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군인의 하루(2)
"저한테 맡겨 주시지 말입니다. 제가 기강을 제대로 잡아 놓겠습니다."
옆에 있던 후임의 말에, 필립은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새끼야. 지금 그게 안 되니까 이러고 있는 거 아니냐?"
"······그건 맞지만."
위계와 서열이 전부인 군대다. 개인의 의견 따위는 초개처럼 묵살하는 게 가능한 곳이 바로 군대라는 야만적인 집단이다.
그러나 서석진은 조금 예외였다.
"짬을 어디로 먹은 거야. 저 애송이 하나를 상대를 못 하잖아!"
그 말에 방금 얻어맞은 장교가 궁시렁댔다.
'자기도 못 하는 주제에.'
스무 명이 넘는 집단. 그곳에 적응하는 방법은 보통 집단의 의견에 수긍하는 것이다.
서석진은 그게 싫었다. 그렇기에 그는 선임들이 이거 해라 저거 해라를 말하는 순간, 이렇게 받아쳤다.
"못해 먹겠네. 계급장 떼고 맞짱 뜨던가요?"
내무반에 있던 스무 명 넘는 인원 중, 이 말에 어이가 없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나오는 경우, 선임들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보고 체계를 거쳐 윗선에 '쟤가 말을 안들어요'라고 일러 바치는 것.
다만 이 경우는 별로 의미가 없다. 일반 병사와 달리, 내무반에 있는 인원은 모두 영관 급의 장교들이다. '명목 상' 그들 사이에 상하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서열이 높은 중령, 필립의 경우만 예외다.
이 방법을 채택하지 못한 이유는 또 한 가지가 있다.
'저 자식. 장군님이 직접 데려온 놈이잖아.'
쉽게 말해 낙하산이다. 이런 경우, 보고 체계를 거친다 해도 서석진이 받을 처벌은 솜방망이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필립은 두 번째의 방법을 택했다.
"야, 조져."
얼마나 사회 물이 덜 빠져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사흘 정도 묶어 놓고 두들겨 패서 말을 안 들을 놈은 없다. 군홧발과 몽둥이 앞에 사람은 평등해지기 마련이니까.
필립의 말에 다섯 명의 인원이 나섰다.
"너는 오늘 죽었다."
"군기가 안 잡힌 모양인데."
서석진의 앞으로 나온 사람들은 모두 초인이다. 하기야 이 내무반에 초인이 아닌 사람은 존재하지 않지만.
다섯 명의 구타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필립은 희희낙락했지만, 그가 예상한 것과는 조금 다른 결과가 펼쳐졌다.
뻑 뻐억
"으억."
"내 코."
달려드는 다섯 명의 선임에 맞서, 서석진은 번개처럼 움직여 그들을 모두 때려 눕혔다. 그것도 하나의 상처조차 없이.
상처를 감싸쥐고 비틀대는 인원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서석진은 필립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쪽은 안 나서요?"
필립은 주먹을 쥐었지만, 섣불리 앞으로 나설 수는 없었다.
'젠장. 이 새낀 대체 뭐야.'
썩어도 준치라고, 그 역시 방금 전의 다섯 명 정도는 혼자 상대할 수 있었다. 초인이라고 다 같은 레벨인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저렇게 상처 하나 없이 제압한다는 것은 아무리 그라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필립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뭐 해. 전부 다 달려들어!"
그의 말에 후임들은 우물쭈물했지만, 선임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하나 둘씩 앞으로 나오는 그들에게 서석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금 덤비면, 최소한 네 명은 불구로 만들어 버릴 줄 알아요."
본래 내무반 인원들끼리의 폭력 행위는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부대 내 모든 인원들이 그것을 쉬쉬했다. 가뜩이나 전부 초인이라 통제가 어려우니, 내무반 내에서 일어난 일은 알아서 처리하라는 무언의 합의가 이미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폭력과 인원수로 반항하는 놈의 의견을 모두 묵살하는 게 가능했건만,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멈칫거리는 선임들을 바라보며 서석진은 피식 웃었다.
"좋게좋게들 살자구요. 싸우지 말고."
싱글거리며 그는 내무반을 나섰다. 그를 저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서석진이었다. 물론 전 인원이 전부 달려들면 아무리 서석진이라도 배길 수 없겠지만,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선임의 위신이 전부 깎여 버린다. 지금까지 말을 잘 들었던 다른 녀석들도 반항심이 생길 것임이 틀림없다.
필립은 샌드위치를 물어뜯듯이 씹어대며 이를 갈았다.
"저걸 진짜 어떻게 해야 하는데 말이야."
이곳에 온 이후 서석진의 생활 패턴은 단순해졌다. 하기야 군대에서의 생활 자체가 획일화된 건 당연한 일이지만.
아침을 먹고, 오전 훈련을 한다. 훈련이 끝나면 간단한 샤워 후 점심식사를 하고, 이후 오후 훈련에 돌입한다. 오후의 일과가 끝나면 저녁식사를 하고, 샤워 후 자유시간을 즐기다 잠에 든다. 이 패턴의 연속이었다.
상당히 무미건조한 생활 방식이었지만, 서석진은 극단적으로 피로함을 느끼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는데.'
이런 루틴은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았다. 만약 서석진이 평범하게 내무반 생활을 했다면 말이다.
'언제 저놈들이 덮칠지 몰라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친해질 수가 없으니 밥도 맨날 혼자 먹고. 휴식 시간에도 눈치 보여서 내무반 안엔 들어가지도 못하고.'
혼자 모두를 따돌리는 형국이었지만, 실상 따돌리는 자도 그렇게 편한 마음은 아니었던 것이다. 평생 인기가 많았기에 혼자 있으면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서석진으로선 더더욱 그러했다.
'어떻게든 수를 써야 해. 이렇게 계속 살다간 미쳐버릴 거야. 술도 여긴 없는데 말야.'
점심식사 후의 짧은 자유시간을 풀밭에서 누워 보내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서석진, 잠깐 괜찮을까?"
서석진은 고개를 돌렸다. 길지 않은 갈색 머리카락을 뒤로 묶어, 단정한 모습이 인상적인 여성 한 명이 그곳에 있었다.
'분명히 나랑 동기였던, 어······이름이 뭐였더라. 바깥 사람들의 이름은 쓸데없이 길단 말이야.'
내무반에선 입대한 년도가 같으면 동기라고 취급하며, 같은 지위를 가진다. 서석진이 기억하기에, 그의 동기는 총 네 명이었다.
마리아의 직속부대는 여성과 남성이 같은 내무반을 쓴다.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잔다. 샤워 정도야 따로따로 하지만.
이는 다프텐시아 제국에선 찾아보기 매우 어려운 사례였다. 군인끼리 서로 눈이 맞으면 어떡하냐는 의견이 사방에서 쇄도했지만, 마리아의 대응은 단호했다.
"괜찮습니다. 만약 불건전한 행위가 제 눈에 걸리면 어떻게 될 지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한 명의 불손분자도 생겨나지 않았다. 무력 하나만으로 장군의 직위를 꿰어찬 이 여장부의 말을 무시할 만큼 간 큰 인간은 그녀의 부대에 없었던 것이다.
서석진은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
"그, 그래. 여기 앉아."
여성은 서석진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
"한 대 피울래?"
"아니. 난 담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고개를 끄덕인 여성은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을 당기더니, 연기를 맛있게 붐어냈다. 그 모습을 본 서석진은 새삼 누군가가 떠올랐다.
"내 이름 기억 못하지?"
서석진은 뜨끔했다. 필사적으로 뇌내 기억망을 헤집어 보았지만, 관심도 없는 인간의 이름을 기억할 용량은 그의 뇌에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머리가 좋지도 못한 그였으니.
"난 카사블랑카라고 해. 카사라고 불러 줘."
"서석진이야."
"알고 있어."
하긴 서석진을 모르는 사람이 부대 내에 있는 게 더 신기하리라. 서석진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과오를 반성했다.
몇 모금 더 담배 연기를 뻐끔거리던 카사는 입을 열었다.
"왜 선임들 말을 듣지 않는 거야?"
서석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재주도 없고, 실력도 없고,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지위를 이용해서 사람을 구박하는 것밖에 없는 녀석들에게 굳이 복종하는 너희들 쪽이 더 신기한데."
"하지만 너는 군인이잖아. 군인은 상관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것 아니야?"
"내가 알기로 부대 내에서 상관이라고 명시된 사람은 없던데?"
카사는 입을 다물었다. 물론 명목상 동천군 부대 내의 모든 인원은 평등하다. 필립만 계급이 다르지만, 그 역시 상관이라기보다는 관리자에 가까운 직급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을 멈출 수는 없었다.
"제발 부탁이야. 네가 잘못한 거라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다들 네가 입대한 이후로 힘들어하고 있어."
"뭐가 문제길래 그러는 거야?"
카사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비벼 끄며 소리쳤다.
"일단 우리 동기들! 동기 관리 똑바로 못하냐며 매일 얼차려를 받아! 그리고 일 년 선임들도 후임 관리 못하냐면서 얻어맞고! 군기가 빠졌다면서 때리고 구박한단 말이야!"
카사는 이 쓸데없이 잘생긴 동기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바라만 봐도 얼굴을 붉힐 만한 외모였지만, 지금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공감해주길 바랐으나 서석진은 무심하기만 했다.
"왜 그걸 가만히 맞고 있어?"
서석진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행동거지를 보면 안다. 필립을 위시한 선임 부대원들이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전투력이 높다는 것 정도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마어마하게 큰 차이가 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힘을 모아 상대하면 충분히 반격을 할 수 있으리라.
"군대란 건 그런 곳이야. 위에서 명령하면 따르고, 아래에서 하극상이 일어나면 짓밟는 곳. 왜 그걸 이해 못해? 너도 군인이잖아! 훈련소에서 기본 정도는 배워 왔을 거 아니냐고!"
"······훈련소?"
아무리 초인이라고 해도, 부대에 배치받기 이전에 기본 군사 훈련을 받는다. 군대 내에서 통용되는 제식과 예의범절 등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서석진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마리아에게 강제적으로 끌려온 신세에, 그녀의 입김으로 직속부대에 떡하니 박힌 몸이다. 군인 정신을 주입받는 건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배운 적 없어. 그리고 배웠다고 해도, 이런 부조리한 일상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카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 역시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야. 하지만 우리는 군인이잖아. 상명하복을 하는 사람들이란 말이야."
대부분의 여성 기사들은 마리아를 롤 모델로 삼는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녀만큼 대단한 입지를 세운 여성은 지금껏 다프텐시아 제국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이례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카사 역시 그녀를 동경하여 입대한 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부대의 운영 방식에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선임의 노예처럼 부려지는 것에는 지칠 수밖에 없었다. 빨래도 대신 하고, 간식도 구해다 바치고, 청소도 대신 해 주는 생활에, 감정 쓰레기통으로 부려지는 신세를 누가 달가워할까.
서석진은 피식 웃었다.
"정당한 명령이라면 따르겠지만, 저렇게 꼬장을 부리는 걸 그대로 듣고 있어줄 만큼 나는 호인이 아니거든."
안도혁과 헤어지며 폭력이라는 것이 얼마만큼의 억제력을 가지고 있는지 깨달은 지금은 더더욱 말이야. 서석진은 뒷말을 삼켰다.
갓 봄이 될 법한 날씨였지만, 이날의 오후 태양은 필요 이상으로 뜨거웠다.
간혹 이런 날이 있다. 봄인데도 불구하고 혹한의 눈 폭풍이 내릴 때라던지, 여름이라고밖에 믿을 수 없는 혹서가 다가오는 일이. 혹자는 봄의 정령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려서 그런 거라는 말을 농담처럼 건네지만, 실제로 진위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 더위 속에서, 동천대원들은 열심히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엎드려서.
뒷짐을 진 필립의 앞에, 그의 바로 아랫 기수인 여성 한 명이 소리쳤다.
"하나에 정신을, 둘에 차리자. 하나."
"정신을!"
"둘."
"차리자!"
"하나."
"정신으으을!"
무더위를 등으로 받아내며 부대원들이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전원이 전부 실시하는 것이 아닌, 서석진의 동기 및 그의 윗 기수만이 행한다는 점이었다.
또한, 그들의 등 위에는 거대한 바위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카사는 이를 악물었다.
'큭······.'
팔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벌써 이 짓을 한 시간 가까이 하고 있다. 아무리 몸이 잘 단련된 초인이라고 한들, 이런 무자비한 일을 장시간 계속할 수는 없다.
동기 한 명이 팔에 힘이 빠진 듯 풀썩 주저앉았다. 그런 그의 옆구리로 선임의 용서없는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퍽
"어억."
배를 부여잡을 시간도 없었다. 당장 원래 자세로 복귀하지 않으면 다시 한 번 폭력이 행해질 게 분명했다.
낑낑대며 간신히 엎드리는 그의 귀에 선임의 목소리가 박혔다.
"정신 못 차리지? 군기가 빠져서는."
얼차려를 받는 인원은 총 열 명. 서석진의 동기 네 명과 일 년 선임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이렇듯 부당한 폭력을 당하고 있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애새끼 하나 똑바로 관리 못 하냐고!"
추천, 선작,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당
- 작가의말
좀 큰일이 있어서 며칠 간 연재를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얼른 빠진 분량 채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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