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궁에서(3)
레틴은 침대에서 튀어올랐다. 너무 놀라 까무러칠 뻔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가 보이고 싶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위치다. 소리가 들려오는 위치의 문제였다.
'문에서 들리지 않았어.'
그의 방문은 굳건히 닫혀 있다. 그렇다면 남은 곳은?
노크 소리가 들려올 만한 곳은?
다시 한번 예의 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
레틴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아마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창문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소리는 그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여긴······6층인데······?'
상식적으로 노크가 들려올 곳이 아니다. 그런 건 비상식적이다.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서는 것 같았다. 레틴은 덜덜 떨며 이불에 몸을 파묻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려 왔을 거야. 아니면 길 잃은 부엉이라든지. 응, 분명 그럴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으려던 찰나였다.
쿵쿵쿵쿵
마치 화가 난 것처럼 거칠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과연 이것이 착각일까.
날씨 때문이라고 돌릴 수도 없었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고요한 밤이었다. 밖에선 비도 오지 않고, 천둥도 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분명 무언가 있다······.'
차마 고개를 돌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차라리 이 모든 게 꿈이라면. 하지만 환청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이후로도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는 몇 번이나 나더니, 얼마 시간이 지나자 잠잠해졌다.
'역시 착각이었을 거야.'
레틴은 심장이 두근대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마 창문을 바라보고, 밖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마음이 좀 가라앉겠지.
그러나 창문을 바라볼 용기는 절대 나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잠드는 게 최선일 것이다. 이러고 있으면 금방 잠이 들 거고, 아침 햇살이 따뜻하게 몸을 감싸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끼이이익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착각할 리 없는 소리였다.
'서, 서, 서, 설마······.'
아마 이것도 착각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눈을 꼬옥 감았지만, 이어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를 절망의 나락으로 쳐박았다.
타악
조용히 닫히는 창살 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
레틴은 벌벌 떨며 숨을 죽였다.
'사, 살려 주세요.'
눈물이 다시 펑펑 쏟아졌다. 하지만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있으면 그냥 돌아가 주지 않을까.
저벅 저벅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그것은 레틴이 몸을 숨기고 있는 침대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소리가 시시각각 가까워 올 때마다 레틴의 심박수는 더욱 높아져갔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이윽고 발자국 소리가 멎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내 앞에 있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레틴은 최대한 숨을 참았다. 산소 부족으로 눈에 핏발이 서고 몸이 덜덜 떨려왔지만, 지금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환청이 다시금 들려왔다.
- 너는······.
레틴은 눈을 질끈 감고 이를 꽉 깨물었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냥 지금 이 시간이 지나갔으면.
그 때, 환청을 뚫고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로 여는 창문이었군. 왜 창문을 안 열어 주는 겁니까?"
"······."
낯이 익은 목소리. 동시에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목소리.
손톱이 파고들도록 꽉 쥔, 손아귀에 붙잡혀 있던 이불이 스르르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사내의 실루엣이 보였다. 남들보다 머리 한두 개는 더 큰, 전신에 털이 하나도 없는 남자. 달빛에 비친 그의 머리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레틴은 웃었다. 긴장이 풀렸기 때문일까.
아니, 울었다. 레틴은 자신의 허리만큼이나 두꺼운 안도혁의 팔을 붙잡고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으헝헝헝."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사내가 자신을 붙잡고 우는 것은, 최소한 같은 남자의 입장에선 유쾌하다고 보기가 극히 어렵다.
안도혁은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눈치가 나쁘지 않은 그였지만, 이런 상황에서 판단을 제대로 하는 건 무리였다.
이젠 만나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려대는 것도 슬슬 익숙해질 것 같았다. 그저 한숨을 내쉬며 레틴이 진정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한참 후, 눈이 벌겋게 부어오른 레틴이 소리쳤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사실 조금 늦긴 했다. 계획대로라면 안도혁은 약 보름 전쯤에 이곳에 도착했어야 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미 도착한 사람에게 그런 건 의미가 없다. 막 대답하려는 안도혁보다 먼저 레틴은 질문을 하나 더 던졌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밖에서 올라온 겁니까?"
6층짜리 건물. 대부분의 성은 돌을 쌓아 만든 석조 재질이다. 초인이라면 기어 올라가는게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성은 다르다. 성벽의 외부를 만져 보면, 마치 비누를 바른 듯이 매끄럽다. 도둑을 막기 위해 특수 처리한 기술로, 벽을 타고 올라온다는 것은 초인이라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하늘을 나는 이능이라도 있지 않고서야 무리다.
안도혁의 대답은 단순했다.
"벽을 잡고 올라왔습니다만."
'······이 건물을?'
숨을 들이마시면 공기가 폐에 들어온다는 것을 굳이 설명하냐는 듯한 어조였다.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다는 듯한 태도.
새삼 눈앞의 괴물을 고용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이 방을 콕 집이 알았냐는 의문이 들긴 했지만, 사소한 것은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왜 이 밤에 오신 겁니까? 그것도 이렇게 몰래."
레틴이 직접 통행증 비슷한 걸 써 줬다고는 하지만, 이 야밤에 그것만으로 외부인의 출입을 허가할 만큼 타란토스 제국이 바보는 아니다. 즉, 안도혁은 도둑처럼 은밀하게 출입할 수밖에 없었다.
"도착이 늦었기에 혹시 불안하실 것 같아서, 최대한 빨리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만, 혹시 방해가 되었습니까?"
황자를 대하는 태도치고는 무례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레틴은 그것을 그리 신경쓰지 않았다.
"아닙니다. 잘 오셨습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내일 아침에 왔다면, 레틴은 오늘 밤을 뜬눈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도저히 잠을 잘 수 있는 정신상태가 아니었으니까.
레틴은 웃으며 자신의 침대 밑에 손을 넣더니, 술 한 병과 잔 두 개를 잡아 꺼냈다.
"한 잔 어떠십니까?"
"······."
침대 밑에 술병을 숨겨 두다니. 안도혁은 이 술꾼 황자가 살짝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다음 순간 안색을 풀었다. 레틴이 재떨이를 내밀었던 것이다.
"제 방이니, 담배 정도는 마음대로 피우셔도 좋습니다."
세삼한 비려라기보다는 기분 맞춰주기에 가까운 발언이었지만, 안도혁의 마음을 잡기에 이 이상 적합한 말은 얼마 없을 것이다.
두 남자는 그렇게 술과 담배를 주고 받았다. 레틴 역시 흡연자였기 때문에, 방 안은 금세 담배 연기와 술 냄새로 가득 찼다.
"한 잔 더 하시죠!"
"좋습니다."
"으하하, 잘 드시는군요!"
방금 전까지의 공포 분위기는 간 데 없고, 이내 술담배로 가득한 밤의 막이 올랐다.
"으으."
레틴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방 바닥에는 어젯밤 광란의 파티를 증명하듯, 술병들이 어지러이 늘어져 있었다.
'도대체 몇 병을 먹은 거냐.'
황족은 어릴 때부터 음주 교육을 받는다. 게다가 역대 황족들은 모두 싸움을 잘 하고 술을 잘 먹는 초대의 피를 이은 만큼, 절대 술이 약하지 않았다.
그런 레틴이라고 해도 어제의 음주는 힘들었다. 드디어 살았다는 기쁜 마음에, 술안주로 술을 먹어대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물, 물······.'
시녀를 불러 물을 가져오라고 하고 싶었지만, 입안이 말라붙어 말을 꺼내기도 어려웠다. 숨을 내쉴 때마다 강렬한 술 냄새가 코를 찌를 듯이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아침 식사를 하러 가야······.'
숙취에 컨디션이 털릴 대로 털리고 있는데, 가서 지옥을 경험해야 한다. 실로 난감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원래대로라면 아무리 숙취가 강하다고 해도 몸을 일으켰을 것이다. 어떻게든 몸을 씻고, 최대한 멀쩡해 보이려고 기를 쓰며 식당으로 향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레틴은 달랐다.
"안 가!"
이제 내게 무서울 것은 없다!
그 시간 식당에서는, 레틴을 괴롭히기 위해 온갖 기대를 품고 있던 1황비 가족 네 명이 식탁을 바라보고 있었다.
"······."
조용하다. 분명 맞은편에 있어야 할 샌드백이 오늘따라 간 데 없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은 정적뿐이었다.
음식이 슬슬 식을랑 말랑 하고 있었다. 이 시점까지 착석해 있지 않는다는 건, 그냥 식사를 안 하겠다는 무언의 의사표시나 다름없다.
"······안 오네."
"안 오네요."
물론 법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다. 그래도 2황비의 가족 중 하나는 여기에 착석해 있어야 하거늘.
리그니타가 말했다.
"레틴 놈. 이젠 아주 막나가자는 건가? 어머니, 가서 족칠까요?"
제국 3황자의 입에서 나오기엔 너무나도 경박한 발언. 하지만 거기에 태클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로젤린은 턱에 손을 얹고 잠시 생각하나 싶더니, 곧 풋 웃었다.
"놔두거라. 이제 체면 차릴 여유는 없다는 거겠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 아니겠니?"
"하지만 제놈이 죽는 건 그렇다 치고, 남은 가족들 생각은 못 하는 걸까요? 개처럼 짖어 준다면야, 친척들 정도는 살려줄 수도 있는데 말이죠."
로젤린은 곱게 고기를 썰어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그대로 두거라. 어차피 하늘이 무너진다고 해도 아레스틴이 살아남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아."
"그건 그렇지요."
"왠지 기분이 좋구나. 와인이라도 한 잔 하고 싶은 기분이야."
"가져올까요?"
리그니타의 말에 로젤린은 눈을 살짝 흘겼다.
"항상 말했잖니. 그런 건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천한 것들에게 명령하는 거란다."
"그럼······."
막 시중을 드는 시너에게 소리치려던 찰나, 로젤린이 손을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날이 아니란다. 즐거움은 뒤로 미뤄 둬야지. 축배는 너희들 중 한 명이 황위에 등극하는 날, 그 때로 미뤄 두자꾸나."
그 말에, 형제들 사이에서 기묘한 기류가 일어났다. 다만, 그것은 막내인 리그니타를 제외하고 벌어지는 일이었다.
양 손에 깍지를 껴 머리 뒤로 돌린 채, 리그니타가 흥미 가득한 표정으로 낄낄대며 웃었다.
"아무나 이겨라. 싸워라, 싸워라."
로젤린이 소리쳤다.
"리그. 그만두지 못하겠니?"
"권력이 뭐라고, 형제끼리 싸우는 게 재밌지 않아요, 어머니?"
"······."
로젤린은 철없는 막내아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형제 싸움에 피를 흘릴 생각이 없는 건 좋다만, 황족이라는 사람의 언행이 저렇다니.
'그래. 건강하게만 살아다오.'
엄마 심정이라는 건 어느 세계든 비슷한 법이었다.
막내는 건강하게 자라는 게 제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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