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9)
파죽지세. 그 이상 이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선두에 달려나가는 안도혁, 그 뒤를 따르는 엘프 검사의 뒤로 수많은 수인족들이 몬스터들을 도살하고 있었다.
발을 멈추고 교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달려나가며 몬스터들을 베어 넘겼던 것이다.
수인은 육체를 변형할 수 있다. 완전한 짐승의 형태부터, 신체의 일부만 짐승화하는 수준까지 조절이 가능하다. 허나 완벽한 인간의 육체로 변하는 것은 무리이며, 그 몸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동물의 생김새가 남아 있다.
또한 본디 전투에 들어가면 짐승의 형태로 싸우는 것이 일반적인 수인족이다. 연약한 인간의 모습보다는, 동물의 육체가 훨씬 전투력이 높기 때문이다.
이번 전투에서 수인족들은 그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와지직
안면부만 짐승의 형태로 변한 호랑이 수인족이 적의 목을 물어 꺾는다.
우두둑
양 팔만 코끼리로 변한 수인족이 강렬한 펀치로 적의 얼굴을 뭉갠다.
완연한 짐승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개개인의 전투력은 물론 강해진다. 허나 각기 다른 동물인 이상 체급과 리치에서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아군에 의한 쓸데없는 피해를 만들 가능성이 있다. 즉, 집단으로 싸우면 짐승의 모습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
수인족의 전투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500의 군세는 안도혁의 뒤를 따라 싸웠으며, 그 와중에 사망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아직 청소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토끼 수인 여성도 그 날렵함으로 적들에게 유효타를 먹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안도혁이 선두에서 절대 다수의 공세를 받아내고 있기에 가능한 공적이었다. 수인족들만으로 이런 무위를 보일 수 있다면, 그들이 용족의 노예가 되는 일 따윈 없었을 것이다.
불리한 상황에 처할라 치면, 어김없이 투창이 날아왔다.
콰직
"으앗."
방금 전까지 싸우던 몬스터의 목 윗부분이 투창에 의해 깨끗하게 날아갔다. 수인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전투에 임했다.
최전방의 전투가 끝난 이후, 몬스터를 박살냈던 목창은 회수되었다. 병사들이 힘껏 몬스터의 시체를 뒤져 가며 창을 찾아온 것이다. 허나 그 중 병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수준의 목창은 일부였다. 쏘아진 시점에 대부분의 창은 그 수명을 다해, 나뭇조각으로 변해 버렸으니까.
허나 그 일부의 목창만으로도 아군을 지원하는 것은 충분했다.
의외로 몬스터들은 최전방처럼 물밀듯이 밀려오지는 않았다. 적의 숫자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안도혁이 혼자 박살을 내고 다닌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 있었다.
'전방이 가장 힘든 전장임은 맞겠지만, 이렇게 큰 차이가 난다고?'
파죽지세에는 그런 이면이 있었다. 세상 모든 몬스터를 싹 다 모아온 듯했던 최전방과는 달리, 이곳에 있는 것은 평범한 수준의 몬스터 무리였다. 시초의 의식 떄보다도 훨씬 적다. 그런 상황이니 안도혁이 일일이 몬스터에게 투창을 날릴 여유도 생겼던 것이다.
한참 동안 전투에 임하던 안도혁은 특이한 현상을 발견했다.
'저건 뭐지?'
모든 수인족이 발하는 것은 아니었다. 500에 달하는 수인족 중에서도 열 명도 되지 않는 일부에게서 기현상이 나타났다.
그 중엔 베르시엘라도 있었다.
"크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베르시엘라는 호랑이의 발톱으로 적을 찢어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발톱이 아니었다.
발톱 끝에서 샛노란 빛과 함께 유형의 기운이 뿜어져 나와, 마치 발톱이 길어진 것 같은 모습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적을 격살하기에 아주 안성맞춤인 위력을 자아내고 있었다.
초인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안도혁은 인간 이외의 종족이 초인이 되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저기서 검을 휘두르는 엘프 검사 정도를 제외한다면.
한 차례 전투가 종료되고, 숨을 몰아쉬는 베르시엘라에게 다가가 안도혁은 현상에 대해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답했다.
"잘 알려지지는 않은 사실이지만, 육체적으로 어느 정도 이상 단련된 수인족은 몸에 흐르는 기(氣)를 유형화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신체 능력을 강화하는 것으로도, 무기처럼 뽑아내서 쓰는 것도 가능하지요."
"······?"
도대체 뭔 소리인지 안도혁이 알 턱이 없었다. 기가 뭘 어쨌다고?
전투력 면에서는 한참 약자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백과사전을 불러와 물었다.
"그런 건 나도 모르겠어."
"네가 모른단 말인가?"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루나는 귀족 집안의 여식답게 상류사회의 전반적인 지식은 물론, 세상에 대한 온갖 정보를 다 가지고 있었다. 추적술조차 행할 수 있는 팔방미인형 인간인 것이다. 나쁘게 말하면 한쪽으로 그리 전문적인 면모는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런 그녀가 모른다는 것은 이 여행 중 처음이었다.
상당히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온몸으로 행하고 있는 안도혁을 보며 루나는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저게 무슨 말인지는 알아. 그런데 원리를 밝혀낼 수가 없다는 거야."
"원리라니?"
"수인족이 말하는 기라는 건 아마 생명력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 하지만, 오빠는 생명력이란 게 뭔지 정의할 수 있어? 그리고 생명력을 몸으로 느낄 수 있어?"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살아 있는 이상, 항상 맥박은 뜨겁게 뛰고 있다. 숨을 쉬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밥을 먹는 것도, 배변 행위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생명력이란 어떤 범주에 두어야 하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원리를 밝혀내려고 노력했지만, 제대로 파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저 수인족이 가지고 있는 특성 중 하나라고만 막연하게 생각할 뿐이지."
"그런가."
어차피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저런 능력이 있으면 편리하긴 하겠지만, 거기까지 바라는 것은 양심이 없으리라. 강철조차 분쇄할 튼튼한 주먹이 있는데, 고작 그런 장난감이 무슨 의미일까.
그 때, 안도혁의 머릿속에 한 단어가 스치고 지나갔다.
'벌레.'
아르키피라의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건 어려웠다. 거짓말을 했다 한들, 진실 속에 거짓말 한 스푼을 섞은 정도일 것이다.
세상 모든 생물은 벌레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벌레는 일정 이상 성장할 시, 고유의 능력을 각성하게 된다.
'그렇다면 수인족들은 모두 같은 종류의 벌레를 가지고 있는 건가.'
하지만 이 말은 통용되기가 애매하다. 수인족들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그들의 무력은 일반적인 초인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능 발휘가 가능하다면 초인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일반화일지도 모르지만, 유일무이한 '요정 초인'인 에스턴의 신체능력은 일반적인 초인보다 훨씬 높았다. 안도혁이 판단이지만, 신체능력만 따지면 시초의 의식 때 만난 다프텐시아 제국의 초인들보다도 말이다.
그렇다면 원래부터 인간보다 훨씬 더 민첩한 수인족들이 초인이 된다면, 그 힘은 인간 따위와 비교할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아니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안도혁은 잘 알지도 못하는 정보를 가지고 괜한 추측을 하는 것을 접어두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하등 의미 없는 일이다. 내가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관심을 두어 봐야 귀찮기만 한 일이다.
전투는 이미 소강 상태였다. 주변에 몬스터들의 시체가 즐비했지만, 앞으로 더 공격이 들어올 것 같지는 않았다. 안도혁은 모두에게 짐을 풀고 재정비할 것을 명했다.
막 담배 한 대를 물려던 찰나, 루나가 그의 팔을 찰싹 때렸다.
"일단 좀 씻어."
"씻으라고?"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투의 표정에, 루나는 질린 모습으로 손거울을 내밀었다.
전장에 뭔 손거울인지 따위를 중얼대며 자신의 모습을 보자, 상당히 가관이었다.
"······."
안도혁은 선두에서 싸웠다. 게다가 몰려오는 몬스터들 역시 대부분 그가 처리했다. 아무도 그의 무공을 의심하지 못할 만큼 초월적인 무위를 선보였다.
그 사실이 문제였다.
"으엑. 역겹지 않아?"
루나의 말대로였다.
안도혁의 몸에서 피부색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의 몸은 몬스터의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으며, 그나마도 천천히 굳기 시작해 피딱지가 되어 가고 있었다. 거기까지라면 그나마 인간적이지만, 내장 조각이라던지 하는 것들도 같이 뒤집어쓰고 있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창자 조각이 어깨에 얹혀 있는 걸 본 안도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신이 없긴 했나 보군.'
전장에서 이러한 일은 일상다반사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욱 심했다.
한참 동안 웃고 있는 걸 본 루나가 소리를 빽 질렀다.
"아니, 뭐 하냐고!"
"간다, 가."
근처에 강가 정도는 있다. 이미 수인족 중 상당수는 그곳에 가서 더러워진 몸을 씻어내는 중이었다.
더러워진 옷을 벗어던진 안도혁은 물가로 천천히 다가갔다.
하나 둘 시선이 모인다. 너나 할 것 없이 안도혁을 바라보았다.
"우와."
"세상에나."
원래부터 어마어마한 근육이라는 것 정도는 다들 알고 있었지만, 옷을 벗으니 그 실체가 여실히 드러났다. 조각상을 데려다 놔도 이것보단 더 현실적이겠다 싶은, 그야말로 조각 같지도 않은 육체가 세상에 모습을 보였다.
몇몇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아래쪽을.
옷이 더러워지는 게 상, 하의를 가리고 일어나진 않는다. 바지도 속옷도 모두 핏물에 잠겨 있어, 안도혁은 그것까지 벗어던졌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하반신 전체가 드러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모두가 보았고, 모두가 감탄하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나 저쪽에서 먼저 멱을 감고 있던 에스턴은 고개를 몇 번더 끄덕였다.
"과연, 정천 경······."
유일한 오점이 있다면, 털이 하나도 없었단 것이다.
휘적휘적 걸어가는 안도혁의 등판을 루나가 짝 소리가 나게 쳤다.
"속옷까지 다 벗을 필요 있어?! 노출증이야? 여기 남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쪽을 멍하니 바라보며 침을 뚝뚝 흘리는 베르시엘라를 흘겨보며, 루나는 서둘러 수건으로 안도혁의 몸을 가렸다.
"아니, 여기 전장인데······."
전장에서 남녀 구분이 어디 있나. 멱을 감는 사람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 몸을 씻어내고 있었다.
물론 그 논리가 통용되지는 않았다.
"그럼 오빠는 내가 여기서 다 벗어도 좋아? 외간 남자 앞에서 맨살을 드러내고 다녀도?"
"아, 그건 좀."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며 안도혁은 몇 마디를 덧붙였으나, 등짝만 몇 대 더 얻어맞을 뿐이었다.
짝 짝
"남녀 구별 없는 것 좋아하시네. 빨리 안 입냐고! 아니면 남들 안 보는 곳으로 가던가!"
"······예."
정천 경은 즉각 속옷을 걸쳤다.
물로 온몸을 벅벅 닦아내는 안도혁의 귀에 수인족들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정천 경은 공처가시군."
"그런 점도 있으니 사람다우신걸?"
저게 칭찬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안도혁은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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