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과 만남(4)
캘러무스는 협조를 요청했고, 셀리테라는 순순히 오랜 벗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가을날, 바람이 조금 차가워졌다고 생각될 아침나절에 셀리테라로부터 연락이 들어왔다.
무언가 희소식이 있을까 기대에 찬 천룡왕은 체면도 잊고, 마시던 차도 내팽겨치고 다급히 수정구 앞에 앉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려 노력하면서.
기대에 찬 그의 얼굴이 흙이라도 씹은 표정으로 구겨지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수정구 건너편에서 셀리테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혐의가 있는 지룡은 하나도 없어. 다들 그 때 바다 근처에는 있지도 않았다고 하던걸. 우리는 원래 물을 좋아하지 않잖아.
“그건······그렇긴 하지. 그래도 혹시 없을까.”
-정말 없단 말이야. 캘, 굳이 이런 걸로 우리 사이에 거짓말을 하겠니?
결국 답이 하나로 좁혀져 버렸단 말인가. 그것도 가장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거대한 천룡신전 옥좌. 수정구 앞에서 캘러무스는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아아, 정말 귀찮게 됐어. 귀찮아져 버렸어.”
어차피 젊은 녀석 한 명이 싸우다가 다친 일이다. 이렇게 사소한 사건은 그냥 방치하더라도 천룡왕의 책임을 묻는다는 건 어불성설에 가깝다.
문제는 캘러무스 본인이, 다른 용족들이 다 보는 앞에서 해결해주겠다는 뉘앙스를 풍겼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냥 손 놓고 가만히 있다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 겉으로는 별말 하지 않더라도, 뒤에서 수군거릴 것이 분명하다.
이는 작은 파문에 불과하겠지만, 굳건한 댐을 무너뜨리는 것 역시 그러한 어긋남에서 생기는 법이다. 자칫하다간 천룡왕의 지위가 흔들릴 수도 있다.
다른 용왕들과 달리, 이 지위를 정치적 입지에 가까운 방법으로 따낸 캘러무스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차라리 용화(龍化)의 의식을 치러 왕이 되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을.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캘러무스를 보며 셀리테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캘.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그냥 애들 싸움일 뿐이잖아.
“나도 그러고 싶어. 후우, 내가 입만 함부로 열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렇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잖아. 마레를 깨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바다에 무작정 쳐들어가는 건 당장 알에서 막 깨어난 아이라도 안 할 바보짓이고.
“······.”
묘하게 자존심을 긁는 말이지만, 캘러무스는 저게 그런 의도는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마레아도스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니까.
-그나마 말이 통할 만한 해룡, 혹시 하나라도 알고 있니?
‘걱정은 해 주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남의 일이다’라는 시선을 꿋꿋하게 유지하는 셀리테라의 얼굴을 보며 캘러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으면 진작 연락했겠지.’
사실 질문하는 셀리테라도 이미 알 것이다. 그 질문이 얼마나 바보 같으며 또한 하잘것없는지. 마레아도스가 없다면 논제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새삼 둘은 그 조용한 해룡왕의 빈자리가 얼마나 큰 것인지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셀리테라는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설마 해서 물어보는 건데, 진짜 바다에 도전할 생각이니?
“······셀리, 천룡왕 바뀌는 거 보고 싶어?”
수정구 저편에서 폭소가 터졌다. 깔깔거리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천룡신전 내벽을 타고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그 웃음에 악의는 전혀 담겨 있지 않았으나, 캘러무스는 지금 웃음을 받아줄 처지가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 하자. 저엉말 귀찮은 일이지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어떻게든 3년 가까이 둘러대는 방법밖에 없겠어. 더 좋은 방법이라도 알고 있냐?”
-셀리도 그게 좋다고 생각해요!
“스스로를 3인칭으로 지칭하지 마. 쳇, 이렇게 비굴해져야 한다니.”
천룡왕은 옥좌에 깊이 몸을 파묻었다. 별 장식도 없이 딱딱한 옥좌가 오늘따라 더욱 딱딱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보충할 녀석들을 좀 보낸댔지. 그건 어떻게 됐어?”
이번 사안에 비교하면 코딱지처럼 별 볼 일 없는 것이다. 이것은 캘러무스가 화제를 돌리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셀리테라는 그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순순히 그의 의도대로 끌려가 주었다.
-이미 보냈는걸? 선별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는데, 그래도 진짜 괜찮은 애들로만 골랐어.
"그래? 성비는 어떻게 돼?"
-남자 반에 여자 반이야. 리스트 보내줄까?
"아니, 괜찮아. 네가 알아서 했겠지."
-후후, 지금쯤 중앙 숲 언저리까진 도착했을 거야.
캘러무스는 만족한 웃음을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고를 채우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일이다.
암, 중요한 일이고 말고.
인세에는 그와 유사한 것이 없었다. 아마 다른 종족들의 각종 물건들을 참고해 봐도 그와 비슷한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거대한 수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도 길이가 수십 미터가 넘는 수조.
정체를 알 수 없는 각종 기계들로부터 금속 파이프 수십 개가 수조에 연결되어 있었다. 타원형의 거대한 수조는 온통 녹색의 액체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녹색 액체의 중심에 한 생물체가 눈을 감고 위치해 있었다.
천룡족이었다.
부그르르
용의 입에는 그 주둥이를 충분히 커버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튜브가 장착되어 있었다. 산소 호흡기라고 불리는 물건이지만, 용족 외에 다른 종족은 이런 물건을 알지도 못한다.
수조 근처에는 한 중년 남자가 서성이고 있있다. 그는 커다란 안경을 쓰고, 새하얀 백의를 입고 있었는데, 옷은 군데군데 때가 타서 꼬질꼬질해져 있었다. 의복에 조금만 신경을 쓰는 사람이라면 옷 관리를 저렇게 할 리 없었지만, 나태함과 나른함이 동시에 묻어나오는 그의 표정을 본다면 의복 따윈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종류의 사람임을 알 것이다. 애초에 면도도 안 해서 얼굴에도 수염이 제멋대로 자라고 있었으니까.
남자는 귀찮은 듯 수조를 탁탁 쳤다.
"끝났습니다. 나와요."
마치 그 말만 기다렸다는 듯, 수조 속에 있던 용은 눈을 번쩍 떴다. 튜브를 거칠게 뱉어낸 그는 수면 위로 솟구쳤다.
촤아악
-푸아아.
녹색의 점성 있는 액체가 유선형의 몸을 타고 진득하게 흐른다. 끈적한 그 모습은 마치 슬라임을 갈아 넣은 듯 역겹기 그지없었다.
아르키피라는 숨을 몰아쉬더니 수조 옆에 선 사람을 바라보았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이제 끝난 겁니까?
"예예. 다 끝났어요. 복합골절된 앞발은 예전에 다 붙었고, 꼬리뼈와 근육 재생도 99% 완료됐어요. 피부의 일부가 조금 덜 회복됐긴 하지만, 그런 건 그냥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생길 테니 걱정 마시고요. 약은 먹을 필요 없으니까 얼른 집으로 돌아가요. 퇴원 축하해요."
만사 귀찮다는 듯 말을 줄줄이 이은 '선생'. 아르키피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돌려 자신의 전신을 점검했다.
완벽했다. 잃어버린 꼬리가 돌아온 것이다.
'역시 선생님의 실력은 대단하군.'
만족하는 아르키피라를 본 체 만 체 하던 선생은 파이프 담배를 꺼내더니 한 모금 깊숙하게 빨았다.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본 아르키피라는 흠칫했다. 연기를 뻐끔대는 누군가가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탓이다.
'제, 젠장.'
잘려나간 불쌍한 꼬리가 생각났다. 지금쯤 진짜 담뱃갑이라도 되어 있지 않을까.
인간형으로 몸을 바꾼 아르키피라는 선생에게 다가갔다. 그가 다가가자 선생은 그만큼 몸을 뒤로 뺐다.
"어어, 남자가 알몸으로 접근하는 거 적절치 않아요. 거기서 말해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출입구가 선생님 뒤쪽에 있기에······."
"쯧."
비키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 선생은 신발을 질질 끌며 아르키피라의 동선에서 벗어났다. 아르키피라는 고개를 꾸벅 숙인 뒤 황급히 재생실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선생은 파이프를 몇 모금 더 맛있게 빨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시선은 바닥 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 참, 청소를 안 하고 갈 생각은 아니겠지?"
점액질 액체가 가득 담긴 수조에서 나온 아르키피라다. 그 발자국에는 어쩔 수 없이 액체의 잔여물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액체는 다루기에 따라 굉장한 성능을 보이지만, 냄새가 고약하며 어디에 묻으면 잘 지워지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선생은 이 장소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조금 기다려 봤지만, 발자국의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에 다시 보면 진료비를 더블로 받겠다고 궁시렁대며, 선생은 구석에 있던 마대 걸레 하나를 가져왔다.
대충대충 바닥을 문대던 선생은 문득 환자에 대해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 상처, 무기나 발톱에 의한 게 아니던데.'
아르키피라가 말했다. 놈이 끝까지 쫓아왔기에, 덜렁거리는 꼬리를 염동력으로 뜯어내 던지고 도망쳐 나왔다고.
'그 지경까지 왔으면 이미 근육이랑 뼈 대부분이 회복 불능 상태로 파손되었을 터. 결국 상흔에는 염동력이 거의 미치지 않았다고 봐야 하는데.'
선생은 천룡족, 아니 거의 용족 전체에서 확고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선 천룡왕보다도 발언권이 센 남자였다. 용족에서 의사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후계자를 키우라고 이야기를 들었지만, 원체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그가 후계를 들일 확률은 매우 적었다.
그런 이유로 아주 오랜 세월 동안 혼자 환자를 봐 왔던 그는 아르키피라가 얻은 상흔이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있었다.
'보통 인간보다 손이 두 배는 더 클 법한 인간이 주먹으로 때린 상처.'
주먹으로 쳐서 용족의 뼈와 살을 부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상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르키피라가 스스로의 상처를 조작하는 변태가 아니고서야.
상처에 대해 상기하자, 선생의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음, 잠깐. 뭐가 생각날 것 같기도 한데. 분명히 최근 기억은 아니고, 아주 먼 옛날에 들었던 일 중 하나였던 것 같은데.'
기억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다. 오랫동안 맞추지 않은 퍼즐 조각들은 이미 기억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걸 단숨에 조합하는 건 아무래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한참 동안이나 멍하게 파이프를 빨던 선생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모르겠다. 높으신 양반들이 알아서 하겠지."
이렇게 깊게 생각하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는다.
마대걸레를 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선생은 뚜벅뚜벅 재생실 밖으로 걸어갔다.
그의 성향상, 곧 이 일은 기억 속에 묻힐 것이다. 굳이 기억할 필요도 없는 일상에 불과했다.
환자 보는 게 하루 이틀 일인가.
추천, 선작,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당
- 작가의말
어제 올리고 잔 것 같은데, 꿈이었나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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