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밖은 위험해(1)
그럴 리가 없다고?
뭐, 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 때랑은 시대가 많이 변했으니까.
아무튼 그 당시에는 분명히 있었던 사실이야.
응? 많이 나가서 돌아다니지 않았냐고?
내가 사냥밖에 더 다녔냐. 적어도 사람을 만나러 다닌 적은 없어.
그러니 몰랐지. 알 수 있을 리가 있나.
바깥 세상이란 걸 말이야.
여행.
사람은 누구나 여행을 떠나는 데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다.
미지에 대한 열망은 언제나 가슴을 들뜨게 한다. 아직 보지 못한 아름다운 풍경들, 새롭고 색다른 즐길거리,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과의 만남, 짧은 만남에서 시작되는 로맨스.
어떤 사람이든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을 가진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여행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여행으로 인해 넓어진 시야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영역을 탐구할 수 있는 통찰력의 근간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렇다. 그게 만약 쓸 것 다 쓰면서 다니는 풍족한 여행이라면.
가진 것 없는 사람에게 여행은 방랑과 별 다를 게 없다.
해묵은 속담도 있지 않은가.
집 떠나면 고생이다.
바람이 거칠게 불어온다. 칼바람이라고 칭해도 좋을 법한 바람은 살갗을 저미는 듯 쓰라렸고, 옆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도 잘 알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러웠다.
서석진은 소리를 꽥 질렀다.
"아, 진짜 추워 죽겠네!"
안도혁도 소리를 버럭 질렀다.
"뭐 보이는 거 없냐?"
"불빛도 안 보여! 오늘도 노숙할 처지야!"
"젠장, 그럼 동굴이라도 찾아보자!"
마을을 떠나온지 어언 열흘째, 두 사람은 노숙을 반복하며 혹한 속을 헤메고 있었다.
열흘 동안 그들이 거쳐온 곳에는 오로지 자연밖에 없었다. 마을 정도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동떨어진 민가 하나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심지어 사람이 다니는 길조차 한 뼘도 없었다.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와중, 버려진 동굴을 찾아낸 것은 행운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여기저기서 마른 나무를 급하게 조달한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굴 안에 큼지막한 모닥불을 만들어냈다.
서석진이 목도리를 풀어헤치며 말했다.
"아, 이제 좀 살겠다. 얼어 죽는 줄 알았네."
안도혁은 그의 차림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방한 모자, 방한 귀덮개, 방한 장갑, 방한화에 두꺼운 목도리까지 갖추었고, 옷은 몇 겹을 껴 입었는지 칼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두툼하다. 옆으로 굴리면 굴러갈 듯, 그의 몸은 동글동글하기 그지없었다. 안도혁은 자신이 저렇게 입고 다니다간 숨 막혀 죽으리라는 것에 내일 점심도 걸 수 있었다.
서석진도 안도혁의 차림을 보고 어이없긴 마찬가지였다.
"추위를 안 타는 건 알지만, 그렇게 입고 다니는 건 날씨에 대한 예의가 없는 것 아니야?"
안도혁의 차림새는 매우 단순했다. 바지에 셔츠 하나. 가죽으로 된 외투 하나를 걸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입었다는 듯 외투는 얄팍하기 짝이 없다. 머리에 쓴 두건은 추위를 막는 용도가 아니라 시선을 막는 용도다. 초가을이 아니고서야 저렇게 입고 다는 인간은 달리 없다.
안도혁은 언제 불을 붙였는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대체 우리가 지금 어디쯤 있느냐가 문제다."
나침반과 지도를 대조해 보면 맞게 가고 있는 상황이기는 하다. 문제는 얼마만큼 맞게 가고 있는지를 도통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봐 봤자 의미도 없는 지도를 품 안에 구겨 넣은 서석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야, 여길 굴뚝으로 만들 셈이냐?"
안 그래도 모닥불 때문에 공기가 매캐해졌는데, 그의 친구는 담배를 수도 없이 피워댄다. 가끔 서석진은 안도혁이 숨 쉬는 공기와 담배 연기 중 뭘 더 많이 먹고 사는지 진지하게 고민이 될 때가 있었다.
안도혁은 깊고 맛있게 연기를 들이마시더니, 무언가를 건넸다.
"피울래?"
"아오."
서석진의 차림새는 먼 여행을 떠나는 것 치고는 그리 무겁지 않았다. 챙겨온 막대한 돈과 옷가지 약간, 침낭과 모포 정도를 제외하면 별 것 없는 수준이다.
그에 비해, 안도혁에게는 한 가지 커다란 짐이 있었다. 서석진은 동굴 한쪽에 쳐박혀 있는 수레를 보며 서석진은 진저리를 쳤다.
'미친 놈.'
사람보다는 소가 끌 법한 수레다. 쌀을 수십 섬을 실어도 끄떡하지 않을 법한 그 수레의 위에는 나무 상자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것은 모두 담배였다. 보통 사람이 평생 피워도 다 피울까 싶은 양이지만, 그의 친구에게는 산소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물건이다.
'저렇게 줄창 피워대서 머리가 다 빠진 거 아니야?'
이 말을 꺼내면 자신의 머리도 죄다 쥐어뜯길 것을 알기에, 서석진은 애써 입을 다물고 자신의 짐을 뒤졌다.
한참을 뒤적거려도 원하는 것이 나오지 않자 서석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 우리 식량 다 먹었었어?"
"생각해보니 그렇네. 아침에 남은 고기도 전부 먹어버렸잖냐."
"그랬었나?"
초인이란 인간의 영역을 크게 벗어난 신체를 가지고 있다. 좋은 점만 부각되어 보이지만,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몸은 숨만 쉬고 살아도 무식할 정도로 영양분이 많이 필요한, 한 마디로 연비 나쁜 신체다.
서석진은 아침에 둘이서 사슴 한 마리를 통째로 먹어치웠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의 배는 아침의 포식을 잊었는지 음식을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꼬르르륵
어쩔 수 없다. 허기를 해결해야 한다.
서석진은 안도혁을 향해 주먹을 내밀었다. 이 경우, 답은 하나밖에 없다.
안도혁도 진지한 표정이 되어, 피우던 담배도 모닥불에 집어던지고 주먹을 쥐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외쳤다.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보!"
잠시 후, 힘없는 표정으로 안도혁이 동굴을 나섰다. 낄낄거리는 소리가 등을 간지럽힌다.
"도혁아! 장어가 먹고 싶다!"
"닥쳐!"
안도혁은 맹렬히 근처 숲을 향해 내달렸다. 식자재 조달을 위해서는 더 늦게 전에 서둘러야 한다.
사냥이란 건 이렇게 막무가내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냥감의 서식지를 완벽하게 파악해야 하고, 사냥감이 도주할 것을 대비하여 함정의 설치도 게을리 해선 안 된다. 장비 손질이 완벽해야 하는 것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몰이꾼을 따로 고용해야 할 필요도 있다.
게다가 지금은 해가 져 가는 무렵이다. 이럴 때 숲에 들어가는 건 자살 행위나 별반 다를 게 없다. 살아 돌아오면 천운이고, 보통은 사냥감을 찾다가 사냥감이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서석진은 태평하기만 했다.
'걱정하는 게 사치지. 문제는 뭘 잡아오냐는 건데.'
그 때였다.
'응?'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서석진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안도혁이 벌써 돌아왔을 리는 없다. 애초에 느껴지는 기척은 한 둘이 아니다.
게다가, 상대는 이 동굴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거친 숨 소리, 금속이 잘그락대는 소리, 다급한 뜀박질 소리. 음······.'
일반적인 상황일 리는 없다.
서석진은 상시 패용하는 검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올빼미나 박쥐가 서서히 그들만의 아침을 시작할 무렵, 거친 숨소리가 고즈넉한 밤의 분위기에 불협화음을 불어넣었다.
"헉, 헉!"
"아직 따라오고 있나?!"
수 명의 인원이 산기슭을 황급히 내달리고 있었다. 가벼운 복장을 한 여자 둘에 무장을 한 남자 여럿이다.
흙먼지와 땀으로 뒤덮인 그들의 차림새는 지저분함이라는 단어 외엔 표현할 방법이 딱히 없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다.
쉴 새 없이 달리던, 선두에서 달려가던 중년의 기사가 외쳤다.
"낙오된 사람은 더 이상 없나?"
등 뒤에서 즉각적으로 대답이 들려왔다.
"없습니다! 추적자의 낌새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말에 선두의 발걸음이 살짝 여유 있게 변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등 뒤에서 걷던 한 여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곱슬기 있는 치렁치렁한 금발을 뒤로 질끈 묶은 여자였다. 숙녀보단 소녀에 가까운 앳된 얼굴은 피곤함을 감출 수 없어 보였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지 애써 눈꺼풀에 힘을 주고 있었다. 미인으로 자라나겠다 싶은 외모였으나, 땀과 먼지에 얼룩진 모습은 밤 하늘 아래에서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헉, 헉. 버틸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어서 서두르죠."
숨이 턱까지 들어찬 모습은 괜찮다와는 거리가 한참 멀어 보였지만, 소녀는 꿋꿋함을 보여주려는 듯 애써 어깨를 폈다.
기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뇨. 아무래도 이쯤에서 슬슬 은신처를 찾아야겠습니다. 더 이상 무리하게 체력을 소모하면 위험합니다."
소녀는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기사보다 그녀의 식견이 넓을 리 없는 걸 알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나아갔다. 가급적 숨소리도 작게 내도록 주의하면서.
다만 한참을 헤매도 동굴 하나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이렇게 많은 인원이 기거할 만한 곳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중년 기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큰일이군. 숲에서 노숙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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