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2)
베르시엘라가 무리에 들어오자, 몇몇 수인족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놀랐다.
"베르시엘라 티그리스 님?"
"어떻게 이런 곳에······."
이야기가 이어지려던 차, 사내의 호통이 들려왔다.
"뭘 그리 궁시렁거리냐. 빨리빨리 안 움직여?!"
"······."
수인족들은 입을 다물었다. 사람이 반가운 건 반가운 거지만, 그보다는 눈앞의 매가 더 무서운 것이 현실이었다.
사내는 힘없이 끌려오는 수인족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귀찮아 죽겠네.'
천룡족 사내, 그는 아르키피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약 1년에 가까운 병상 생활 끝에 아르키피라는 완쾌되었다.
환자가 끊임없는 삶의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모든 것은 선생의 기적 같은 의술 덕분이었다.
아르키피라를 내보내며 선생은 담배를 뻑뻑 피웠다.
"내 이런 생고생은 정말 오랜만에 해 보는군. 다신 특이점에게 까불지 말아요."
"죄송합니다."
그놈이 특이점이란 걸 내가 알았나. 인간인 것도 얼마 전에 알았는데. 아르키피라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그걸 선생 앞에서 말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아르키피라는 현재 기분이 꽤 좋은 상태였다. 벌레가 성장하여 신체 능력과 벌레의 힘이 상승했으니까.
혹여나 특이점과의 이러한 접촉을 장기적으로 할 수 있으면 벌레도 계속 성장할 수 있겠냐고 묻자, 선생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아르키피라를 바라보았다.
"학창 시절 때 공부 안 했지?"
"······그건."
솔직히 공부하기보단 놀러 다녔지. 아르키피라가 난처한 듯 웃자, 선생은 소리를 빽 질렀다.
"당신은 지금 운이 엄청나게 좋은 거야! 보통은 간신히 멀쩡한 상태로 돌아오던지, 아니면 죽는다! 벌레가 성장하는 케이스는 정말 극히 드물어! 지금 죽다 살아난 와중에 또 목숨 걸고 도박을 해 보겠다고? 심지어 치료는 또 나한테 맡기고?"
선생은 씩씩거리며 쏘아붙였다.
"그냥 그 전에 내 손에 죽어라! 내가 오늘 의사 개업 최초로 병원에서 사람을 죽여 내보내겠다!"
"자, 잘못했어요!"
질문만 했을 뿐인데 과민반응이다. 아르키피라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이는 자신이 환자 생활을 할 때 선생이 무슨 고생을 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잘 모르는 인반인들은 의사의 고통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용족이라고 해도 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생은 의자를 집어던졌다.
"알았으면 내 병원에서 당장 꺼져!"
"예, 옙!!"
더 있다간 메스가 날아오게 생겼다. 아르키피라는 황급히 도망쳤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선생의 분노를 잠시 사긴 했지만, 어차피 당분간 병원 신세를 질 일 따윈 없을 테니까.
이후 아르키피라는 천룡왕에게 불려갔다. 특이점과의 접촉에 대해 다시 한 번 대화를 나눈 뒤, 기억을 투사하여 제출했다.
기억 투사는 꽤나 찝찝한 일이었다. 부분적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머릿속을 타인에게 공개하는 일이었으니까. 사안이 사안인 만큼 꼭 필요한 일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을 리는 없다.
이후 그에게 내려진 명령은 꽤나 어이없었다.
"특이점 포획 부대를 조직하는데, 자네도 거기에 들어가 줘야겠네."
"제가 말입니까?"
아르키피라 입장에선 황당했다. 그에겐 달리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알고 계시겠지만, 전 패룡대의 대주를 맡고 있습니다. 대주가 그 자리를 장기간 비운 것도 꺼림칙한 일인데, 아예 타 부대와 겸임하다니요."
"아, 그건 걱정 말게. 그 자리엔 다른 자를 집어넣었으니까."
"예?"
입을 쩍 벌리는 아르키피라의 어깨를 캘러무스는 힘차게 두드렸다.
"대주가 그렇게 오래 자리를 비워서야 되겠나. 이제 자네는 패룡대의 대주가 아닐세. 특이점 포획 부대의 대원이야."
"그, 그런······."
횡포도 이런 횡포가 없다. 어버버하는 그를 천룡왕이 다독였다.
"갑자기 커리어가 끊겨서 혼란스럽겠군. 그렇지 않나."
'그럼 안 그렇겠냐?!'
한순간에 백수가 되어 버린 신세다. 문제는 천룡왕이 직접 내린 명령이었기에 화를 낼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걱정 말게나. 특이점 포획에 성공하면 자네의 명예가 이전보다 몇 배는 더 치솟아 있을 터이니. 이후 자리잡기가 여의치 않으면 내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줌세."
"······알겠습니다."
"특이점과 직접 접촉한 것은 자네뿐이야. 그런 자네가 포획 작전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당치도 않지. 꼭 필요한 인재라 부른 것이니 너무 상심하지 말게."
싫다고 해도 통용될 리가 없었다. 천룡왕의 말은 이치에 맞았으니까.
그렇게 아르키피라는 특이점 포획 부대에 전출되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어차피 그 놈만 첯치하면 다시 원래 직위를 되찾는 것 따윈 일도 아닐 테니까.'
자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벌레도 성장했다. 원래부터 약하지 않은 힘을 가지고 있던 아르키피라였으나, 이젠 더 강해진 것이다.
강해진 신체에 익숙해지는 등 수련을 이어가고 있을 무렵, 갑자기 적색 경보가 내려졌다.
"출동을 연기한다."
청천벽력 같은 일은 아니었지만, 아르키피라를 당황하게 만들긴 충분한 소식이었다.
이유를 듣자 하니, 지룡왕 셀리테라가 특이점과 접촉해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벌레가 영향을 받아 중태에 빠졌다.
특이점의 위험은 상향 조정되었고, 셀리테라가 회복될 때까지 출전이 연기되었다.
이렇게 되니 아르키피라는 진짜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와, 용생이 이렇게도 꼬이냐.'
취미로 건설했던 해적 조직도 이제 붕괴되어 없다. 정말 할 일이 없어져버렸다.
거기까지라면 좋지만, 문제는 이제 수익이 아예 없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제 뭘 먹고 살지?'
타 종족과 달리, 용족은 육체 구성을 위해 특별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 용족 내에서만 유통되는 물품인데, 이 물건의 가격은 돈 많은 용족의 기준으로도 장난 아니게 비싸다. 물건 자체가 상당히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해룡족을 제외한 두 종족만이지만······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일을 해야 돼.'
특이점 포획 부대라 하면 말은 좋지만, 사실 돈 안 주는 명예직에 가까웠다. 급여가 아예 지급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걸로는 생활 유지도 버겁다. 부업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아르키피라는 눈에 불을 켜고 일을 찾아다녔다. 지금까지 쌓아 놓은 재산이 있어 어떻게든 먹고는 살겠지만, 그것도 고작 몇 년이리라. 하루 빨리 일을 하지 않으면 굶어 죽게 생겼다.
그러던 와중 평소 친하게 지내던 지룡 한 명이 아르키피라에게 일을 제안해왔다.
"지룡왕께서 수인족 노예들을 대륙 남부까지 운송하라는 임무를 주셨는데, 내가 지금 좀 바빠서 말일세. 자네가 대신해 줄 수 있을까?"
"대륙 남부까지? 아스란 왕국을 말하는 건가. 거기까지 왜?"
"그것까진 나도 모르는 일이지. 여하튼 여기 써 있는 이 인물에게 인계해주면 되네."
"어렵진 않은 일이네."
그러나 귀찮기도 한 일이다. 아르키피라는 일을 맡을지 말지 고민했으나, 제시된 액수를 보곤 홀랑 넘어갔다.
"좋아. 나한테 맡겨!"
그렇게 아르키피라는 수인족 노예들을 호송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인계받은 장소는 다프텐시아 제국이다. 이곳에서 대륙 최남단까지 육로로 가는 것은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린다.
원래대로라면 해상 운송로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마족의 침략을 받고 있는 다프텐시아에서 해상 운송이 재개될 리가 없었다.
'내 해적단만 멀쩡했으면 어떻게든 됐을 텐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말 귀찮은 일이지만 육로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아스란 왕국까지 가려면 요정의 숲을 통과하는 게 가장 빠르다. 그러나 아무리 용족이라 해도 단신으로 요정의 숲에 들어가는 건 상당히 꺼려지는 일이었다.
'혼자라면 아무 문제 없지만, 저 버러지들을 지키면서 가야 하니까······.'
결국 아르키피라는 우회할 수밖에 없었다. 타란토스 제국으로 간 다음, 그곳에서 하르딘 왕국 등을 거쳐서 대륙 남부로 가야 했다.
이렇듯 일에 걸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자연스레 짜증도 늘어났다.
"거기 애새끼, 똑바로 안 걸어?"
"너는 밥도 안 쳐먹었냐. 아침 쳐먹고 여섯 시간밖에 안 지났잖아!"
"움직이라고!"
항시 윽박지르고, 때로는 채찍을 동원해 수인족들을 후려쳤다. 이러한 행태에 불만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아르키피라에게 대항할 마음을 가진 수인족은 더더욱 없었다.
다프텐시아 제국에서 길 잃은 방랑아 하나를 잡아 노예 목록에 추가한 이후, 아르키피라는 타란토스의 국경을 넘었다.
타란토스에서 한바탕 난리가 나진 않았다. 귀찮음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노예들에게 모두 후드를 뒤집어 쓰게 한 탓에, 그들을 수인족이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전시 상황이라 이런 대인원이 이동하는 건 눈에 상당히 띈다. 그러나 아르키피라는 아주 당당하게 움직였다. 인간 나부랭이가 그를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이런 태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의심을 풀게 만들었다.
"이 시국에 저렇게 당당한 것을 보니, 분명 높으신 분 명령을 받은 게 틀림없어."
"괜히 연관되면 우리만 피곤해질 지 몰라."
그리하여 아르키피라는 트러블 비슷한 것도 겪지 않은 채 타란토스의 땅을 마음대로 쏘다닐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다.
'이상하군.'
아르키피라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왠지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체력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는데, 몸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문득 하늘을 바라보니, 오늘 따라 피처럼 붉게 물든 석양이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자연 현상에 지나지 않았으나, 마치 지옥의 문이 열리는 것처럼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기분 탓인가.'
바닷사람들은 미신을 많이 믿는다. 배에 도끼자국이 나면 안 된다느니, 여자를 배에 태우면 재수가 없다느니 하는 종류의 미신은 하나하나 세어 보면 끝이 없다. 위험하디 위험한 바다에서 생업에 종사하기에, 믿고 의지할 구석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심한 경우에는 오늘 해가 뜬 모습이 기묘하다며 출항을 안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해적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조금 더 거친 사내들의 집합이지만, 자연 앞에 벌벌 떠는 것은 그들 역시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해적 두목 생활을 오래 했던 아르키피라는, 약간이지만 그 사상에 물들어 있었다. 직감이 불길하다면 그 일은 접는 것이 좋다는 사상에.
'고작 인간의 생각일 뿐이지만······.'
아무리 용족이라도 결국 생물이다. 두려움도 느끼고, 공포에 몸을 떨기도 한다.
직감이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 이동하는 건 굉장히 위험한 짓이라고. 하지만 아르키피라는 애써 그 감정을 무시했다.
'고작 인간의 나라다. 위험해 봤자 인간 나부랭이들이야. 내가 설마 어떻게 되기야 하겠어?'
아직 미숙한 놈들이야 인간의 손에 당할 수도 있지만, 아르키피라는 벌레가 성장하기 전에도 패룡대의 대주를 맡을 정도로 우수한 용족이었다. 이제 와서 인간 따위에게 무슨 일이 생기리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그는 애써 발걸음을 재촉했다.
"빨리 걸어라!"
그렇게 움직이던 끝에, 50명의 수인족과 한 용족은 한 평원에 도달했다.
사방이 탁 트인 지역이었다. 누가 접근해도 대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뻥 뚫려 있었다.
아르키피라는 사방을 둘러보고 곧 가슴을 쓸어내렸다. 주변엔 동물 몇 마리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 고작 기분 탓인 거야. 아무 문제도 없다.'
그렇게 안심하던 도중이었다.
두두두두
마치 황소라도 달려오는 듯한,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아르키피라의 눈에, 먼 곳에서 점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짐승인가?'
물체는 놀랄 정도로 빠르게 가까워졌다. 마치 시간이 압축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지상에서 가장 빠른 말조차 저 속도 앞에선 거북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쿵 쿵 쿵
긴장인가, 공포인가. 아르키피라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뭐지. 대체 뭐지?'
미지의 생물이 다가오고 있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빠른 무언가가.
이윽고 하늘을 찢을 듯한 괴성이 천지에 울려퍼졌다.
"너 이 새끼! 잘 걸렸다!"
아르키피라의 눈이 카멜레온처럼 크게 떠졌다.
분명하다.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을 기억해낼 수는 없었다.
'낯이 익은 목소리야. 하지만 대체 누구지?'
적어도 상대가 자신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게 생각한 아르키피라는 칼을 뽑아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약 2초 후, 그는 칼을 떨어뜨렸다.
땡그랑
손에 힘이 풀렸다. 다리도 힘이 풀려 후들거리고 있었다.
"······."
물체는 점점 가까워졌다. 이젠 아르키피라의 시야에도 보일 정도로 확실해졌다.
그때가 되어서야 아르키피라는 상대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아, 아, 아, 아, 아, 아, 아아아, 아."
태엽이 잘못 감긴 인형처럼 아르키피라는 뒷걸음질쳤다. 성대가 고장난 듯 부르르 떨려, 신음밖에 내지 못했다.
엄청난 덩치, 피부를 찢을 듯이 융기한 근육, 결정적으로 털 하나도 나지 않은 대머리.
아르키피라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어떻게, 어떻게.'
운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을까.
악몽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아르키피라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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