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갑지 않은 만남(1)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여행을 즐기고 있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냐. 명목이야 그런 것으로 잡혀 있지만, 즐겁지 않았다면 내가 그렇게 여유를 부리며 쏘다닐 수 있었을까.
그래도 그 때의 첫만남은 그리 즐겁지 않았다.
그래. 확실히 달갑지 않았어.
요정들은 생각보다 끈질겼다.
파티가 시작하고 하루가 지나자 안도혁은 출발하려 했지만, 모두들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벌써 가시면 안 돼요!"
"하루만 더 모실 수 있게 해주세요!"
그래서 하루를 더 보냈다.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밤이고 낮이고 가릴 것 없이 벌어져서 시간 감각조차 혼란스럽다는 걸 제외하면 요정의 축제는 상당히 즐거웠다. 졸리면 아무데서나 쓰러져서 자고, 다시 일어나 연회를 즐긴다. 게으른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 천국이 없을 것이다.
편안히 축제를 즐기는 것도 물론 즐거운 일이지만, 안도혁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 다시 길을 나서려는데······.
"하루만요!"
"딱 하루만 더!"
"······."
애처럼 징징거리며 떼를 쓰는 요정들의 모습은 진풍경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안도혁은 결국 일정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행이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은 닷새 째 되는 날이었다. 사실 그 날도 붙잡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안도혁이 지긋이 요정왕을 응시하자 겁먹은 그녀가 파티의 종료를 다급히 외친 것이다.
실비티아는 떠나는 안도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저희는 항상 기억할 것입니다. 숲의 모든 나무들 역시 당신의 은혜를 잊지 않고, 항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핑크빛 팔찌 하나를 안도혁의 손목에 채웠다. 금속 재질이긴 했지만, 꽃의 부조까지 되어 있어 누가 봐도 영락없는 꽃팔찌처럼밖에 보이지 않았다.
"숲의 친구라는 증명입니다. 숲이 기억하는 한, 당신과 이것을 가진 사람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저희의 환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며, 그 때는 아낌 없는 도움을 약속드립니다."
진지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말했지만, 손목에 채워진 꽃팔찌를 바라보는 안도혁의 심정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뒤에서 배를 잡고 끅끅대는 루나를 잠깐 째려본 안도혁은 생각했다.
'이 여자가 지금 날 놀리는 건가?'
10대 중반 소녀에게 채워도 유치하다며 울부짖을 디자인의 물건을 받으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럴 리는 없으니, 안도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팔찌를 잘 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실비티아가 주문을 외우자, 숲의 길이 열렸다. 그들이 지금까지 봐왔던 것과는 달리, 레일은 가파르지 않고 지면과 수평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당연히 움직이는 속도도 느릴 것이다. 마치 경치 구경이라도 하라는 듯.
일행은 레일에 연결된 수레에 올랐다. 물론 온천욕을 하며 발기부전을 치료해야 하는 서석진은 제외하고.
막 수레가 출발하기 직전, 서석진이 말했다.
"먼저 이렇게 돼서 미안해."
안도혁은 친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도 다행 아니냐. 둘 중 하나는 여기서 답을 찾았으니 말이야."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두 친구는 격하게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나는 너를 믿어. 언제나 그 손으로 앞길을 헤쳐왔던 것처럼, 이 여행의 끝에 분명히 원하는 것을 손에 쥐고 돌아올 것이라 생각해."
누구보다 강하고 믿음직한 친구. 항상 그 넓은 등으로 모두를 지켜주었던 거목과도 같은 나의 우상.
이별의 때는 왔다. 서석진은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켰다.
안도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친구. 네 여행의 종착지를 먼저 보게 된 것은 아쉽지만,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
서석진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가 안도혁을 믿는 만큼 안도혁 역시 서석진을 믿고 있었다. 만약 그가 등에 칼을 꽂는 한이 있더라도 뭔가 합당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멀리 떨어져 살아본 적이 없었다.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들은 항상 함께였고, 누구보다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어깨를 마주한 채 울고 웃으며 고락의 세월을 헤쳐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만날 것이다. 여명과 같은 미소를 머금고 다시 한 번 술잔을 맞부딪치는 날이 오리라.
격한 악수를 끝내고 안도혁은 요정들을 바라보았다.
"요정 여러분,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만날 때까지 모두들 건강하시길."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요정들은 하나 둘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왼쪽 무릎에 손을 가져갔다. 상급자를 대하는 요정의 최고 예법이다.
모두가 축복의 말을 하나 둘씩 건넸다.
"뜻하시는 바를 꼭 이루시길 빌어요."
"웃으며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그들의 작별 인사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숲의 길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안도혁이 앞을 응시하자 비로소 덜컹거리며 레일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행의 등 뒤에서 요정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꼭 다시 오셔야 해요!"
"언제나 당신들을 환영할게요!"
작별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안도혁 일행이 탄 수레가 시야에서 없어지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이제 숲을 떠난다. 등 뒤에 펼쳐진 한없이 울창한 숲을 바라보며 루나가 말했다.
"정말 끝이네요. 막상 떠나려니까 조금 아쉬운 걸요?"
에스턴이 말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다시 숲에 들르면, 그 때는 정말 원 없이 놀아보죠."
안도혁은 기가 찼다.
"아니, 지금까지 논 건 절제한 거였단 말입니까?"
숲의 길은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이별을 아쉬워하기라도 하는 듯.
여유를 갖고 바라보니, 요정의 숲은 정말 아름다웠다. 자연이 선물한 최고의 광경이 바로 이것이라는 듯, 온갖 진기한 경관들이 펼쳐져 있다.
울창하게 펼쳐진 나무의 바다, 투명하디 투명해서 바닥까지 보이는 호수, 찬란하게 부서지는 햇살의 파도······.
아마 누군가는 이 풍경만으로도 술을 마실 수 있겠지. 시상(詩想)이 절로 떠올라, 노래로 기록할 수 있겠지.
영원히 이어질 듯한 아름다운 경관은 며칠이나 지속되었다. 애초에 레일의 속도가 대단히 빠르진 않았으니, 이동하는 거리가 먼 만큼 시간이 한참 걸린 것이다.
그것에 불만을 품는 사람은 없었다. 이 질리지 않는 경치를 바라보며 여행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니까. 게다가 숲의 길은 휴식 의지를 표하면 레일을 멈추고, 일행이 수면을 취할 수 있도록 도와 주기도 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한 여행. 하지만 그럼에도 때는 왔고, 결국 레일의 끝이 다가왔다.
부서져 사라진 레일을 바라보며 안도혁은 말했다.
"고생했다. 다음엔 숲에 좋은 비료라도 선물로 사들고 올까."
숲 밖으로 나서니 공기가 확연히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안 좋은 쪽으로.
공기 중에 산소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요정의 숲과 바깥 세상의 차이는 심했다. 루나는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와, 원래 숨쉬기가 이렇게 부자유스러운 거였나요? 분명 이런 대기 속에서 살아왔을 텐데."
에스턴이 웃으며 말했다.
"한평생 숲에서 자란 저는 좀 더 심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곧 익숙해질 겁니다."
일행들이 바뀐 대기에 적응하려고 끙끙대고 있을 때, 안도혁은 지도와 나침반을 꺼내 들었다.
'현재 위치를 대략 여기쯤으로 잡으면 되나. 그럼 제대로 온 게 맞군.'
요정의 숲 북부에는 대륙 최강을 다투는 두 제국이 있다.
정북(正北)에 가까운 북서쪽에 위치한 것은 군사 국가인 다프텐시아. 북동쪽에 있는 국가는 용병 국가로 불리는 타란토스.
서로 국경이 맞닿아 있는 두 거대 제국은 세계를 떠받친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데, 그것은 북방에 위치한 제 1 마경과의 전선에 대부분의 전력을 투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두 제국 중 하나라도 붕괴한다면 인간 세상 전체가 혼란에 휩싸일 것이다.
전력의 대부분을 그렇게 운용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제국은 '남아도는 전력'만으로 인접 국가들에게 충분히 위압감을 줄 정도였다. 때문에 외교 관계에 있어 어떠한 국가도 두 제국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며, 그저 화친의 표시만 보낼 뿐이었다.
이 중 안도혁이 향한 곳은 타란토스 제국이었다.
"왜 하필 타란토스에요?"
루나의 말에 안도혁이 답했다.
"그곳에 상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온갖 정보를 물어다 준 로판 상회. 비록 쓸모는 없었다고는 하지만, 안도혁이 정보 수집 역으로 믿을 만한 곳이 기본적으론 그곳뿐이다.
물론 안도혁도 알고는 있었다. 지금까지 별다른 성과가 없었는데 앞으로 기대하는 게 과연 옳을지.
하지만 일단 기댈 곳이 거기뿐이다. 그렇다면 동앗줄이라도 잡아 보는 수밖에.
'이러면 내 상황은 마을에 있을 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잖아?'
물론 물어다 주는 정보만 받아먹을 때와 직접 발로 뛰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로판 상회에 가면 에스턴, 당신의 고질병을 치료할 약이 있는지도 의뢰해 보도록 합시다. 좋은 결과를 얻을지도 모르지요."
에스턴은 뛸 듯이 기뻐했다. 저 대머리와 발기불능 때문에 쥐죽은 듯이 있었지만, 그 역시 병을 치료하고자 숲 밖으로 나올 만큼 애절한 몸이다. 당연히 치료에 대한 갈망이 클 수밖에 없다.
일행은 보무도 당당하게 국경지대에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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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오늘은 조오금 짧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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