손수건을 펑펑 우는 루나의 얼굴을 닦았다. 아주 조심스럽지만 다급한 손동작이였다.
"나도 이제 그만 울고 싶어. 웃으면서 살고 싶다고. 그, 그런 거, 그런 거 하나 못해줘······?"
방 안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히끅거리는 울음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안도혁은 이를 악물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비수처럼 박혀왔다.
'정천이니 뭐니 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여자 한 명 지키지 못하는 것을.'
루나는 발작하듯 소리쳤다.
"이번엔 또 얼마나 기다리게 할 건데. 반년? 1년? 아니, 2년? 그 동안 내가 속이 타 죽어도 괜찮은 거야?"
안도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루나를 끌어안았다.
가슴에서 가벼운 저항이 느껴졌다.
"놔, 안지 마.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긴 하는 거냐고."
그러나 안도혁은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그녀가 다치지는 않을 만큼, 그러나 빠져나오지도 못할 만큼의 힘을 유지하며.
"나도 조금은 생각해 봤다. 이 여정이 네게 얼마나 부담이 될 것인지 말이다."
"······그런 사람이 그딴 결정을 내린단 밀이야?"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안도혁은 무릎을 꿇고 시선의 높이를 맞추었다.
"나와 함께 가 주지 않겠나?"
"······마경으로 가는 원정을?"
안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너는 내 안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자라나 버렸다. 네가 없으면 나도 쓸쓸할 것이며, 네가 사라지면 가슴에 공허함이 맴돌 것이다. 그러니, 나와 함께 가주지 않겠나."
루나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지금 이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그 위험한 장소에 신부를 데려가겠단 말야?"
"맹세한다. 네겐 털끝만큼의 상처도 입히지 않겠다. 내 온 힘과 마음을 담아, 너 하나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겠다. 그것으론 부족할까?"
루나는 턱을 들었다. 어느새 울음은 멎어 있었다.
"대가는?"
"······응?"
"날 지켜주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오빠가 그런 걸 힘들어할 사람이 아니란 건 나도 잘 알아."
"······."
사실 물리적으로만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원정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데, 야전을 계속 따라다니는 보상이 있어야 할 것 아니에요? 안 그래요, 정천 경?"
"······내가 걸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다."
안도혁은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굳은 표정으로 루나의 눈을 직시했다.
"앞으로 남은 평생 널 지키겠다. 내 등으로 모든 세상의 풍파를 막아 주겠다. 세상 모두가 등을 돌려도 나만은 네 편임이 될 것이며, 또한 너 이외의 여자는 바라보지도 않을 것이다."
마지막 말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말해야만 했다.
"너만이 내 반쪽이다."
"······혹시 그거, 청혼?"
안도혁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의 귀는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풉
루나는 깔깔 웃었다.
"와, 타이밍 봐. 이렇게 분위기 없는 곳에서, 아무 전조도 없이 청혼이라니. 진짜······."
하지만 말투와는 달리 그녀의 목소리 톤은 밝아져 있었다.
루나는 무릎을 꿇은 안도혁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진짜 당신답네요.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죠?"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 질문이었다. 안도혁은 그녀가 어떤 의도로 말하는지 완벽히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나름대로 해답을 내놓았다.
"내 마음은 바위처럼 굳건하다."
"바위를 두부처럼 쥐어 짜는 사람한테 듣고 싶진 않네."
"······그럼 태양처럼."
"아하하핫!"
루나는 유쾌하게 웃었다.
살얼음판은 어느새 녹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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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슬럼프가 왔나. 왜 이렇게 글이 안 써지나.
슬럼프가 올 만큼 실력이 좋은 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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