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15)
아마 일 초만 늦었어도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안도혁은 안톤의 발목을 잡고 막 바닥에 내려치려던 모션을 취하고 있었다. 루나의 목소리에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혀를 차며 안톤을 내려놓았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승부는 났다.
정적 속에 다가온 루나가 안도혁에게 소리쳤다.
"당신, 저 사람 죽일 셈이야?"
"······초인이라는 게 생각보다 허약하군."
물론 저런 걸 당하고도 살아있는 것이 초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 테지만.
살아있음에 안도했음일까, 안톤은 필사적으로 잡고 있던 정신줄을 놓았다.
그리고 사위는 조용해졌다.
휘이잉
어딘가에서 줄어온 한 줄기 겨울바람이 연무장을 적셨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무위에 기사단장이자 초인이 반 시체에 가깝게 변해버린 것을 본 기사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들의 주인인 아도니스까지도.
안도혁은 침묵의 맥을 끊었다.
"옮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사람, 저대로 두면 위험할 텐데."
그 말에 정신을 차린 아도니스는 황급히 지시했다.
"뭐, 뭣들 하고 있소. 어서 안톤 경을 의무실로 옮기시오!"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든 기사들이었다.
들것에 실려 천천히 옮겨지는 안톤의 모습은 처참했다. 죽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걱정스러운 눈길로 실려가는 안톤을 바라보던 아도니스는 안도혁을 잠시 째려보았지만, 곧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자신의 판단 때문에 일이 이렇게 벌어져버린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으니까.
역정 대신 그는 사죄의 말을 꺼냈다.
"저희 쪽 기사가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이 일에 대해선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겠습니다."
죽었으면 모를까, 일단 안톤은 살아 있으니까. 게다가 합의하에 치러진 결투 아닌가. 그것을 결투라고 볼 수 있다면 말이지만.
"저야말로 귀중한 인력을 손실하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뜻하지 않은 결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아······안톤 경은 생각보다 호승심이 강했던 모양입니다. 여태껏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 몰랐습니다만."
"무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는 법입니다."
아도니스는 눈앞의 대머리 거한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그는 안도혁을 평범한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초인이라는 부분을 배제한다면.
상식적인 부분을 조금 모르는 모양새가 보이긴 했지만, 그것은 그가 폐쇄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인간도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방금 생각이 바뀌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무언가······.'
저건 인간이 아니다. 괴물이다.
적어도 저런 개체를 인간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국가 급 전력이라 불리는 초인을 저렇게 개 잡듯이 잡아버리는 존재를 어떻게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아도니스의 머리에 하나의 가설이 스치고 지나갔다.
조심스레 다가온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혹시 용족이십니까?"
용족이 인간사에 얼굴을 비친 적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들이 가끔 힘을 보였다는 기록 정도는 남았다.
그 때마다 그들을 표현하는 수식어구가 한 가지 있다.
'자연재해.'
용족은 기본적으로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물이다. 제 아무리 초인이라고 하더라도, 종족의 격이 완연히 다른 것이다.
눈앞의 이 생물을 표현할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지만, 안도혁은 난감한 표정이 될 뿐이었다.
"요즘 들어 그런 말을 많이 듣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계속 인간이었습니다. 그 따위 도마뱀들이랑 비교하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비록 한 개체밖에 만나보지 못했지만, 현재 용족에게는 악감정밖에 없다. 물론 품 안에 잠들어 있는 담뱃갑은 사랑스러웠지만.
아도니스는 살짝 안심했다. 적어도 용족이 저런 말을 내비칠 리는 없다. 기록된 바에 따르면 용은 모두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종족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 대체 뭐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상식의 궤를 벗어나 있는 이 남자를 도대체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감이 서질 않았다.
계속 생각하던 끝에 아도니스는 포기하기로 했다.
'나한테 해가 되는 것도 아닌데,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그는 인사를 건네곤 안톤 경의 상세를 살피기 위해 의무실로 향했다. 살아 있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신관을 불러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중태였으니까.
연무장에 남은 건 세 사람뿐이었다.
연무장 바닥을 온통 적시고 있는 피와 토사물을 보며 루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심했어요, 도혁."
"그렇습니까."
하지만 선을 넘은 자는 용서할 수 없는 법이다. 물론 안톤은 몰랐겠지만, 그는 방금 황천에 가도 이상하지 않을 욕설을 한 것과 다름없었다.
순간 루나가 연무장 한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뭘 하나 지켜보고 있으려니,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검은 두건을 주워왔다.
반사적으로 자신의 머리에 손을 가져간 안도혁은 두건이 벗겨져 날아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나가 안도혁의 등을 찰싹 때렸다.
"이거 봐요. 사람이 얼마나 흥분했으면 벗겨지는 것도 몰라?"
"······."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숙였고, 루나는 그의 머리에 두건을 질끈 묶으며 툴툴댔다.
"바보 같아, 진짜. 어떨 때는 자비로운 것 같다가, 어떨 때는 짐승처럼 날뛴다니까."
"짐승이라니, 말이······."
"할 말이 있어요?!"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너무 흥분한 감이 있었다.
속사포처럼 쫑알쫑알 쏘아대는 루나의 말에 얻어맞고 있으려니, 옆에 있던 에스턴이 살짝 끼어들었다.
"한 마디만 해도 될까요?"
"뭔데요!"
날카롭게 째지는 '옛 주인'의 말에 에스턴은 살짝 겁을 먹었으나, 곧 다시 당당히 가슴을 폈다.
병이 치료되고 있는 그는 예전의 소심했던 엘프가 아니다.
"안도혁 님이 힘을 쓰신 것은 보통 누군가를 지키려 하거나, 직접적인 위해를 가해 오는 적들에게뿐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아무에게나 폭력을 휘두르는 인간 말종은 아니었으니까.
"유사 이래로 안도혁 님처럼 강한 분이 이렇게 겸손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함부로 힘을 자랑하고 다니지 않는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인명살상 같은 크나큰 일이 아니라면 약간의 실수 정도는 넘어가도 좋지 않을까요?"
동료들이 그를 보며 기묘한 표정을 짓자, 에스턴은 하얀 이를 씨익 드러내며 웃었다.
"동료잖아요!"
"아니, 그······."
루나가 뭐라 말하려 하던 순간, 안도혁은 폭소했다.
"크하하하하하!"
웃었다.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그의 성량은 어마어마해서, 근처를 지나가던 새들이 공중에서 선회하게 만들 정도였다.
뭐가 웃겼는진 모른다. 적어도 그는 자신의 안에 자리잡는 이 감정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산천초목을 벌벌 떨게 만들 정도로 호쾌한 웃음의 폭풍이 지나가자, 루나와 에스턴은 간신히 귀를 막은 손가락을 떼낼 수 있었다. 귀가 좋은 에스턴은 약간 머리가 멍하기까지 했다.
햇살이 비쳐온다. 피로 물든 연무장엔 어울리지 않는 따뜻한 온기였다. 한겨울의 가운데로 떨어지는 태양의 파편은 실로 따스하기 그지없었다.
이들이라면 괜찮겠지. 쓸데없이 자신을 숨길 필요 없겠지.
안도혁은 눈물을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올해 28세가 되는 안도혁이라고 한다. 안현식과 윤지영의 둘째 자식이며, 저 먼 무국적 지대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 출신이지. 다들 알다시피 발모제를 찾아 여행하는 중이고 말이야."
갑자기 호가연히 달라진 그의 말투에 일행은 적응하지 못했다.
그보다 신상명세는 갑자기 왜?
'물론 궁금하긴 했는데······.'
꼬치꼬치 캐묻는 것도 실례가 될 것 같아 일부러 묻지 않았는데, 그걸 이 타이밍에 밝힌다고?
안도혁의 얼굴은 후련해 보였다. 어차피 그렇게 큰 비밀도 아니었지만, 이제야 그는 모든 것을 밝힌 것이다.
저 하늘에서 비치는 햇살처럼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안도혁은 동료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부터 나를 도혁이라고 불러라."
'신이시여. 무지몽매한 저희는 당신의 뜻을 알 길이 없나이다.'
성녀는 피곤에 절은 눈으로 성서에 고개를 파묻었다. 경전을 대하는 태도치고는 상당히 불경했지만, 그런 것을 따질 만큼 컨디션이 여유롭지 못했다.
며칠간이나 씻지 못했는지 아름다운 금발은 푸석푸석해져 있고, 미인이었음이 분명한 얼굴은 꼬질꼬질해져 있었다. 새하얀 법복 역시 때가 타서 썩 봐줄 만한 모양새가 아니었다.
며칠이나 철야했다. 종교 경전을 달달 뒤진 것은 물론이고 각종 역사학, 지리학 등의 서적까지 찾아보았다.
물론 효과는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비슷한 모양새로 성서 위에 엎어져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들 그녀와 함께한 사람들이었다.
애매모호한 신탁의 해석은 너무나도 난해했다. 성국에서 머리 좋다는 사람들은 모두 모아 무슨 뜻인지를 파악하려고 애썼지만, 아무도 정체를 밝히지 못했다.
그렇다고 신탁을 무시할 수도 없지 않은가. 무려 신께서 직접 내린 말인 것을. 그 교리를 해석해서 신도들에게 전파하는 게 성녀로서 태어난 이상 수행해야 할 지상과제인 것이다.
'세 번째라, 세 번째······.'
거듭해서 생각해도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런 부연설명도 없이 그렇게 말하면 누가 알아들을까. 태어나서 지금까지 항상 신앙을 위해 살았던 성녀라도 무리인 일이다. 그녀보다 몇 배는 더 많이 산 교황조차 해석할 수 없었으니까.
'교황 성하도 모르시고, 추기경께서도 모르시고, 일반 사제들도 모르시고, 나도 모르고.'
과연 저 뜻을 해석할 방법이 있기는 할까. 제국의 현자라도 초빙해야 하나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성녀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예배당으로 향했다.
끼이익
문 관리가 소홀했음인가. 경첩이 비틀리는 소리가 듣기 싫게 들려왔다. 성녀는 비어 있을 예배당의 앞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뜻을 내려주시지 않을까.'
신앙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록에 따르면 신탁은 거의 한 세대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수준으로 드물게 내려진다. 이제 와서 다른 신탁을 받을 수 있을거란 생각은 접어두는 것이 좋으리라.
하지만 기도 외에는 이 심란한 마음을 어떻게 접어둘 수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예배당 앞에 있는 신상(神像)으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응?'
분명히 비어 있을 예배당에 누군가가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 아이가 신상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아이는 펄떡 일어나 성녀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말하면서도 성녀는 웃기다고 생각했다. 예배당에 왜 왔을까. 당연히 기도를 위해서지.
아이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함부로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후후, 아니에요. 기도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어떻게 죄가 될까요. 이레이시아님은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그래서, 무슨 일인가요?"
아이는 시무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엄마가 많이 아파요. 신관님들을 찾아갔는데, 돈이 없어서 치료를 해주지 못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이레이시아님께 기도라도 드리러 온 거예요. 혹시 치료해주시지 않을까 해서."
"······."
성녀는 말문이 막혔다.
신관들은 병자들의 치료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료로 제공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신전이 돈독에 올라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무상으로 치료를 해준다면 모두들 신전을 무료 봉사 단체쯤으로 인식하겠지.'
그러면 온 세상에 있는 병자란 병자는 온통 몰려올 것이다. 그러면 다른 치료사들의 밥줄이 끊기고, 성국은 거지떼로 들끓으리라. 경제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낙후되어 갈 것이다.
성녀는 눈을 감고 소년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반드시 치료해주실 거예요."
"누나가 치료해 주시는 건가요?"
성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성녀씩이나 된 몸이니, 그녀 역시 치유의 기적을 발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 경우는 해결 방법이 다르다. 성녀는 '쉿'하고 입가에 손가락을 올리며, 소년에게 은화 몇 개를 건네주었다.
"이, 이건······."
"그 돈으로 신관님께 치료받도록 하세요. 그리고 이 사실은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요? 이레이시아 님이 화내실지도 몰라요."
소년은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는 꾸벅꾸벅 인사하며 소리쳤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누나!"
"저는 한 일이 없어요. 모든 것은 이레이시아 님의 자비지요."
그러자 소년은 몇 번 더 머리를 숙이더니, 신상에 꾸벅 절을 했다.
"첫 번째 신이시자 모두를 자애롭게 품는 용신 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요!"
'어?'
성녀는 순간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소년이 도도도 달려가 예배당 문 밖으로 나갔지만, 그녀의 귀엔 그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첫 번째 신······?'
어디서부터 들려왔는지는 모른다.
이레이시아는 첫 번째 여신이라는 말을 듣는다. 다만 그것은 누가 정해준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미사여구에 가까운 말이었다. 아무도 그 말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경전에도 첫 번째니 하는 소리는 쓰여 있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미사여구가 아니었다면?
성녀는 털썩 주저앉았다. 무서운 상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첫 번째 여신이신 이레이시아 님······그렇다면 세 번째란?"
분명 이레이시아는 세 번째라고 말했다.
누구보다 빛날 세 번째.
여기서 나올 결론은 하나밖에 없다.
'세 번째의 신이라고?!'
추천, 선작,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당
- 작가의말
이러다간 3000화가 돼도 안 끝날 것 같아서 분량을 조금 조절했습니다. 앞으로는 이 분량대로 가야 할 것 같네요.
이번 챕터도 끝났습니다.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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