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드마스터(4)
다프텐시아 제국의 수많은 초인들 중에서, 정점으로 꼽히는 기사가 세 명 존재한다. 그야말로 인간 병기라 불리기에 마땅한 무력을 가진 자들로서, 황제조차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무력이 하늘에 닿았다 하여 천(天)이란 칭호를 부여받은 그들은 각각 마경과 맞닿아 있는 전방의 동쪽, 서쪽, 중앙 근방의 부대에 배치되어, 유사시엔 언제든 출진할 수 있도록 검을 날카롭게 갈고 있다.
동천의 발톱, 마리아 피셔 중장.
중천의 기둥, 윌리엄 하르트만 중장.
서천의 철퇴, 헤이든 슈미트 소장.
단지 무력만으로 장군의 자리를 따낸 입지전적인 인물들이다. 제국 전체에서 그들의 무위가 경외시되고 있으며, 모토로 삼아 수련하는 기사들이 부지기수였다.
한 시대에 이러한 인물이 세 명이나 나오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긴 역사 속에서도 얼마 없는 사례다.
그 중에서도 마리아 피셔는 특이 케이스였다. 여자의 몸으로 초인의 정점에 서는 것까진 그렇다 쳐도, 그녀의 나이가 다른 둘에 비해 너무나도 젊기 때문이다.
황혼에 가까운 윌리엄 중장, 중년의 끝에 매달린 헤이든 소장과 달리 마리아 중장은 고작해야 서른 초반에 불과하다. 아직도 성장할 여력이 충분한 것이다. 게다가 뭇 사내들의 심금을 울리는, 마치 스무 살 처녀와도 같은 싱그러운 미모 역시 그녀의 유명세를 높였다.
세간에는 마리아 중장이 얼음처럼 냉정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어떤 남자도 감히 접근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다. 때문에 그녀는 동천(凍天)의 여왕이라는, 오명 아닌 오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 소문, 틀린 것 같은데."
스튜를 젓던 병사의 말에, 동료 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을 뿐이었나 봐."
"확실한 건 저 남자도 어지간한 독종이군. 나라면 그냥 받아들일 텐데 말이야."
"아서라. 그 말이 여왕님께 들리면 네 척추가 무사할 리 없어."
서석진이 마리아에게 패배한 지 어언 이 주일 째.
그는 매일마다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하, 하지 마! 옷 벗지 마!"
텐트의 끝을 등진 서석진은 기겁하여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앞엔 마리아가 아름다운 나체를 속옷 한 장으로 가린 채, 색기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 그래. 좋으면서."
"안 좋아! 그러니까 하지 마!"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지다간 여성공포증이 생기겠다고 생각하는 서석진이었다.
"이상하네. 외모에는 자신 있는데."
그녀의 말은 상당히 건방지게 들렸지만,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탄탄하게 잡힌 근육 위에, 기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부드러운 살결이 새하얗게 빛난다. 늘씬하면서도 풍만한 몸매는 절로 눈을 돌아가게 만들 정도며, 타고난 동안에 초인이라 마치 소녀와도 같은 얼굴이 일종의 갭을 만들어냈다.
한 마디로, 숙녀의 성숙함과 소녀의 청초함을 모두 가진 여자인 것이다.
뭐 그건 그거고, 서석진에겐 자신의 몸을 노리는 악마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 엄마아.'
하루도 빠짐없이 마리아는 밤에 습격해왔다. 단 하루의 예외도 없이!
힘도 비슷하고 무력은 위인 그녀에게 서석진은 속수무책이었다. 당하지 않게 도망다니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부끄러움은 있는지, 남들 보는 곳에선 육탄돌격까진 하지 않는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도저히 못 살겠어서 어느 날 레이나에게 이런 부탁을 해 본 날도 있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는데, 하루만 제 텐트에서 같이 주무셔 줄 수 있을까요."
연기를 위해서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법했다.
레이나는 서석진의 몸 상태를 잘 안다. 그가 이상한 짓을 할래야 할 수도 없는 몸이라는 것을.
마리아 퇴치 부적으로 쓰이는 게 조금 떨떠름하긴 했지만, 레이나는 약간의 생각 끝에 청을 승낙했다. 어차피 실비티아에게 받은 명령도 있으니까.
그 날 밤, 어김없이 서석진의 텐트를 습격해 온 마리아는 두 사람이 함께 누워있는 것을 보고 안색이 굳었다.
서석진이 억지 웃음을 지으며 입꼬리를 파들파들 떨었다.
"봤지? 그러니까 돌아가. 난 한 여자한테 얽매이는 남자가 아니라서 말야."
어딜 봐도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만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충격을 크게 받은 듯 절망하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리아는 웃음지었다.
"거짓말하면 못 써."
"윽."
초인의 감각은 일반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민하다. 공기 중에 남은 체취와 옷의 구김 등을 살펴본 마리아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것을, 그저 연기라는 것을 꿰뚫어보았다.
"그리고, 교육이 조금 부족한 모양이구나?"
다가온 그녀는 피할 사이도 없이 서석진의 멱살을 잡아챘다.
"넌 내 거야. 어떤 년한테도 주지 않아."
"아니, 그······."
"오늘은 그냥 연기만 했던 거니까 넘어가지만 말이야······."
마리아는 아이나 지을 수 있을 법한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서석진을 살며시 끌어안았다.
"이런 일이 또 벌어지면, 그 땐 가만히 안 있는다?"
차라리 죽여 버린다는 협박이 덜 무서울 것이다. 상상의 나래를 거의 주지 않으니까.
서석진은 대답도 하지 않았고, 어떠한 제스쳐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등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이후에 레이나나 베르시엘라에게 연기를 부탁한 적은 전혀 없었다. 그저 고통받는 날의 연속일 뿐이었다.
그런 날들이 한 달 조금 넘게 지속되었다.
성국은 유래 없는 난황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성녀가 세 번째 신을 언급했다는 것 때문이다.
이 정보는 극비로 취급되어, 주교 급 아래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아니, 주교 중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실정이었다.
안건은 하루도 되지 않아 교황에게까지 올라갔다.
이윽고 혹세무민이 될 수 있으니 입 단속을 잘 해두리는 명령이 떨어졌다. 다른 나라면 혹시 모르지만, 이곳은 성국 이레이시아다. 그녀 외의 다른 신이 언급된다면 난리가 나는 동네인 것이다.
"······."
교황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난리도 아니었다. 신탁이 내렸을 때는 해석을 못 해서 난리였고, 성녀가 나름대로 해석을 하자 그 해석 때문에 또 난리였다. 추기경이고 주교고 간에 다들 혼란에 빠졌다.
당황하긴 교황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일국의 중심이 되는 인물인 그가 어수룩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법이다. 그저 혼자 근엄하게 있는 게 최선이다.
'이레이시아시여. 정녕 그 뜻이 맞는 것입니까?'
수십 번, 수백 번이나 올렸던 기도다. 하지만 일레이시아의 대답은 없었다. 비단 지금뿐만이 아니라 지난 수십 년간 마찬가지였다.
교황은 밀려드는 슬픔에 고개를 떨구었다.
아무리 신앙심이 깊어도, 평생을 헌신했다 해도 일반인은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오직 선택받은 자, 성녀만이 신에게 예언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불공평한가. 단순히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선택받을 수 있다니. 신에게 사랑받는 조건이 그저 태어나는 것뿐이라니.
이제 와서 아쉬운 소리를 할 일은 아니었다. 수행이 부족했던 사제 시절에는 신을 원망할 때도 있었지만.
하지만 가끔 야속할 때가 있었다. 그 신앙심과 공부가 정점에 이르러, 신의 대행자라 불리는 교황으로 추대된 몸이지만, 그 역시 사람에 불과하다.
'신의 목소리를 들을 힘이 없는 나는 어떤 판단을 하면 좋은가.'
교황이 되면 발언 하나도 섣불리 할 수 없다. 종교적 권위의 최고점에 있는 사람이란 그런 것이니까. 망언으로 신도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치달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똑 똑
"성하,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익숙한 목소리였다. 교황은 잠시 눈을 감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들어오시지요."
이윽고 성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타이밍도 참 좋다. 막 근심에 빠져 있을 때 근심의 주인공이 나타날 줄은.
교황은 자리를 권하며 찻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최고 권위자가 따르는 차를 마시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성녀는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성하, 그런 건 제가······."
"됐으니까 앉으시지요. 손님을 대접하는 데에 무슨 귀천을 따진단 말입니까."
쪼르르륵
찻잔에 다홍빛에 가까운 찻물이 스르르 차올랐다. 무려 교황씩이나 되는 인물이 대접하는 음료다.
"권위, 예식, 의식······그런 모든 것들, 그것들은 모두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옷을 입고 나서야 행해지는 일입니다. 예의를 입는 것이지요."
"······."
"옷을 벗으면 사람의 위치는 동등해집니다. 법복을 벗어던지면 저도 그저 노인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기비하적 발언일까. 교황은 말하면서도 스스로가 민망하다고 생각했다.
삿된 마음이 너무 크다. 자신이 걸어온 세월의 반의 반도 채 살지 못한 어린아이에게 느끼는 질투심이라니.
물론 그의 심리 상태를 알 리 없는 성녀에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역시 성하께선 대단하세요. 항상 존경하고 있습니다."
교황은 피식 웃으려던 입가를 간신히 억눌렀다. 지금 입을 열면 비꼬는 말밖에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수행 부족으로 성녀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건 교황이 할 일이 절대 아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이 늙은이를 찾아오셨습니까?"
성녀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세 번쨰를 찾아 떠나려고 합니다."
"······."
교황은 찻물을 홀짝였다. 방금 따른 성녀의 것과 달리, 자신의 차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성녀가 한 말은 보통 발언이 아니었다.
'순례 여행······이라고 봐야 할까.'
순례자들이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가르침을 전파하고, 병자를 치료해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보통은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가거나 성소를 찾아 떠나는 등 깨달음을 위한 길이지만.
그러나 최근에 순례자들은 전 대륙을 돌아다녀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치안이 나쁘기 때문이다.
'성녀라고 밝힌들 도적들이 그냥 넘어갈 리도 없을 것이고.'
성녀는 바보가 아니다. 이런 위험을 모를 리 없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말함에 있어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다. 이미 결심을 굳히고 왔다는 증거였다.
"세 번째의 신이 나타났다. 그건 아직 가설에 불과한 말이지 않은가요. 교차검증도 제대로 되지 않은."
"그렇지만 소녀는 확신하고 있어요. 이것이 분명 이레이시아 님께서 내려주신 사명일 거에요."
지금까지의 신탁은 모두 직관적이었으니 해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이젠 해석할 수 없는 신탁이 나왔다.
그렇다면, 어쩌면 성녀의 감이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그 신은 어떤 분입니까. 인간의 탈을 쓰고 계신가요, 아니면 자연에 깃들어 계신가요. 어쩌면 바닷속에 잠들어 계실 수도 있겠지요. 목표가 무엇인지도 명확하지 않은데 길을 떠나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성녀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확실한 게 아니라 아무에게도 얘기는 드리지 못했지만······."
"음?"
이건 처음 듣는 소리다. 교황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신탁을 받는 꿈을 꾸었을 때, 그 때 저는 꿈 속에서 하늘을 보고 있었어요. 제가 밟은 땅은 모두 어두컴컴했고, 일부만 햇빛이 비추고 있었죠. 하지만 그 태양이 비치는 하늘 역시 새카맸어요. 먹구름으로 가득했었죠."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가는 내용이다.
"그 때, 구름이 걷히고 어떤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어요. 네, 분명 그랬어요."
"······왜 미리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분명 그 형체가 이레이시아 님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분명 오늘 아침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렇다면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긴 했다. 결국 중요한 건 신탁 내용이니까.
"형체는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어요. 휘광이 너무 강해 눈을 뜨기도 어려웠죠. 이레이시아 님께서 말씀하신, '누구보다 찬란하게 빛날 세 번째'라는 말은 분명 그 존재를 의미하는 것일 거에요. 아아, 왜 생각을 못했을까요."
"하지만, 그렇게 밝게 빛났다면 모습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렵지 않습니까?"
"맞아요.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기억해요."
성녀는 손뼉을 쳤다.
"분명, 빛은 그 존재의 '머리'에서 나고 있었어요. 마치 거울이 햇빛을 반사하는 것처럼요!"
추천, 선작,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당
- 작가의말
이번 챕터도 끝입니다. 그냥 두 개 하나로 묶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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