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밖은 위험해(5)
클라우드 가의 가주, 아론 클라우드는 호인으로 유명했다. 이는 그가 성격이 좋다는 것 외엔 특출난 장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했다.
농장과 과수원을 가지고 있어 그럭저럭 부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정계에 나간 건 고작 한 번에 불과했다. 안찰관으로 약 1년간 근무했던 것이 전부다.
이러다 보니 딱히 정적 같은 것도 없고, 원한을 살 일도 없다. 나쁘게 말하면 두부 같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지만, 오늘은 상당히 놀라는 날이었다. 시종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리시아가 거지꼴이 돼서 돌아왔다고?!”
한 달 전에 불가침 구역으로 떠난 딸, 혹시나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함께 보낸 기사 코델의 능력을 믿기에 안심했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사병을 몇 잃고 거지꼴이 돼서 돌아왔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아론은 집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으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살짝 초췌해졌고 먼지로 몸이 뒤덮였으나, 눈동자만은 아직 찰랑이는 물처럼 빛내며 알리시아가 가주실 앞에 도착했다.
“아버지, 소녀 귀가했습니다.”
아론은 가만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신의 딸을 내려다보았다.
딸이 무사히 귀환한 건 좋은 일이다.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게 맞다.
그러나 그 여행의 도중, 일곱 명의 사병이 죽었다. 보상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의 목숨이 몇 개나 사라진 것이다.
아론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잘 다녀왔냐는 말은 못 하겠구나. 이유는 네가 잘 알고 있겠지.”
알리시아는 고개를 숙였다.
“소녀의 치기 어린 행동으로 귀한 목숨이 일곱 개나 사라졌습니다.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우리는 귀족이고, 그들은 평민에 불과하다. 목숨의 가치가 동등하지는 않지. 그러나 알리시아야. 사람 위에 서는 사람은 아랫사람의 목숨을 귀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을 함부로 쓰는 사람 아래에서 누가 일하고 싶겠느냐?”
“네, 명심하겠습니다.”
“이 일은 공론화시키지 않겠다. 하지만 소문이 퍼지는 걸 막을 수는 없을 게다. 네게 피해자 보상의 전적인 처리를 맡기마. 할 수 있겠지?”
“해내겠습니다, 아버지.”
“그래. 잘 해내리라 믿는다.”
귀족과 평민은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서로가 계약으로 묶여 있는 이상, 그 나름의 적절한 책임과 보상이 필요한 법이다.
조금 누그러진 아론이 알리시아를 향해 손짓했다. 머뭇거리며 알리시아가 다가오자, 아론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생 많았다, 우리 딸. 잘 돌아왔어.”
“아, 아빠.”
스스로 집을 나갔다가 고생하고 들어온 것이라,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도 없다. 그러나 부모만큼은 그런 자식이라도 받아줄 수밖에 없다.
알리시아의 맑은 눈에서 한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흐아앙. 아빠, 잘못했어요.”
“괜찮다, 괜찮아. 다시는 안 그러면 되지.”
공화제 국가의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안도혁은 휘파람을 불었다.
‘돈이 많으면 이런 것도 할 수 있는 건가?’
알리시아의 저택에 도착한 후, 안도혁과 서석진은 클라우드 가 안에 있는 대형 목욕탕으로 안내받았다.
고려족 마을에선 공용 목욕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무통에 물을 데워서 욕조로 쓰는 집은 몇몇 있었지만, 그것도 물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는 집에 한했다.
이곳은 다르다. 마치 헤엄도 칠 수 있을 만큼 탕이 넓었다. 대리석으로 말끔하게 마감된 바닥 위에 선 안도혁은 목욕탕에 장식으로 만들어진 두꺼비 모양의 석상이 물을 탕 안으로 토해내는 것을 보고 문화 충격에 휩싸였다.
“오오······.”
감탄을 내뱉는 그의 뒤에서 서석진이 다가왔다.
“진짜 대단하다. 세상은 정말 넓었어. 신기한 게 너무 많아.”
바깥 세상에서 보는 첫 도시가 이렇게 신기할 줄은 몰랐다. 안도혁은 새삼 여행을 떠난 게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의도 자체는 우울했지만.
“먼저 욕탕 밖에서 몸을 씻고 들어가는 거라고 했던가?”
“그랬었지, 아마?”
둘은 근처에 있는 나무 바구니를 들어, 물을 몸에 끼얹기 시작했다.
안도혁은 서석진보다 덩치가 훨씬 컸으나, 씻는 시간은 훨씬 짧았다.
서석진이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하반신을 보며.
“······세상엔 신기한 게 많지, 음.”
하반신은 매끈매끈했다.
······상반신만큼이나.
대답 대신 거센 물보라가 몰아쳤다.
채찍으로 얻어맞아도 이런 충격을 받진 못하리라. 서석진은 펄쩍 뛰었다.
“아, 왜! 칭찬한 거잖아! 크고 아름답다는 뜻이잖아!”
“그래, 이 새끼야. 이건 칭찬의 답례다.”
빠악
흉기로 때리는 소리가 아니다. 물로 사람을 후려치는 소리다.
소리 없이 비명을 내지른 서석진은, 한 번만 더 주둥이를 열었다간 오늘 익사체나 폭행치사체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입을 굳게 다물었다.
묵묵히 샤워를 마친 두 사람은 동시에 탕에 발을 딛었고, 몸을 탕 속 깊이 담갔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소리를 토해냈다.
“크어어.”
“흐어어어어.”
몸의 더러움과 피로가 함께 씻겨나가는 기분이다. 정화된다는 개념이 이런 것일까.
“마을에도 이런 거 하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 말이다.”
“알렉스 아저씨한테 목욕탕 주문이라도 해 둘걸.”
“젠장, 그러게 말이다.”
초인이라도 피로가 쌓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객지에서 한 달 동안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른다면 누구라도 지칠 수밖에 없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그들은 새 옷으로 갈아입고, 시종의 안내에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야, 오늘은 그냥 놀라는 날로 정하자.’
‘동의한다.’
네모 반듯한 테이블 위로 수많은 요리들이 각자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바닷가재, 성게, 장어를 비롯한 해산물부터 양고기, 쇠고기 등의 육류까지. 쌀이 없는 게 살짝 아쉬웠지만, 그런 걸 일일이 따질 처지는 아니었다.
식탁에 정신이 팔린 두 사람의 귀에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아론 클라우드였다.
아론은 두 사람을 향해 살짝 목례했다.
“이 클라우드 가의 가주인 아론이라고 하오. 방문하신 순간에 인사를 하는 게 기본 순서이나, 객들께서 여독을 푸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하여 욕탕으로 먼저 안내해 드렸소. 불쾌했다면 용서하시오.”
두 사람은 고개를 내저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예의가 없는 건 아니지만, 배운 건 없는 말투였다. 아론은 그 정도의 무지함을 참고 넘어갈 아량이 충분히 있었다.
‘두 사람 다 초인이라고 했던가.’
심산유곡에서 무술만 연마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지함도 설명이 된다. 가끔 세상에는 그런 초인들도 나오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은 위엄 있게 다가가는 것보단, 소탈하게 대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아론은 호탕하게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식사 자리에는 여섯 명의 사람이 있었다. 가주인 아론, 첫딸 알리시아, 알리시아의 두 여동생, 그리고 객 두 명이었다.
“이 자리에서, 알리시아를 구해 주신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하는 바요. 두 분이 아니었다면 딸아이는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외다.”
서석진이 빙그레 웃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요.”
“실로 영웅이시군! 제가 술을 한 잔 따라 드려도 되겠소?”
안 그래도 아까부터 여기저기서 풍기는 주향(酒香)에 반쯤 정신이 나가 있던 서석진이었다. 함박웃음을 지으려는 입가를 애써 되돌리며, 서석진은 특이하게 생긴 모양의 술잔을 두 손으로 공손히 내밀었다.
‘두 손?’
잠시 갸우뚱해진 아론이었으나, 사소한 것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윽고 모든 사람들의 잔이 채워졌고, 아론은 잔을 높이 들며 소리쳤다.
“알리시아의 무사 귀환과, 영웅들을 위하여!”
술과 요리는 생각 이상으로 맛이 좋았다. 스스로를 막입이라고 생각한 안도혁이었지만, 음식의 맛을 보자 지금까지 혓바닥을 잘못 길들였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고기가 왜 입에서 녹는 거지? 허어.’
온갖 산해진미가 입속에서 춤을 춘다. 한참을 즐기고 있으려니, 아론이 슬며시 말을 걸어왔다.
“식사는 마음에 드십니까?”
입 안에 음식물이 가득하기에, 안도혁은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론은 껄껄 웃었다.
“그것 참 다행이로군요. 은인들의 대접에 소홀함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마음을 조금 놓아도 되겠습니다.”
“우물우물. 저알 마있네요.”
“하하, 그렇습니까. 부디 사양치 말고 많이 드시길.”
시녀가 다가와 안도혁과 아론의 빈 잔에 포도주를 가득 채웠다.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며 아론은 본론을 토해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두 분이 어디 출신이신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실례될 것도 없다. 안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도상으로는 무국적 지대에 있네요. 분지를 옆으로 낀 산골 오지 마을인데, 아마 산세가 하도 험해서 알려 드려도 찾기 힘드실 거에요.”
“아하, 그렇군요.”
무국적 지대에서 만났으니, 그곳 출신이라고 해도 설명이 된다. 게다가 아론은 저렇게 생긴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출신이 불분명한 곳이 분명할 것인데, 무국적 지대 출신이라면 그나마 얼추 들어맞는다.
‘거짓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얻는 이득이 없겠지.’
초인이라는 것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
공식적으로 하프렌 공화국에 고용되어 있는 초인은 현재 15명.
언뜻 보기엔 상당한 숫자지만, 이는 천만이 넘는 하프렌 공화국의 인구를 감안하면 절대 많은 것이 아니다.
하프렌 공화국은 세계 최강을 앞다투는 두 제국에 비하면 군사력이 조금 밀리는 감이 있다. 그러나 그 영토에서 나오는 힘은 무시할 것이 못 되며, 인구 대비 초인의 비율은 높은 편이라 평가받는다.
‘공화국 전체에서 열댓 명밖에 없는 초인들인데, 아무 연고도 없는 우리 가문에서 두 명이나 대접하게 되다니.’
만약 그가 권력욕이 조금 있었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든 이용해 보려고 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아론은 두부 같은 인간이었다. 안찰관에서 정계 생활을 끝낸 데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서석진은 포도주를 주전자째 입에 부어 넣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는 중이었다.
‘아, 맛있네!’
원체 술을 좋아하는 성격을 차치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이 포도주의 질이 상당히 좋았다.
한 잔을 꿀꺽 마시면 시녀가 다가와 다시 잔을 채운다. 그러면 또 마시고, 마시면 또 채우고.
술에 한창 열중하고 있는 그를 보던 알리시아의 눈이 샐쭉해졌다.
‘뭐야, 나는 보이지도 않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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