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 변경(2)
육체적으로 여정이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는 곳마다 대부분 밤이슬을 피할 숙소가 있고, 배를 채울 식당이 있다.
게다가 그들은 잘 뚫린 대로를 따라 움직였다. 산길에서 이동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편리함이다.
다만 움직인 거리가 커다란 나라 하나를 종단할 거리이며, 여정은 몇 달이나 걸렸고, 게다가 그걸 두 다리만으로 돌파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보통 사람이라면 여행 중간에 골병이 들어 골골댔을 여정이나, 여기 있는 두 사람에게는 그다지 대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신록의 계절이 개화한 어느 날, 자그마한 동산 위에 올라선 안도혁은 소리쳤다.
“드디어 도착했다!”
지도와 비교해 봐도 틀림없다. 저 멀리 보이는 것은 분명 아스란 왕국과 하프렌 공화국을 나누는 국경지대다.
마치 축포라도 쏘듯 연기를 뻑뻑 뿜어대는 안도혁의 모습에 서석진은 웃었다.
“힘들긴 했지?”
“힘들다기보단 귀찮은 일이 너무 많았지.”
“동물원 원숭이가 이런 기분일까?”
“구경거리가 안 된 날이 더 드물었지.”
“음식점에서 주문했는데 한 시간이 지나도록 메뉴가 안 나온 날 기억나?”
“주문을 받은 놈을 하늘로 열댓 번 던졌던 것은 기억나는군.”
“술집에서 포도주를 주문했는데 포도 찌꺼기를 던져줬던 일은?”
“그땐 네가 칼을 뽑았잖아.”
생각도 못 해본 종류의 고생들이었다.
그걸 다 뚫고 여기까지 왔다. 두 사람은 감개무량해져 잠시 눈을 감았다.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통과점에 도달한다.
꽁초를 갈무리한 안도혁은 짐을 뒤지더니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자, 그러면 일정을 제대로 정리해 보자고.”
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세웠던 계획이다. 세부사항이 살짝 바뀔 수는 있을지언정, 큰 틀에서는 절대 벗어나면 안 된다.
“일단 아스란 왕국에 들어왔으니, 경매가 열리는 동네로 가야 돼.”
안도혁의 손은 아스란 왕국 지도의 정중앙에 위치한, 수도 세르노사를 가리켰다.
“알렉스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수도에 있는 로판 상회 지부에만 도착하면 거기서부턴 숙소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했지?”
“그랬을걸?”
“갑자기 하늘에서 운석이라도 떨어지지 않고서야 거기까지 못 갈 리는 없지.”
“그렇지. 그러면 준비 과정은 거의 해결된 셈이지.”
“그럼, 우리가 직면할지도 모르는 문제점은 세 개다.”
안도혁은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첫 번째로, 요정이라는 것들의 입찰가가 터무니없이 높을 가능성이 있다.”
용족만큼은 아니지만, 요정족은 신비에 싸여 있는 종족이다. 평생 요정을 만나본 사람보다 안 만나본 사람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적다. 이는 대륙 서부에 있는 요정의 숲에서 도저히 나오지 않는 요정의 특성 때문이다.
안도혁과 서석진이 경매를 위해 들고 온 돈은 상당했다. 누군가가 그들의 돈주머니를 열어보게 된다면, 억 소리와 함께 이 액수가 현실이 맞나를 고민할 정도였다.
그러나, 진짜 부자가 얼마만큼의 돈을 노예에 쏟아붓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알렉스도 요정의 낙찰가는 항상 다르다며 난색을 표했다.
“두 번째로, 이게 더 심각한데, 요정이 아예 없을 확률도 있지.”
그렇다면 이 경매 자체에 참가하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들이 다른 노예를 사서 뭘 하겠는가.
“그럼 세 번째는 뭔데?”
“마지막 가능성은, 천재지변이나 기타 우환이 생겨서 경매 자체가 무산되거나, 아예 열리지 않을 경우다.”
서석진은 안도혁의 등을 팡 쳤다.
“너무 걱정이 많은 거 아냐? 특히 마지막은 제외하고 봐도 좋을 것 같은데?”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게 없지. 안 그러냐?”
“그건······.”
만약 여기서 요정이라는 족속을 만나지 못하게 되면 상황이 심각해진다. 서석진은 표정이 굳었지만, 애써 입가에 웃음을 띄웠다.
“우선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겠네. 여기서 고민하고 있어도 뚜렷한 해결책은 없을 테니.”
그건 맞는 말이었다. 안도혁은 자신이 쓸데없이 민감해졌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 난리를 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는 없지!’
가끔씩 그는 꿈을 꾼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멋들어지게 자라나서 열심히 관리하는 꿈을.
다만, 꿈이란 게 다 그렇듯 끝은 비정하다. 눈을 뜨면 공허함이 모근을 뒤덮는다는 사실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요즘은 꿈의 빈도가 늘었다. 갈망하는 마음이 늘었다는 것이다.
안도혁은 철구(鐵球)같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다시 한 번 내 머리에 푸르름을.’
그러나, 그는 자신의 친구가 하반신이 쇠처럼 단단해지는 꿈을 매일같이 꾸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가끔 예외도 있지만, 귀족의 삶은 대체로 풍족하다. 특히나 귀족정인 하프렌 공화국의 경우, 다른 나라보다 귀족의 힘이 상당히 크다.
귀족들은 태어날 때부터 입을 것, 먹을 것에 대한 걱정이 전혀 없다. 옷 입는 것 하나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할 필요가 없으며, 많은 음식을 먹기 위해 음식을 먹고 토하는 사람도 있는 지경이다.
귀족들은 그러한 자신의 지위를 잃어버리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삼시 세끼에 간식에 야식까지 챙겨 먹을 수 있고, 손가락질만 하면 저 물건이 내 것이 되는 세상을 잃어버리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위 유지를 위해선 가문의 세를 공고히 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에 가장 흔하게 이용되는 것은 정략혼이다.
남자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귀족 여성 쪽의 혼인은 보통 자유롭지 못했다. 좋아하는 사람과 맺어지지 못하는 것은 보통이고, 아버지뻘 되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는 것은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다. 거기까지면 다행일지도 모르지만, 혼인 후 아이를 낳지 못하면 사람 취급도 못 받는 경우도 상당했다.
루나는 이러한 현실에 개탄했다.
‘정말 마음에 안 들어.’
가끔 하늘을 나는 새를 동경했다. 날개가 있어 날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다른 귀족들과 달랐다. 온갖 호들갑을 떨며 사교계에 데뷔하고, 몸의 치장을 밥 먹는 것보다 중요시하는 귀족들의 생태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게 그렇게나 중요할까?’
흥미조차 가지 않는 일에 심력을 쏟고 싶지 않았다. 루나의 관심사는 따로 있었다.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어.’
어릴 때 읽은 군웅들의 전기, 모험가들의 야담은 그녀에게 부푼 꿈을 심어 주었다.
몸 하나로 세상을 질타하며, 누구보다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동경했다.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오지 않을까.’
그래서 그녀는 학식을 익히고, 기술을 배웠다. 몸의 단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언젠가 다가올 그 날을 위해서.
스무 살이 될 무렵, 루나는 현실을 깨달았다.
‘기회 따윈 없구나.’
애초에 외출도 자유롭지 못한 신세에 무엇을 기대했을까.
성품이 좋은 부친 밑에서 태어난 것은 그나마 행운이었다. 묵살해 버리면 그만인 그녀의 의견 하나하나를 성심성의껏 들어주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것이 목마른 사슴의 갈증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떼를 써서 이번 여행에 오기는 했지만······.
“아가씨?”
“······.”
“아가씨, 이제 곧 저희 차례입니다.”
호위 기사, 로우가의 말에 화들짝 상념에서 깨어난 루나는 숨을 살짝 골랐다.
“아, 미안해요. 잠시 생각에 빠져서.”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신지요?”
“괜찮아요. 저 운동 잘하는 거 아시죠?”
과장되게 팔을 굽혀 보이자 로우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란 왕국은 그리 큰 나라는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소국의 규모에 가까웠다. 저 먼 북동쪽, 타란토스 제국의 끄트머리에서 연방을 세운 소국들 정도를 제외한다면 대륙에서 가장 작은 국가나 다름없었다.
그런 나라의 수도인 세르노사였지만, 성벽의 규모는 어마어마하게 웅장했다. 루나는 하늘 높이 솟은 성곽의 높이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하늘에도 닿겠어요.”
로우가가 말했다.
“지금은 실전된 축성 기술이 사용되었다고 하더군요. 이곳 건축가들도 가끔 보수 정도만 할 뿐, 성벽 자체에는 손댈 능력이 없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런가요.”
하프렌 공화국에선 저 높이의 반만 한 건물도 찾기 어렵다.
잠시 후, 뻐드렁니가 인상적인 성벽 관리인이 그들 앞을 막아섰다.
“신분을 증명할 것을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마차에 앉아 있는 루나 대신, 로우가가 그들의 신분 증명서와, 이전 도시를 지나온 것을 증명하는 통과증을 건넸다. 자세히 훑어보던 관리인은 자신의 뒤쪽에 가볍게 손짓했고, 루나 일행은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루나는 살짝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저것도 내가 할 수 있는데.’
토라지기도 잠시, 성벽 안으로 들어온 루나는 탄성을 내질렀다.
“어머.”
성벽 안 건물들의 대부분은 하얀색이었다. 색을 절제한다는 미학을 느낄 수도 있었지만, 반대로 우중충하다는 느낌도 강하게 들 법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건물의 배색만 볼 때의 얘기였다.
마침 태양이 하늘 가운데에서 가장 빛날 시간이다. 대지를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빛은 도시 전체를 천천히 물들여, 백색의 도시에 색을 입힌다.
태양의 빛에 적셔진 백색의 도시는 이윽고 황금의 빛을 띄게 된다.
아스란 왕국 수도, 세르노사의 별명은 황금 왕관이다. 루나는 자연과 융합한 도시의 정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여행을 떠나길 정말 잘한 것 같아!’
일행은 대로변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바로 옆 나라에 불과하지만, 하르펜 공화국과 아스란 왕국의 문화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사람들의 복색, 건물 양식, 길거리의 상태까지.
여기저기 둘러보며 눈을 반짝이던 루나의 눈에, 문득 한 사람이 보였다.
“잠깐 멈춰 줘요.”
마부가 말을 멈추자, 루나는 누가 제지할 틈도 없이 훌쩍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온통 꾀죄죄한 채 구걸하고 있는 거지 소년이었다.
“세상에나.”
피죽도 못 먹은 듯 몰골은 앙상했고,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 눈은 회색으로 물들었다.
루나는 품속의 지갑을 꺼냈다. 의도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인다.
로우가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가씨, 일일이 적선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자들입니다. 스스로의 다리로 일어날 의지도 없는 족속들에 불과합니다.”
루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해도, 저는 지금 이 사람을 돕고 싶어요. 그것만으론 안 되는 일인가요?”
“······.”
대답 대신 로우가는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루나는 반짝이는 금화를 꺼내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움직이지도 않는 소년이었지만, 그의 눈동자에 금화는 분명히 비치고 있었다.
그때였다.
팟
“꺅.”
순식간이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손이 루나의 손목을 잽싸게 후려치더니, 지갑을 빼앗아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미처 반응도 하지 못한 루나의 얼굴이 멍해졌다.
도둑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골목 옆 그림자에 숨어 있어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제 은신처로 돌아가기만 하면 그만이다.
물론, 그건 너무 큰 행운을 기대하는 것이었다.
빠각
“크악!”
귀족 가문의 여식, 그것도 집정관의 여식을 호위하는 기사의 자리는 허투루 볼 것이 아니었다. 도둑이 지갑을 빼앗은 지 세 호흡도 지나지 않아, 로우가가 도둑의 머리를 땅바닥에 거세게 쳐박았다.
머리에서 피가 터져 꿈틀거리는 도둑을 본 로우가의 검이 뽑혀 나왔다.
“도둑놈이.”
루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안 돼!”
그녀의 목소리보다 먼저, 새하얀 백광이 냉혹하게 바람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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