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 경(10)
불길함을 가득 담은 레틴의 음성은 계속 이어졌다. 그것은 처음엔 분명 비명이었으나, 안도혁이 도착할 즈음엔 울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안도혁은 대번에 상황을 인지할 수 있었다.
"이, 이건."
사람의 몸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출혈이 바닥을 적셨다. 피를 따라 시선을 이동하니, 한 사람이 나뭇가지에 복부가 꿰뚫려 있는 것이 보였다.
안도혁은 그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다.
"제, 제이."
소년은 힘없이 웃었다. 관통된 복부에서는 물론, 그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피거품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안도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된 건가."
레틴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지진으로 쓰러진 나무가 덮쳤어요. 기사들이 도와줘서 나무에 깔리는 사태는 면했지만, 나뭇가지가······."
이후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안도혁은 셀리테라를 내팽개치고, 제이의 곁에 조심스레 앉았다.
"콜록. 대, 대장님······?"
"······."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한때, 미숙했을 시절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혼자만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없었기에,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의 사상자를 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안도혁을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없었다면 마을의 존립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을 테니까.
지금 역시 마찬가지다. 일련의 상황에서 안도혁에게 고마움이 아닌 원망을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안도혁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내가.'
소년 시절과는 다르다. 힘은 원숙함에 접어들어, 세상 누구도 그를 위협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따라서 그가 원하는 바는 무엇이든 이룰 수 있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게 대체 뭔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존재가 손 안에서 힘없이 무너져간다.
덜덜 떨리는 제이의 손, 안도혁은 그것을 붙잡았다. 조심스러웠지만 아주 굳세게.
"여기 있다. 이 안도혁이 여기 있다."
"헤헤헤. 대장님······."
소년은 죽어가고 있었다. 몸에서 혈액이 점차 빠져나가, 체온이 떨어지는 게 시시각각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제이는 용케 입을 열었다.
"제, 제가 전에, 쿨럭. 왜 이름이 제이인지······아, 알려 드린다고 했죠."
이런 상황에서 그런 것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도혁은 지긋이 고개를 숙였다.
"들어 주겠다. 내가 영원히 기억하겠다."
"노, 농가의 아이는 많아요. 다섯 명도······열 명도 흔하죠. 그렇기 때문에, 쿨럭. 이름은 주먹구구식으로 지어지곤 해요."
제이는 처량하게 웃었다.
"집안의 열 번째 아이. 그래서 제이(J)에요. 아무런 특징도, 애정도 없는 이름. 흔하디 흔해 빠진 그런······."
안도혁의 눈이 질끈 감겼다.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아이가 전쟁터에서 덧없이 죽어간다. 분명 살아 있으면 앞길에 수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어린 아이가.'
사람의 죽음은 수없이 봐 왔다. 하지만 이만큼 충격적인 일은 거의 없었다.
제이의 몸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떨어진 체온에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추, 추워. 누가 담요를 좀······."
안도혁이 눈짓하기도 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망토를 끌러 내놓았다. 소년의 몸에 모포가 차곡차곡 덮였다.
소년은 눈물을 흘렸다. 고통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주, 죽고 싶지 않아요. 대장님.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아직 해 보고 싶은 것도 많은데······."
안도혁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내 그는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치료약! 치료약을 가진 자는 없는가!!"
레틴이 울며 주저앉았다.
"저런 상처는 치료 못 해요. 신관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단순한 치료제론 어림도 없다구요······."
"닥쳐라. 시도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모두가 고개를 떨구었다. 포션을 꺼내 제이의 상처에 붓는 자도 있었으나,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각혈은 계속되고 제이의 눈에선 점차 빛이 사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내장 관통상을 단순한 포션으로 어떻게 치료할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알 일이다.
이를 갈던 안도혁은 힘없이 늘어져 있던 셀리테라를 잡아들었다.
"네가 이 사태를 초래했으니, 네가 해결해라. 있는 방법, 없는 방법을 모두 동원해서 저 소년을 치료해!"
셀리테라는 부들부들 떨었다. 사신이 목을 움켜잡는 것처럼 공포스러운 게 이 세상에 있을까.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다. 너만의 죽음으로 사건이 종식된다는 어설픈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안도혁의 눈빛이 분노로 불타올랐다.
광기에 가까운 투기, 아니 살기가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자리의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무언가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어차피 안도혁은 셀리테라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셀리테라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 그럼 셀리를 살려 줄 거에요?"
"······뭐라고?"
모든 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런 중상을 치료할 방법이 있단 말인가?
셀리테라는 대답을 구하는 듯 안도혁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사실 이런 문답 따윈 무의미했다. 어차피 강자는 안도혁 쪽이다. 약속을 일방적으로 어겨도 문제 삼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안도혁은 잠시 눈을 감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한다. 네가 내게 행했던 위해는 없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제이를 살려 주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럼 조, 좋아요."
셀리테라는 안도혁의 눈치를 흘끗흘끗 보면서 제이의 옆에 다가섰다. 상처에 박힌 나뭇가지를 뽑아낸 그녀는, 곧 제이의 배에 손을 쑤셔박았다.
푸욱
"우아아악."
고통에 찬 신음이 노인의 그것처럼 힘없이 들려왔다.
갑자기 벌어진 이상 사태에 안도혁은 당장 셀리테라의 목을 뽑아버리려 했으나, 셀리테라는 황급히 소리쳤다.
"아, 아냐! 치료하는 거에요! 내장을 직접 접붙이기하는 거에요. 다행히 상처가 신경을 건드리지 않았으니 봉합은 손쉬워요."
혹시나 오해가 생길세라 잽싸게 설명을 마친 셀리테라는 이빨을 딱딱 부딪히며 상처에 집중했다.
인간 따위에게 쓸 기술이 아닌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셀리테라는 잠시 후 손을 뽑아내더니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뭐 해? 있는 포션 다 가져와. 내장은 붙였지만, 근육이랑 피부를 이대로 놔두면 과다 출혈로 죽는단 말이야."
몇 병의 포션이 셀리테라에게 넘겨졌다. 셀리테라는 포션의 내용물을 보며 한숨을 푹 쉬더니, 곧 제이의 상처에 들이부었다.
"저급 포션이지만 어쩔 수 없지. 이 정도로도 치료가 되긴 할 거야."
다프텐시아의 기사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기사들에게 지급되는 포션은 제국에서도 최고로 치는 수준이다. 날아간 팔다리의 출혈도 순식간에 멎게 만들 정도의 치료약인 것이다. 저렇게 폄훼할 만한 가치의 물건이 아니다.
'평민은 구경도 못 할 물건인데······.'
'용족은 더 좋은 포션을 가지고 있는 걸까?'
잠시 후, 제이의 헐떡이던 호흡이 잦아들었다. 안색은 평온해졌고, 호흡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누가 봐도 편안하게 잠든 모양새였다.
셀리테라는 피로 젖은 손을 대충 닦아내며 말했다.
"이제 됐어요. 무리만 하지 않는다면 며칠 내에 일어날 거에요. 그러면······."
안도혁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긴장이 서려 있었다.
셀리테라는 바보가 아니다. 저런 약속 따위, 손바닥 뒤집듯 엎어버릴 수 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이곳에는 약속을 공증해줄 사람도 없을 뿐더러, 무엇보다 약속 하나 어긴다고 안도혁에게 갈 패널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심정적으로는 실낱 같은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살 수 있는 길이 이것밖에 없었으니 치료를 행했던 것이다. 썩은 동앗줄이라도 잡아야만 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 길은 썩은 동앗줄이 아니었다.
"뭐 하는가? 당장 떠나지 않고."
"저, 정말로······?"
머뭇거림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셀리테라의 잘못만은 아니리라. 허나 안도혁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마음 바꾸기 전에 사라져라. 약속 하나 안 지키는 인간은 아니니까."
그 말을 끝으로 안도혁은 셀리테라에게서 시선을 끊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몇 걸음 가더니 다시 안도혁을 돌아보고, 움직이더니 다시 돌아보고를 멈추지 않았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셀리테라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발목이 끊긴 다리로 힘겹게 바둥거리면서.
안도혁은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포션을 건네는 기사를 제지했다.
"긁힌 상처다. 이런 건 조금 있으면 낫는다. 다른 부상병들이 있으면 쓰도록."
정확히는 포션이 통하지 않는 것이지만. 기사들도 겸언쩍은 듯 포션을 다시 갈무리했다.
초인에겐 약이 듣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이 그것을 지급받는 것은 그들 자신이 쓰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위험에 처하면 사용하기 위한 용도인 것이다.
일단 닥친 상황은 모두 마무리되었다. 안도혁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다른 부상자는 없나? 내가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군."
멸마군과 기사들이 한 목소리가 되어 외쳤다.
"없습니다!!"
정확히는 있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돌멩이에 긁힌 정도의 상처이며, 전장에서 그 정도는 부상으로 인정받지도 못한다.
안도혁은 레틴을 바라보았다. 울음으로 가득했던 그 얼굴은 어느새 웃음이 피어 있었다.
"이걸로 아무도 죽지 않았다. 무사히 말이다."
"다 형님 덕분입니다."
안도혁은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물었다.
"적성에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만, 그래도 얻은 것이 아주 없지는 않구나. 다만 이런 의뢰는 앞으론 자제해 주도록 하라."
"그래도 도와주실 거잖아요? 형님."
"흠."
아니라고 부정하진 못했다. 안도혁의 얼굴에 오랜만에 미소가 돌아왔다.
"그래서 말인데, 부탁이 한 가지 있다."
"그게 무슨······?"
"여기 기사들, 모두 돌려보내 줘라."
"예에?!"
청천벽력 같은 말에 레틴은 상당히 당황했다. 이런 사태는 상정하지 못했다. 분명 자신의 말을 따르겠다고 했는데.
안도혁이 그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타란토스에 이들을 압송하면, 처우는 어떻게 되나?"
"어······아마도 포로로 취급받긴 하겠죠? 기사들이라 그렇게 심한 대우는 안 받겠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외교 협상의 카드로 쓰일 일이겠지. 그 동안은 계속 감금 신세일 것이고. 또한 그것이 몇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레틴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정치엔 능숙하지 못하시다면서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레틴은 괴물 형님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힘이 단순히 센 사람에서, 힘만을 의존하지 않는 사람으로.
"내 친구와 그 동료들이다. 그렇게 구금되어 있는 것은 보고 싶지 않다."
순전히 감정적인 모습이다.
방금 제이가 죽을 뻔한 모습을 본 것에 충격이 컸겠지. 그렇게 생각한 레틴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쉽게 됐네요. 저들을 모두 압송해 간다면 다음 황제 자리는 제 것임이 거의 분명해질 텐데 말이죠."
레틴의 말은 사실이었다.
역대 그 어떤 황제도 시초의 의식에서 이와 같은 위업을 해내지 못했다. 정확히는 안도혁이 해낸 것이지만, 그 공이 레틴에게 돌아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만약 거기에 내 힘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나서주마."
"아니, 이런 의뢰는 자제해 달라면서요?"
"의동생이 황제가 되는 것을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깊게 들이마신 담배 연기가 뿌옇게 하늘을 수놓았다. 레틴은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알겠어요. 내겐 정천 경이 있으니까. 황제가 될 사람의 포부는 커야겠죠."
그렇게 말한 레틴은 뒤돌아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됐으니, 모두들 제국에 복귀하도록 하시오. 정천 경께서 자비를 베푸셨소. 모두 조심해서 다프텐시아로 돌아가시오."
그 말에 기사들의 눈빛이 돌변했다.
척 척
다프텐시아의 기사들은 하나 둘씩 정렬하기 시작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동작이었다. 오와 열을 정확히 맞추어 서는 그들의 모습은 잘 훈련된 군대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듯 일사불란했다.
기사들 앞에 선 마리아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적을 자비롭게 용서하신 정천 경과, 미래의 타란토스 황제께 경의를 표합니다."
레틴은 살짝 웃어보였다. 저런 극찬도 가끔은 나쁘지 않았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 주시오."
이 말은 안도혁에 대한 소문을 널리 퍼뜨려 달라는 말도 되었다.
타란토스 제국엔 단순한 초인의 경지를 넘어, 전쟁 억지력 수준의 남자가 있다. 이 사실이 퍼진다면 당분간 다프텐시아의 적의는 물론, 레틴에 대한 물리적 위해는 전혀 없어질 것이다.
"물론입니다. 기사된 자로써 어찌 은혜를 원수로 갚겠습니까. 앞으로 다프텐시아는 타란토스와 영원한 우호 관계가 될 것입니다."
고작 장군 한 명의 말로 외교 관계가 바뀔 리는 없다. 또한 영원한 우방 따위는 없는 법이다. 마리아도, 레틴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들먹이며 핀잔을 줄 만큼 눈치 없는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레틴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피셔 경, 슈미트 경, 서석진 경, 그리고 다른 모든 기사들의 안녕을 기원하겠소."
기사들은 정중히 예를 표하고 나이트 페르트에 올랐다.
한 사람, 서석진만이 망설이고 있었다.
'이걸 말해줘야 할까?'
마리아에게 들은 바로는, 진정한 초인이 된다면 육체의 결함 따위는 사라진다고 한다. 그러나 서석진은 그 말을 반 정도밖에 믿을 수 없었다.
'그럼 저 녀석은 뭔데?'
이 세상에 초인다운 초인이 존재한다면, 안도혁이 그 필두에 설 것임이 분명하다. 서석진은 그의 친구보다 강한 생물을 본 적조차 없었다.
그의 망설임을 달리 해석했는지, 안도혁이 다가왔다.
"너는 너의 길을 걸어라. 너와 내 길은 분명 다를 것이나, 우리 모두 하나의 방향을 향해 걷고 있을 터다. 언젠가 우리 둘이 마주치는 일이 분명 오겠지."
굳건함은 여전하다. 서석진은 웃으며 친구의 팔을 두드렸다.
"걱정 마. 언젠가 멀쩡한 몸으로 돌아올 테니까. 그때까지 머리카락이나 되찾아 두라구."
안도혁은 말없이 주먹을 들어올렸다. 서석진은 과장된 동작으로 헐레벌떡 도망쳤다.
"황미야, 살려줘!"
어느새 멀어져가는 서석진을 보며 안도혁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하늘은 붉게 물들고 있었다. 황혼이 지상에 이불을 덮듯 살포시 내려앉았다. 어둡고 두려운 밤이 곧 찾아올 테지만, 멸마군 모두의 마음에 그림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천 경이 있었으니까.
추천, 선작,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당
- 작가의말
마무리가 뭐 이렇지.
이번 챕터도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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