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10)
한참 동안이나 문을 두드리던 차였다.
끼이이이익
녹슨 경첩이 비틀리는, 듣기 싫은 소음이 귀를 찔렀다. 경첩을 교체하는 건 고사하고, 기름칠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듯 소리는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하필 어둠이 내리고 있는 시간대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불씬 풍겨왔다.
문을 연 것은 가무잡잡한 피부의 노인이었다.
"······뉘시오?"
촌로라는 말을 그보다 더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평생 농사일을 하며 태양빛을 받아 피부는 늙수그레하기 그지없었고, 주름 가득한 손은 쩍쩍 갈라져 가뭄이 든 땅을 보는 듯했다. 제멋대로 난 수염에는 힘이 없었고, 그저 늘어질 뿐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혹시 촌장님이세요?"
"그렇습니다만······누구신지?"
루나는 일행을 소개했다.
"로글란트 백작님의 명을 받아 온 수사단입니다. 며칠 전에 영지에 도둑이 들어, 이를 탐문하고자 돌아다니고 있죠."
노인의 흰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고개를 넙죽 숙여왔다.
"그렇군요. 우선 안으로 들어와서 이야기하시겠습니까요?"
노인은 순순히 그들을 집 안으로 안내했다. 등잔을 들고 절뚝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에선 왠지 모를 한기가 느껴졌다.
루나가 손짓했다.
"자, 들어가죠!"
끼이익 끼이익
오래된 바닥의 판자가 사람이 올라가자 비명을 질렀다.
집의 내부는 외부에서 본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곳곳에 벌레 먹은 구멍이 나 있었고, 구석에서 쥐가 무언가를 갉작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음산하고 어두침침한 분위기와 맞물려, 약간의 공포감까지 자아낼 정도였다.
긴장하지 않는 것은 안도혁 혼자뿐이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태평하게 일행의 뒤를 따랐다.
노인은 테이블에 일행을 앉힌 후 따뜻한 백탕을 가져왔다.
"대접할 게 없어서 죄송합니다요. 술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신경 쓰지 마세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요."
오히려 이런 상황의 마을에서 술을 대접받는 게 이상한 일이다.
아까 전, 술집에서 마신 맥주는 술이라기보단 곡물에 가까웠다. 걸쭉한 죽처럼 되어 있어, 식사 대용으로 쓸 법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막입인 안도혁은 그런 것이라도 그냥저냥 마셨지만, 두 동료는 구역질을 참느라 애썼다. 먼 옛날에는 그런 술도 있었다고는 하지만······.
백탕을 한 모금 마시며 루나가 입을 열었다.
"집안이 조용하네요. 가족들은 다른 곳에 있나 보죠?"
"자식들은 모두 결혼해서 다른 집에 살고 있지요. 아내는 타계한지 좀 되었습니다요."
"그렇군요. 정말 죄송해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요. 20년도 더 지난 일입죠."
집안은 조용했다. 여느 도시의 가정집에 가면 으레 있을 법한 시계도 없어, 째각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의 숨소리와 쥐가 찍찍거리는 소리 외에는 정적에 가까웠다.
정적을 깨고 루나가 말했다.
"저희가 왜 왔는지는 짐작하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방금 전에 말씀하셨지 않습니까요. 탐문 수사 중이라고 하셨습죠."
"제가 그걸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노인은 루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늙수그레한 안광은 주름진 눈꺼풀에 뒤덮여,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며칠 간 이곳을 왕래한 사람은 기사님들뿐입니다요. 그분들도 오셔서 똑같은 것을 물어보셨지요. 외부인이 지나간 적이 있냐고 말입죠."
노인은 부들대는 손을 테이블 위로 천천히 올렸다. 루나는 그 손이 긴장에 의한 것인지, 노인이면 으레 가지고 있는 수전증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도 똑같이 말씀드렸습니다만, 최근에 마을에는 어떤 외부인도 출입한 적이 없습죠. 주민들만 오고 가며 채집이나 사냥을 좀 했을 뿐이지요."
단호한 그의 어투에서는 어떠한 거짓도 없다는 듯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노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단단함이었다.
"대답이 되었습니까요?"
"여전히 말을 돌리시네요."
루나는 식어 버린 백탕을 한 모금 더 머금었다. 긴장에 목이 타는 듯했다.
"촌장님. 솔직하게 말씀하시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을게요. 저희는 그냥 물건만 찾아가면 그만인 일인걸요. 도둑들이 저희를 보고 도망갔다고 보고할 수도 있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원."
루나는 어떠한 종류의 확신으로 가득했고, 촌장은 계속 회피하고 있었다. 안도혁은 이런 모습을 보고 의아함에 찬 시선을 보냈다.
"대체 무슨 말입니까?"
"미안해요. 조금만 있다 설명해 줄게요."
"흐음."
안도혁은 자신 몫의 백탕을 단숨에 들이켰다. 사발에 담겨 있던 물이 삽시간에 그의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그 모습을 본 에스턴도 백탕을 홀짝홀짝 넘겼다.
노인이 말했다.
"손이 곱고, 얼굴이 하얗고 아름다우시군요. 분명 높으신 분의 자제임이 틀림없겠소."
뜬금없는 말에 루나는 당황했다. 노인의 어조도 지금까지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혹시 굶어 본 경험이 있소?"
"예?"
"우리 지역은 담배 농사를 짓소. 말은 좋지요. 고부가가치 상품이니. 작물 가치가 폭락할 일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담배 농사라는 건 말이오. 해에 따라서는 농사 자체가 불가능할 때도 있다오. 그걸 감안해서 세금은 그 해에 떼어가지 않지만, 문제는 그 때 먹고 살 길이 없다는 것이오."
"······."
"다른 작물을 심으려 해도 소용이 없소. 담배만 심어왔던 농토에선 타 작물이 자라질 않기 때문이오. 게다가 우리 마을 주변 농토는 모두 담배 외의 작물 재배가 금지되어 있소. 모든 땅이 영주님의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게 무슨······."
"밀도, 보리도, 콩도 심을 수 없는 죽음의 땅. 하지만 담배만은 항상 넘쳐나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살기 위해선 어떤 길을 택해야 하겠소이까. 응?"
촌장의 목소리는 슬슬 악에 받쳐 있었다. 노인의 쉰 목소리가 음산하게 실내를 덮어갔다.
"담배 농사는 말 그대로 한 철이오. 그 철에 재배한 잎은 영주님께서 높은 가치로 쳐주시지. 하지만 그 한 철을 제외하면? 나머지 반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 넓은 땅에서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살지요?"
"돈을 아껴서 생활하면······."
"말도 안되는 소리 집어치우시오. 그 돈이 얼마인진 알고 하는 말씀이오? 과연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어느새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마다하지 말아야 하오. 내 가족, 내 친구, 내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는 못 할 것이 없다 이거외다."
루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갑자기 밀려오는 현기증에 테이블 모서리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갑자기 이게 무슨?'
옆을 보니, 에스턴 역시 눈이 풀려 있었다. 그렇다면 도출될 수 있는 결과는 하나.
'야, 약을 탔구나!'
자세히 보니 촌장은 자신의 몫인 백탕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그릇에선 증기조차 뿜어지지 않았다.
뒤쪽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주저앉는 소리가 들린다. 루나는 차마 뒤를 돌아볼 용기가 없었다.
'도혁. 당신까지도······!'
어째서 좀 더 주의하지 않았을까. 어째서 일행에게 미리 언질을 주지 않았을까?
풀리는 눈을 들어 촌장을 쳐다보던 루나는 경악했다.
주름이 깊게 패인 노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져간다. 양 입꼬리는 위로 올라가고, 눈은 팔(八)자로 찢어지고.
분명하다. 노인은 악의에 가득 찬 웃음을 짓고 있었다.
루나의 뒤쪽에서 안도혁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말해줘도 되겠지요. 무슨 일입니까."
루나는 울음을 꾹 참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마을에······한통속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분명 마을 사람 중 몇 명이 범인일 거라고······그래서 촌장을 시켜 자수하길 권고했던 건데."
쾅
그녀의 머리가 테이블에 떨어졌다. 하지만 아직 루나는 의식을 잃지 않았다. 고통에 의식이 아주 약간은 또렷해졌다.
"생···각이 짧았······어요. 이 마을 전체가 한통속이었다구요. 마을 전체가!"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휘파람을 불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느새 좁은 노인의 집안은 사람으로 꽉 찼다.
"이제 와서 숨길 필요도 없겠지만, 추리력이 대단하시오. 그러고 보니 얼굴이 상당히 반반한데."
사내 몇이 낄낄 웃었다.
"귀족의 여식이라니. 평생 가도 우리는 품어볼 수 없을 텐데."
"흐흐흐."
흐려져가는 의식을 루나는 간신히 붙잡았다. 하지만 손에는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다리는 사시나무처럼 떨려댔다.
'아, 안 돼.'
예전 여관에서 있었던 일과는 다르다. 사람의 숫자도 다르고, 무엇보다 그를 지켜줄 안도혁이 없다.
촌장이 말했다.
"남자 둘은 죽여 뒷산에 묻고, 여자는 자네들 마음대로 하게."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사내들은 우악스럽게 달려들었다. 한때는 분명 밭을 가는 데 쓰였을 농기구를 들고서.
그리고 그 때, 누군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렇군. 잘 들었다."
추천, 선작,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당
- 작가의말
역시 이번 챕터 늘어진다 흐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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