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밖은 위험해(4)
익숙한 목소리에 서석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 많이도 잡아왔네. 역시 도혁이다! 여윽시 안도혁이야!"
안도혁은 이를 갈며 사냥물들을 바닥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젠장, 해체나 도와라."
저녁의 숲에서 잡았다고는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른 사슴 세 마리에 토끼 여덟 마리, 민물고기 여럿에, 대체 어디서 따 왔는지 과일도 한아름이었다. 게다가 그게 끝도 아니었다.
"멧돼지도 하나 잡아 왔다. 귀찮은데 내일 해체해?"
"아니, 내일 하는 게 더 귀찮지 않을까? 다 해 버리자. 숲을 아예 털어오셨구만."
"그럼 가져와야겠군. 그보다 이분들은 누구시냐?"
서석진은 일어난 일들을 간단히 설명했다. 안도혁은 듣던 와중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그걸 살려 보냈다고?"
"별 수 없잖아. 죽이겠다고 쫓아가다가 이 사람들이 또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고."
"그럼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다 쳐죽이면 되잖아!"
"그건 너나 가능한 거고, 이 괴물 같은 새끼야!"
"맞아 볼래?"
옥신각신하는 둘을 보던 코델은 식은땀을 흘렸다.
'또 초인이다. 분명해.'
저 서석진이란 인물이 대등하게 대화하는 것도 그렇지만, 사냥물이랍시고 가져온 것들이 그것을 무엇보다 확실하게 증명했다.
보통 사람은 새벽나절에 출발해서 저녁 늦게까지 숲을 돌아다닌다 해도 사슴 하나 잡기 어렵다. 숙련된 사냥꾼이라도 사냥의 성공률은 잘해야 반반이다. 빈손으로 집에 돌아오는 날이 더 많은 게 현실이다.
그런데, 이런 야간의 숲에서 저렇게 많은 사냥감을 잡아왔다. 상식 선에서, 초인 외에는 다른 것을 연상할 수도 없었다.
코델은 다가가 인사를 청했다.
"코델이라고 합니다. 초인 분을 오늘 두 명이나 뵙다니, 영광이기 그지없습니다."
안도혁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코델의 손을 맞잡았다.
"안도혁입니다. 그보다 초인이라는 거, 그렇게 티가 납니까?"
"······하하."
손만 가볍게 맞잡아도 안다. 이 솥뚜껑 같은 손에서, 자신의 손 따윈 종잇장처럼 으스러뜨릴 수 있는 거력이 강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가까이서 보니 외견만으로도 초인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할 모양새였다. 코델은 나름 스스로를 열심히 단련했다고 생각했지만, 상대방의 팔뚝이 자신의 머리보다 두꺼운 것을 보고 약간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두건까지 써서 위압감이 한층 더했다.
안도혁은 사냥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혹시 저녁 식사가 아직이시라면, 같이 드시겠습니까?"
코델은 자신의 일행을 돌아보았고, 병사에서 알리시아에 이르기까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격한 도주 때문에 하루 동안은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한 신세였다. 먹을 것을 보니 다들 등가죽이 배에 붙는 기분이었다.
"감사합니다. 식대는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건 괜찮으니 요리나 좀 도와주셨으면 감사하겠네요."
코델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녀석들아, 빨리 와서 돕지 않고 뭘 하는 게냐!"
"예!"
"즉시 하겠습니다!"
식사 준비가 시작되었다.
서석진과 안도혁이 피를 뺀 사냥감들의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빼내는 작업을 완료하자, 알리시아 일행은 고기를 잘라 꼬챙이에 꽂고 물고기를 손질하는 등의 작업을 시작했다. 다들 빨리 음식을 먹고 말겠다는 듯 준비를 서두르자, 정작 안도혁과 서석진은 할 게 없어졌다.
"부지런들 하시구만."
안도혁은 사냥할 동안 피우지 못한 담배 연기를 뻐끔거렸다. 그가 아무리 초인이라고 해도, 사냥할 때 담배를 물고 있는 건 썩 좋을 리가 없었다. 짐승들의 후각은 인간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으니까.
요리가 마무리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생각 이상으로 짧았다. 이윽고 식사가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자신의 몫을 걸신들린 것처럼 먹어치웠다.
"아구아구."
"쩝쩝쩝."
하루 넘게 굶으면 식은 감자라도 맛있는 법이다. 아귀처럼 달려들어 고기를 뜯는 그들의 모습은 거지 떼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안도혁은 그들의 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씻지도 못하여 꾀죄죄한 몰골로 음식을 야금야금 먹어대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불쌍한 마음이 들게 되리라.
'산적, 산적이라.'
먼 옛날의 악몽 같던 기억이 떠올랐다.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낸 그의 눈에, 이질적인 사람 하나가 보였다.
'쟤는 뭐지?'
하루가 넘게 굶었는데 일일이 식사 예절을 차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여기엔 예외가 존재했다.
알리시아는 조신하게 음식을 베어 먹고 있었다.자실 베어 먹는단 시점에서 조신과는 살짝 거리가 있는 광경이었지만, 어떻게든 예의를 차리려고 하는 모양새였다. 옆에 있는 안나가 입에 음식을 쑤셔 넣는 것과는 큰 차이를 보였다.
'교육을 잘 받은 건가.'
잘 사는 집 딸이라는 소리를 아까 들었던 것 같다. 안도혁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토끼 한 마리를 통째로 뜯었다.
그렇기에 그는 서석진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알리시아의 눈빛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폭풍 같은 식사가 끝나고, 남은 음식을 갈무리하는 병사들을 보며 코델은 두 초인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어느 방향으로 여행하고 계신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별다른 비밀도 아니다. 서석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를 펼쳤다.
"아스란 왕국 남부로 가고 있어요. 일단 목적지는 거기죠."
코델의 표정이 바뀌었다.
"잘 됐군요. 아가씨, 아가씨!"
알리시아가 쪼르르 다가왔다. 코델은 환히 웃으며 말했다.
"이 분들은 아스란 왕국으로 가는 중이라고 하십니다. 마침 그 경로가 저희 영지와 겹쳐 있으니, 한 번 대접을 해 드려도 좋지 않겠습니까?"
홍당무처럼 빨개진 얼굴로 알리시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혁 님, 서석진 님께서는 어떠십니까? 혹여나 실례가 아니라면, 저희와 동행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호위 비용으로 사례도 두둑히 하겠습니다."
거절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 안도혁은 코델의 손을 강하게 맞잡았다.
서석진은 코델의 등 뒤에 숨은 알리시아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잘 부탁해요."
모기와 격한 경쟁을 벌일 정도의 성량으로 알리시아는 입을 열었다.
"네, 저도······."
공화제란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지만, 가장 큰 특징이라 하면 역시 군주가 없는 것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하프렌 공화국은 귀족정을 기반으로 한 공화 정치를 그 근간으로 삼는다. 따라서 모든 직위는 세습이 아닌 선출되는 것이며, 임기 또한 정해져 있다.
핏줄에 의한 세습이 직위를 결정하는 데 막대한 영향을 주는 왕국 체제에 비교하면 평등하다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실상 공화정이나 왕정이나 근본은 다르지 않다. 가진 자는 더 가지고, 못 가진 자는 더 못 가진다. 부는 대물림되며, 부모의 영향력이 자식의 힘으로 환원되는 것도 다르지 않다.
어쨌든 선거로 인해 직위가 정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 선거를 통해, 레아덴 시 서쪽 성문의 출입 관리 담당자로 선출된 백부장 오스트는 눈앞의 인물들을 보며 당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뭐지, 이 인간들은?’
레아덴 시에 사는 귀족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에 얼마 되지 않는 귀족 가문 중 하나인 클라우드 가의 여식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알리시아 클라우드입니다. 저희 가문 기사님과 사병들, 그리고 제가 개인적으로 초청한 손님들이에요.”
거기까지 들었을 때는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신분 확인을 위해 얼굴을 직시하자, 오스트의 표정은 묘하게 바뀌었다.
도저히 본 적이 없는 얼굴인 것이다. 왜 사람의 얼굴이 저토독 밋밋하게 생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앞에 있는 미남은 얼굴이라도 잘생긴 편이기에 봐줄 만 하지만, 뒤에 있는 덩치에게선 이질감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에 가벼운 성정으로 유명한 오스트였다. 함부로 입을 여는 바람에 감봉된 적도 몇 번 있는 그였으나, 오늘은 ‘원숭이같이 생겼네’라는 말을 가까스로 입 안에서 삼켰다.
‘아무 소리나 함부로 했다간······.’
덩치의 팔뚝은 과장 하나 안 보태고 통나무처럼 두터웠다. 사람을 예의 바르게 만드는 데에는 그만한 것도 별로 없다.
오스트는 손을 내밀었다.
“시, 신분증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불가침 구역 안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 출신인 두 사람이 신분증 같은 걸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도혁이 어깨를 으쓱하자, 알리시아가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여행 중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신분증을 분실하셨어요. 대신 레아덴 시 내에서 두 분의 신분은 클라우드 가문의 이름이 책임지고 보증하겠습니다.”
백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이런 걸 봐주면 안 되지만, 이런 사소한 문제로 귀족 가문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더 문제다.
게다가 책임지겠다지 않는가. 오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통행세는 클라우드 가문 앞으로 달아 두면 되겠습니까?”
귀족들은 일일이 통행세를 내지 않는다. 대신 분기별로 목록을 적어 두었다가 몇 번에 걸쳐 납부하곤 한다. 이는 그저 통속적인 관례였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하세요. 영수증에 일시와 인원 목록 적어 두시고요.”
“오늘 안에 처리하도록 하죠.”
일행은 성문을 통과했다. 알리시아는 살짝 맥이 풀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 드디어 돌아왔다······.”
그녀가 집을 떠나고 한 달 만에 돌아오는 고향이었다. 공교롭게도 고려족 마을 출신인 두 친구 역시 마을을 떠난 지 한 달이 된 시점이었다.
성문 안쪽의 광경을 보며 두 사람은 살짝 감탄했다.
“확실히 다른데.”
“음. 건물 양식부터 달라.”
흙과 나무를 기본 재료로 사용하고, 고층 건물이 거의 발달하지 않은 고려족 마을과 달리, 회반죽을 주재료로 만들어진 건물들은 외벽의 모양이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건물의 사이즈 역시 3, 4층이 드물지 않게 보일 만큼 컸으며, 무엇보다 도로가 흙바닥이 아닌 석재로 포장되어 있었다.
처음 접한 외부 세계의 모습에 넋을 놓고 있자, 알리시아가 손뼉을 짝짝 쳤다.
“구경하시는 것도 좋지만, 우선 저희 집으로 가요. 은인들을 대접해야 하니까요!”
굳이 그렇게 큰일을 했나 싶었지만, 준다는 걸 거절하기도 뭐했다. 안도혁과 서석진은 터벅터벅 알리시아 일행에 섞여 걷기 시작했다.
레아덴 시는 상당히 넓었다. 산 속 마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고려족 마을이었으면 벌써 마을을 한 바퀴는 돌았겠다 싶을 무렵에도 아직 한참이나 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볼 게 많고, 사람도 많다. 좌판에서 파는 음식 하나부터 시작해서 상당수의 것들이 새로웠다. 이것저것을 구경하고 있을 무렵, 불협화음이 끼어들었다.
초인은 신체 능력이 좋다. 이는 신체에 존재하는 모든 능력에 해당한다.
예를 들면, 청력까지도.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아주 명확하게 들려왔다.
“신기하게 생긴 족속들이로군.”
“노예로 팔려 왔나, 저 커다란 덩치는?”
“인간이 아니라 다른 종족 아니야?”
“오래 살다 보니 별 걸 다 보는구먼, 허허.”
가 본 적은 없지만, 알렉스가 종종 들려주었던 말에 따르면 이 바깥 세상에는 동물들을 가두어 놓고 구경하는 시설, 통칭 동물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했다.
안도혁은 동물원의 동물들이 이럴까 하는 생각에 빠졌다. 흘끔 옆을 돌아보니, 서석진 역시 그리 좋아 보이는 기분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표정이 경직된 것을 본 코델이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숙였다.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기사 아저씨가 잘못한 건 없죠.”
알리시아 역시 두 초인의 기분이 나빠진 것을 알아차렸다. 저렇게 동물원 원숭이 보듯 하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어떡해, 어떡해.’
그러나 뾰족한 해결책은 없었다. 길 가는 사람들의 눈을 전부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분위기가 살짝 무거워졌다. 침묵의 장막이 깊게 드리워진다.
아치 형태의 기둥을 세워 튼튼하게 만들어진 돌다리를 건너 클라우드 가의 정문에 도달할 때까지, 일행은 아무 말 없이 걷기만을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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