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의 숲(6)
‘아, 맞다!’
생물에게는 각기 허락된 시간이 있다. 사흘밖에 못 사는 하루살이, 땅속에서만 수년을 사는 매미 같은 곤충부터 시작해서, 수백 년의 세월을 살 수 있는 거북이까지.
지성을 가진 종족 중에서도 타 종족과는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보통 장생종이라 불리며, 다른 종족이 꿈도 꿀 수 없는 세월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이 긴 수명에는 단점 역시 존재한다. 몸의 퇴화를 막기 위해, 정기적으로 휴면(休眠)을 취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저번 모임에서 마레가 그런 뉘앙스의 말을 했던 것 같기는 하다. 그다지 특별한 일도 아니라 잠시 잊고 있었건만.
“마레가 보통 얼마나 잤었지?”
-휴면이란 게 정해진 일자가 있는 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보통 3년 정도는 기본으로 주무시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되면 해룡 쪽에 도움을 구하기가 애매해진다. 캘러무스는 신음을 흘렸다.
‘마레 없이 해룡들에게 접근하는 건 미친 짓인데.’
아무리 용족을 다스리는 세 용왕 중 한 명의 말이라고 한들, 바다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그들이 천룡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시도하지 않아도 뻔한 일에 심력을 낭비할 만큼 캘러무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셀리 쪽에서 범인이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럼 셀리테라님께 전언을 넣겠습니다.
“아니다.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직접 움직이마.”
심란함이 가득한 날갯짓이 창공에서 이어졌다. 힘없이 펄럭이는 거대한 백룡의 등은 필요 이상으로 좁아 보였다.
숲에 산다는 것은 그 삶의 방식을 숲에 맞춰야 한다는 말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것은 곧 ‘문명화’된 생활이 어렵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루나는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온통 나무며 풀뿐인 이 거대한 우림에서 뭘 기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도로도 깔려있지 않아 마차도 못 모는 곳에서 무엇을 바랄까.
그런 그녀의 상식은 한순간에 깨졌다.
숲에는 분명히 인공적인 도로가 없다. 그러나 자연이 만들어낸 제 3의 길이 존재한다.
조금 전, 일행이 각자 짐을 챙겨 모두 모였을 때 레이나가 말했다.
“그럼, 제가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레이나는 손뼉을 몇 번 치더니 알 수 없는 언어를 속삭이고, 이내 입가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삐이이익
휘파람 소리가 숲을 가로질렀다.
맨 처음에, 저 여자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일행이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안내를 맡은 사람이 할 만한 행동은 아니니까.
물론 이 키 큰 엘프가 괜히 바보짓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스스스
숲이 어수선해졌다. 곳곳에서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저 바람인 줄만 알았으나, 다음 순간 나무들이 우직거리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나뭇가지와 뿌리가 삐걱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나무들의 모양이 기묘하게 비틀리기 시작했다.
와직 와지직
톱질한 나뭇가지를 뜯어내는 소리를 수천 배로 증폭하면 저런 소리일까. 마치 비명을 지르는 듯한 숲의 움직임은 어딜 봐도 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지진이나 산사태가 일어나도 저처럼 어색하지는 않을 것이다.
에스턴이 감탄에 찬 숨소리를 토했다. 어린아이처럼 기대에 찬 표정의 그를 보며 안도혁이 말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말로만 들어왔기에 저도 확신하진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곧 재미있는 걸 보시게 될 겁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데 별일이 있진 않겠지.
아무래도 해는 없는 것 같다고 판단한 안도혁이 담배를 한 대 피울까 말까 고민할 무렵, 눈앞에는 있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레이나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길이 열렸습니다. 자, 여러분. 탑승하시죠.”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거대한 사각형의 탈것이 있었다. 언뜻 보면 마차와도 유사한 생김새였지만, 이곳엔 바퀴가 달려 있지 않다. 탈것의 안쪽에는 거대한 나무 기둥이 통과하고 있었는데, 인간 수십 명 정도의 무게로는 끄떡하지 않을 만큼 견고해 보였다.
탈것을 통과한 기둥은 하늘로 가파르게 솟아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기둥은, 창공의 어느 지점에서 완만한 가까운 하강세로 어느 한 지점까지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 거리는 실로 만만한 것이 아니라, 말을 타고 이동한다고 해도 하루는 넘게 걸릴 만큼 길었다.
난생 처음 보는 형태의 물체에 일행이 우물쭈물 올라타자, 레이나 역시 따라 탑승했다.
“떨어질지 모르니 짐은 뒤에 있는 공간에 두시면 됩니다. 여러분이 탑승하진 좌석 앞에 안전바가 있을 겁니다. 안전을 위해 꼭 잡아주세요.”
각자가 앉은 자리 앞에 나무로 만든 조잡한 손잡이가 있었다. 일행이 모두 그것을 잡자, 수레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컹 덜커덩
상당히 느린 속도였다. 탈것은 수직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하늘로 천천히 올랐다.
어떤 원리로 가능한지는 알 수 없었다. 공학에 재능도 흥미도 없는 일행은 호기심을 곧 접어두었다. 아니,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땅이 점점 멀어져갔다. 문제는 적당히 멀어지는 게 아니었단 점이다.
땅이 조금 멀어지는 건 웃을 만 했다. 십여 미터를 넘게 올라가도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사람이 점처럼 보일 정도로 높이 올라간다면?
“······.”
하염없이 올라가는 탈것에 앉아 있기를 몇 분이 지났을까.
저 멀리 땅이 보인다. 사람은 보기도 힘들고, 숲의 거목들이 점처럼 작게 보일 만한 고도였다.
이곳에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렇게 높이 올라오면 없던 고소공포증도 생길 판이다. 실제로 서석진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기둥을 따라 올라가던 수레가 어느덧 움직임을 멈췄다.
덜컥
안도혁은 지금까지 타고 온 나무 기둥을 흘끗 바라보고, 탈것의 경로에 놓인 길다란 기둥의 모습에 시선을 돌렸다.
지금까지는 오르막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눈앞에 길게 늘어진 길은 내리막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지만, 왜인지 상상이 되었다. 안도혁은 살짝 떨리는 손으로 입가에 담배를 가져갔다.
“다들 꽉 잡아.”
“네?”
“무슨 말이야?”
그의 말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아니면 레이나가 ‘이거 왜 안 움직여’라며 탈것의 앞을 탕탕 친 게 시발점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탈것이 급강하를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고속으로 레일을 따라 낙하하는 탈것의 속도는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었다.
슈아아악
바람이 얼굴 옆을 세차게 때리며 지나갔다. 낙차로 인해 발생하는 속도는 바람이 얼굴을 때리듯 했으며, 위장이 급격하게 쏠리듯 뱃속이 철렁했다.
고속으로 움직이는 탈것에서 이동하는 경험은 무시무시했지만, 그 이상의 짜릿함을 선사했다. 이런 경험을 누가 해 본 적이 있을까.
뱃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스릴감에 루나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꺄아아아!”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요정들은 이 ‘길’을 놀이기구로 이용하는 경우가 상당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까지 역동적인 스릴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달리 없을 테니까.
언뜻 옆에서 누군가가 저주를 퍼붓는 소리가 들린 것 같지만, 루나는 자신의 즐거운 비명에 취해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쿠르르르르
45도 각도로 하강하고, 급선회하듯 옆으로 길을 틀고, 산의 중턱을 미끄러지듯 내달리고.
그럼에도 속도가 거의 줄지 않았다. 일행을 태운 수레는 처음과 별반 다르지 않은 속도로 힘차게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간을 내달렸을까. 어느 시점부터 속도가 확연하게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지금껏 물리 법칙조차 무시할 만큼 격하게 움직였다는 사실이 거짓말인 것처럼, 탈것은 땅으로 이어지는 레일에 천천히 안착했다.
루나가 아쉬움을 토로했다.
“조금 더 타고 싶다아.”
탈것의 이용시간은 그다지 길지는 않았다. 초고도에서 중력의 힘을 이용해 목적지에 도달하는 이동수단인 만큼, 마차 같은 것보다 훨씬 이동 시간이 빠른 것이다.
다만 거기에 탑승자의 편의 같은 것은 그다지 고려되지 않았다.
“우웨에엑!”
서석진이 열심히 숲에 비료를 뿌려댔다. 안 그래도 하얀 피부가 더욱 하얘져서 마치 시체처럼 보이는 그의 얼굴은 딱할 정도로 핼쑥해져 있었다.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안도혁이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아침엔 꿀빵을 먹었구나.”
“오로로로록!”
의외로 다른 사람들은 초인조차 아닌데도 멀쩡했다. 요정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일반인인 루나조차 들뜬 표정 외엔 아무런 이상을 보이지 않았다.
신이 난 그녀는 레이나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이런 거 처음 타 봐요! 나중에 또 탈 수 있을까요?”
레이나는 자신보다 머리 몇 개는 더 작은 꼬마를 보며 웃음지었다.
“아쉽게도 그렇게 자주는 못 이용해요. 숲의 에너지를 끌어 쓰는 거라, 충분한 휴식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게다가 가끔 재미로 이용하는 녀석들까지 있어서 말이지. 레이나는 뒷말을 삼켰다.
한참 동안이나 거름을 뿌려대던 서석진이 간신히 비틀대며 일어날 무렵, 지금까지 그들을 운반해 주었던 탈것에 이변이 발생했다.
우지지직
“어어?”
“어떻게 된 일이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나무 레일부터 시작해서, 그들이 직접적으로 탄 수레가 모두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껍질이 벗겨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그것들은 모두 분해되어, 이내 거대한 양의 톱밥 부스러기만 남겼을 뿐이다.
그 톱밥조차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인위적인 힘이 개입한 것처럼 스르르 흩어져 사라졌다. 당황한 이들에게 레이나가 설명했다.
“숲의 에너지를 이용했으니, 자원을 다시 숲에 돌려줘야 해요. 이렇게 해야 나중에도 또 이 길을 이용할 수 있게 되니까요.”
그녀는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어때요. 여러분, 즐거우셨나요?”
한 명이 삿대질 비슷한 걸 하는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만족스러움을 표하고 있었다.
“자, 다시 출발하죠!”
추천, 선작,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당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