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 경(2)
"이제 곧 전쟁이 일어날 거야. 그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지?"
서석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며 가며 듣는 소리가 전선 이야기밖에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원래대로라면 마리아는 직접 부대를 이끌고 최전방에 나가야 했다. 최고 전력이라 불리는 세 명이니 당연히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출진 준비는 항상 되어 있어야 하니까.
"조금 이상하다 생각했어. 출진 명령이 나오긴커녕, 출정을 연기하라는 명령이 내려왔거든. 평소에는 조금만 몬스터의 준동이 커도 득달같이 불러대면서 말이야."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지만, 중앙의 뜻이 어떤지 모르는 이상 함부로 군대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천생 군인인 그녀는 그저 명령에 복종할 뿐이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했지. 내 힘이 필요하지 않다는 건 그만큼 전선이 덜 치열하다는 거니까. 평화로운 게 좋은 거잖아?"
전쟁을 위해 존재하는 게 군대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전쟁이 일어나질 않기를 바라는 것도 군인이다. 전쟁이 나면 결국 최전선에서 죽어나는 게 군인이라는 존재니까.
"하지만 내가 최전방에서 받은 보고는 달랐어. 대포의 포탄이 거의 다 떨어지고 있으니, 화급히 지원이 필요하다는 소리였어. 아직까진 기사들이 버티고 있긴 하지만, 내가 출진하지 않으면 결국 사상자가 나오기 시작할 거야."
전쟁에서 사상자가 아예 없길 바라는 건 꿈 같은 환상이다. 그러나 적재적소에 병력을 적시에 배치함에 따라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는 있다. 전략이나 전술은 이런 것을 기본적인 전제로 잡고 펼치는 것이다.
서석진은 의문이 들었다.
"누나가 임의로 출전할 수는 없는 거야?"
이젠 누나 소리도 자연스러워진 서석진이었다.
마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자기,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나처럼 한 군단을 맡고 있는 사람이 함부로 경거망동하게 되면 그건 곧 반역을 의미해. 그럼 적을 격퇴하기는커녕 역적으로 몰려 가문이 멸문당할걸? 내 목도 효수될 거고."
끔찍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마리아.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역사적으로 군인들에 인한 권력 찬탈이 너무 많다 보니, 중앙에서는 군대가 조금이라도 어긋난 방향으로 움직이면 곧바로 징계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세 기사라면서. 그래도 안 되는 거야?"
"나 혼자 단독으로 움직이는 건 가능하겠지. 하지만 나 혼자 거기 투입돼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초인이니, 동천이니 해도 결국 내 몸은 하나, 팔은 두 개야. 호수에 소금 한 줌 뿌렸다고 소금물이 되진 않잖아."
자조적인 어조였다. 고개를 푹 숙이는 마리아의 모습은 처량해 보였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명령이 내려왔어. 그것도 명령서를 저 망할 헤이든 슈미트에게 들려 보내서."
단순히 헤이든이 싫어서 보이는 반응이라기에는 격했다. 명령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자기, 혹시 밖에 봤어? 헤이든은 자기 휘하의 서천군을 모두 이끌고 여기에 왔어."
물론 서석진이 봤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봤어도 제대로 구별했을 리도 없고.
"명령은 이거였어. 간단하게 추려서 설명하자면······."
아베나 마왕국, 타란토스와 우리나라의 국경 근처에서 시초의 의식이 진행 중.
이번 시초의 의식은 제 4황자인 아레스틴 그라티아 타란토스가 진행한다고 함.
그를 암살할 것.
아레스틴은 휘하에 엄청난 무인을 보유함. 우리의 영광스러운 세 기사를 능가하는 수준이라고 사료됨.
따라서 헤이든 소장과 마리아 중장은 각자 휘하의 직속부대를 모두 이끌고 마왕국에 침투하여 암살을 성공시킬 것.
서석진이 벙찌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왜? 그 위험한 곳에 굳이 들어가서?"
"내 말이!"
마리아는 책상을 쾅 내리쳤다. 아직까지 책상 위에 남아 있던 핑크빛 꽃병이 흔들거리며 책상 밖으로 떨어졌다.
잽싸게 받아낸 서석진이 불쌍한 꽃병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 놓았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이 명령에는 아레스틴 황자와 연관된 누군가가 얽혀 있어! 그의 죽음을 바라는 사람이겠지."
분명 그 사람이 뇌물이라도 수뇌부에 줬을 것이 분명하다. 마리아는 이를 갈았다.
다프텐시아와 타란토스는 적국이라고 할 순 없지만, 우군이라고 보기도 애매한 사이다.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처지에 가깝다. 둘 사이에 쓸데없는 충돌이 일어나면 그 땐 제국이 멸망하는 날이니까.
따라서 타란토스의 황자를 암살할 이유는 없다. 이 사실이 들킨다면 다프텐시아와 타란토스는 바로 전시 체제에 돌입할 것이다.
"황자가 죽어나가도 어떻게든 잘 무마시킬 수 있을 만한 권력의 보유자일 거야. 당장 떠오르는 이름은 별로 없지만, 분명 황자의 정적이겠지. 그 사람이 뇌물이든, 이권이든 무언가를 우리 수뇌부에 갖다 바치고 암살을 의뢰했을 거야."
마리아는 감정이 점점 격해지는 듯 언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서석진이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주니, 속이 탄다는 듯 단숨에 들이켰다.
"나한테 서면으로 명령서를 전달했으면 분명 무시할 게 뻔하니까 짜낸 수작이겠지! 내가 그런 쓸데없는 일에 군사를 움직이지 않을 것을 아니까. 그런 명령 따윈 듣지 못했다고 잡아떼면 그만일 테니! 그래서 저 꼴도 보기 싫은 남자를 보낸 거야. 절대 명령을 무시할 수 없도록!"
서석진은 이제야 마리아가 화가 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황자 암살 계획으로 인해, 일시적이지만 다프텐시아 제국에는 오십 명에 가까운 초인의 부재가 발생한다. 아무리 대륙 최강이라는 다프텐시아 제국이라지만 이 전력의 부재는 가벼이 볼 것이 아니다. 초인이 전선에 참여하지 못하는 만큼 다른 병사들이 무수히 죽어나갈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기운이 다 빠진 목소리가 힘없이 답해왔다.
"가야지······가서 임무를 완수해야지······중앙의 명령으은······절대적이니까아······."
"언제 출진해야 하는데?"
"3일 후에······."
세상 다 산 표정으로 중얼대는 마리아의 모습은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다. 항상 기운이 넘치던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군사 국가라지만, 정작 군대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구나.'
하기야 모든 군대에 자치권이 있다면, 지휘관 몇 명이 제멋대로 행동하면 국가에 사단이 날 것이다.
"누나, 술이나 한 잔 할래?"
서석진의 말에 마리아는 갑자기 멍한 표정을 짓더니 벌떡 일어났다.
"수, 술?"
여자를 위로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항상 그에게 매달리는 게 여자 쪽이었으니까. 전 아내에게도 위로의 말을 건넨 적은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 미안했으니까.
이것이 서석진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마리아의 반응은 격했다.
"정말로? 나랑 술 한 잔 하자고?"
"그, 그게 왜?"
문제가 될 발언이었나. 서석진은 움찔했다.
부대에 와서 술을 마신 적은 거의 없었다. 이는 서석진으로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마리아는 활짝 웃었다. 방금 전까지 어두침침했던 얼굴이 원래의 밝은 빛을 찾았다.
"지금 날 위로해 주려는 거지?"
"그, 그건······으, 응."
술을 마시고 싶기도 했고. 서석진은 뒷말을 삼켰다.
그 날, 마리아의 저택에선 한바탕 파티가 열렸다. 오직 단 둘만이 참여한 파티였지만, 마리아의 표정은 활기차기 그지없었다.
"와, 자기 잘 마시네?"
독한 술 세 병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비워낸 서석진은 입가를 닦아내며 씨익 웃었다.
서석진의 주량은 말술이다. 단순히 주량으로만 따지면 그 안도혁조차 서석진을 당해낼 수 없었다.
"더 마시자! 마시고 잊어버려!"
알코올 중독자의 전형적인 발언에 가까웠다.
마리아는 술을 잘 하지 못했다. 초인이니만큼 어느 정도는 마실 수 있었지만, 주량 강한 일반인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금세 취한 그녀가 잔을 들며 깔깔댔다.
"아, 재밌다."
"아, 머리야."
서석진은 눈을 떴다.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주변에는 한 개 중대를 모두 꽐라로 만들 수준의 술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중 절대 다수는 서석진의 뱃속으로 들어갔으리라.
저쯤에 엎어져 자고 있는 마리아를 들어 침대에 눕히며, 서석진은 생각에 잠겼다.
'전장이라고.'
몬스터를 잡아 본 경험은 많았다. 거의 안도혁의 서포트 역할이었지만, 그가 지금까지 겪은 전장의 숫자는 결코 우습게 볼 수준이 아니었다.
따라서 몬스터를 잡을 자신은 있다. 그것을 위해 수련했으니까. 하지만 사람을 잡는 것은 다르다.
'살인이라······.'
암살당할 대상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서석진은 이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군대를 이런 데에 운용하는 것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타국이었다면 불가하다. 오직 통수권자가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다프텐시아 제국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원하지도 않게 잡혀 와서, 원하지도 않는 살인을 해야 하다니.'
새삼 자유가 그리워진 서석진이었다. 한때는 그를 구속하고 있는 마리아가 자유로워 보였지만, 그녀 역시 하나의 사람이라는 것만 깨달았을 뿐이다. 그가 알기로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그런데 동천군과 서천군을 다 동원해서 잡아야 하는 사람이라, 대체 누구지?'
비록 동천군 내에선 가장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서석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동천군을 무시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 스무 명 가량의 군세는 모두 초인이다. 게다가 서천군까지 가세한다면, 그 전력은 소국의 전력 급에 필적한다. 자그마한 성 하나 정도는 반나절 안에 개미 한 마리 남기지 않고 전멸시킬 수 있는 전력인 것이다.
문득 한 사람이 떠오른 서석진이었지만,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이, 설마."
물론 안도혁은 타란토스 제국으로 갔지만.
그만큼 강한 사람이라는 게 안도혁 이외엔 떠오르지도 않지만!
우연이 그렇게까지 겹칠 리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친구는 면식도 없는 황자 따위를 위해 싸워 줄 위인이 결코 아니었다. 성품 자체가 자유인에 가까웠으니까.
'죄도 없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을 위해 싸운다면 모를까. 아니면 엄청나게 많은 보수를 받고 일한다면 또 모를까!'
때마침 마리아가 잠꼬대를 중얼댔다.
"으음······넌 내 거야······아무데도 못 가······."
무슨 꿈을 꾸는지 대강 예상이 갔다. 이불을 덮어준 서석진은 가능한 한 빨리 마리아의 저택을 벗어났다.
마리아가 저런 상태이니 오늘 훈련은 물 건너 갔다.
그렇다면, 오늘은 갈 곳이 있다.
서석진은 동료들에게 들렀다.
"오랜만이에요!"
베르시엘라와 레이나가 동시에 소리쳤다.
서석진과 함께 잡혀온 그녀들은, 의외로 탈출을 시도하지 않았다. 탈영한다고 해도 마리아는 절대 잡지 않을 것이었지만 말이다.
둘은 간호 부대에 배치되었다. 부상병들을 호송하고 응급 처치를 하는 부대인데, 손재주가 좋은 그녀들은 금세 일 잘하는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그녀들이 머문 것이 군대 체질이어서는 아니었다.
'내 신랑감!'
'떠나고 싶은데, 이대로 돌아가면 맞아 죽겠지.'
이런 생각을 하며 그럭저럭 생활하고 있었다. 가끔 서석진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고, 그 괴물과 대단한 진도를 나간 것 같지도 않았기에 근근히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서석진은 현재 상황을 최대한 간단히 추려 설명했다. 애초에 말주변이 별로 없는 그였지만, 뜻 자체는 분명하게 전해졌다.
"그래서 누나랑 전투에 나가기로 했어요. 돌아오긴 하겠지만······."
이 시점에서 둘은 깜짝 놀랐다.
"뭐라구요?!"
전투에 나가는 게 그렇게 특이한 일인가. 분명 큰일이긴 하지만, 군대에 있는 이상 언젠가 전투 한 번은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서석진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둘이 주목한 것은 다른 단어였다.
"누나라고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베르시엘라, 뻣뻣하게 굳어버린 레이나. 서석진은 깜짝 놀라 입을 닫았지만, 입을 떠나버린 말을 주워담는 것은 불가능했다.
베르시엘라는 끝없는 절망에 빠졌다.
'몸이 멀어진다면 마음도 멀어진다더니, 결국 다른 년이 채 갔구나.'
애당초 마음이 가까웠던 적도 없다는 점은 이미 그녀의 머리에서 사라져 있었다.
레이나는 조금 달랐다.
'예스타께는 혼나겠지만, 이걸로 집에 갈 수 있어!'
임자가 생겼다는데 별 수 있는가. 한동안은 혼이 나겠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님은 요정왕도 잘 알고 있으리라. 설명만 잘 하면 열흘 정도의 잔소리로 끝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각기 다른 생각을 지닌 그녀들, 그러나 내뱉는 말은 같았다.
"저는 이만 떠날게요."
"저도 숲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전투에 나간다니, 이제 만나기 어려울 거라 생각하는 거겠지. 서석진은 스스로 낸 오답을 철떡같이 믿었다.
아쉬움은 별로 남지 않았다. 애초에 동료였던 기간조차 길지 않았으니까.
다만 다른 감정이 떠올랐다.
"나 때문에 여기까지 끌려오고, 정말 미안해요."
두 사람의 반응은 달랐다.
"됐어요."
"무운을 빕니다."
한껏 토라진 베르시엘라와 어딘가 기뻐 보이는 레이나. 그 반응에 서석진은 더욱 씁쓸해졌지만, 이제 와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마리아한테는 제가 두 사람이 퇴역한다고 말해 놓을게요. 아마 즉각 수리해줄 거예요."
물론 그냥 떠난다고 해도, 추적조 비슷한 것도 편성하지 않을 것이다.
두 여인은 그동안 조금이나마 정이 든 부대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러 떠났다. 이미 서석진에 대한 일은 가급적 머리에 남겨 두지 않으려 애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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