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에서(3)
아스란 왕국은 해양 국가다. 때문에 상선의 왕래가 자유롭고, 통관 절차가 까다롭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기에 배의 숫자도 많고 종류도 다양하다. 조그마한 통통배부터 거대한 군선까지, 돈을 내면 어지간한 배를 빌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런데 빌릴 수가 없다.
“소문 못 들었어? 지금은 빌려줄 수가 없소.”
“이 시기에 무슨 출항이야. 한 달쯤 뒤에 오슈.”
어디를 가도 듣는 답변이 비슷했다. 답답해진 루나가 이유를 묻자, 공통된 답변이 들려왔다.
“근해에 해적이 출몰했다고 합디다.”
“악랄하기로 유명한 놈들이지. 놈들이 지나가면 속옷 한 장 남지 않는다더군.”
누구나 목숨은 하나다. 게다가 지상보다 훨씬 위험한 곳이 바다이니, 바닷사람들은 목숨의 위협에 상당히 민감하다. 어느 해안가이든 배의 무사 귀환을 비는 미신 정도는 하나씩 모두 있을 정도니까. 그런 와중에 해적이 나온다고 하면 좋다구나 하고 출항할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안도혁은 루나에게 말했다.
“해적을 나라에서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텐데.”
“그럴 거예요. 하지만 군선이 모두 집결하고, 나포 준비를 위해 움직인다면······그때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몰라요.”
“다른 항구로 옮기면 어떻겠습니까?”
“비슷할 거에요. 어차피 바다가 바뀌지는 않으니까요.”
이래저래 떠돌기만 한 둘은 빈손으로 숙소에 돌아오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를 찾지 못했다.
상황을 들은 서석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해결책 간단하잖아?”
“······무슨 소리냐?”
“우리 돈 많잖아. 배를 그냥 적당한 걸로 하나 사면 되는 거 아니야?”
안도혁은 잠시 친구의 머리통을 부수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다. 다행히도 그가 폭력을 행사하기 전, 루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너무 낭비에요. 게다가 지금 문제는 배가 있냐 없냐가 아니라, 배를 움직일 수 있냐 없냐거든요. 설사 배를 산다고 쳐도 항해사와 조타수, 노꾼 등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배를 타려고 할 리가 없으니까요.”
일행 중에는 항해의 재능은커녕 항해를 제대로 해 본 사람조차 없었다. 안도혁은 잠시 옛날에 돛단배를 타던 기억을 회상했지만, 곧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런 경험은 지금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해적들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을 무렵, 그들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손님, 배를 찾으시오?”
눈을 번쩍 돌리자, 바닷바람에 얼굴이 삭아 나이의 식별이 어려운 남자가 서 있었다.
이빨이 듬성듬성 빠진 사내의 얼굴은 본능적인 혐오감을 유발했지만,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긴 한데, 누구십니까?”
사내는 자신을 버크라고 소개했다.
“어디에나 있지요. 갈 길은 급한데, 뱃길이 위험해서 나서지 못할 때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 배는 그런 걱정이 없습죠.”
버크는 조목조목 설명했다.
“저희는 그런 분들을 모아 출항하지요. 대신 돈은 통상보다 더 받습니다. 히히힛.”
엄지와 검지를 싹싹 비비는 버크. 안도혁은 루나를 쳐다보았다.
“확실히······그런 장사가 있을 법은 하네요. 하지만 당신들, 위험한 일임은 알고 계시잖아요? 그런데도 굳이 출항을 하려구요?”
“그럼요. 목숨도 중요하지만, 돈이 없는데 목숨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목숨보다 돈이 중요하단 뉘앙스다.
세상에 이런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또한 이 말이 인간 사회에서는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돈만 있으면 사람도 사고 팔 수 있으니까.
고민할 것도 없었다. 안도혁은 손을 내밀었다.
“타겠습니다. 필요한 금액은 얼마이며, 작성할 계약서는 어디 있습니까?”
“도혁 씨!”
상식적으로 이런 수상한 일에 얽혀서 좋을 것이 없다. 하지만 안도혁은 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할 생각이 없었다.
“다른 뾰족한 수가 없는 이상, 이게 그나마 정답에 가까울 겁니다.”
“하지만······.”
뭐라 말하려는 루나를 서석진이 막았다.
“기회가 제 발로 굴러들어왔는데 걷어차는 바보가 어디 있나요.”
싱글싱글 웃는 그를 보며 루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기회가 맞다면 말이지만.’
어쨌거나 그녀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고, 안도혁은 주장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버크는 익숙한 동작으로 어딘가에서 꺼낸 계약서를 내밀었다. 안도혁이 서명하자 그는 그것을 받아들고 웃었다.
“케헤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그럼 이틀 후 부둣가에서 뵙겠습니다. 배 이름을 헷갈리지 마시길.”
뒤뚱거리며 선원은 거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루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저 사람의 뭘 믿고 갑자기 결단한 거예요?”
“믿냐고 말한 겁니까? 저 사람을?”
안도혁은 웃었다.
“초면인 사람을 믿는 바보도 있습니까. 나는 나 자신을 믿을 뿐입니다.”
광오한 발언. 자신감 넘치는 발언이다.
물론 이 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루나가 소리쳤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요! 당신이야 그렇다 쳐도, 다른 사람들은!”
“······음?”
“적어도 생각할 시간을 조금 두고, 토론한 다음에 결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게 동료들에 대한 예의 아니냐구요.”
“······.”
루나의 말에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 정론 그 자체였다.
다만 안도혁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가 잘못한 건가?’
일평생 스스로를 믿고 살아왔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옳았다. 적어도 그가 내린 결정에 후회한 일은 없었으며,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틀렸다면?
안도혁이 입을 다물자, 루나는 씩씩거리며 숙소로 들어갔다.
“내일 아침에 이야기해요. 오늘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쾅
문이 거칠게 닫혔다. 안도혁은 잠시 루나가 들어간 문을 바라보다, 다른 동료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잘못한 거냐?”
서석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 여자가 예민한 거야.”
에스턴은 이 두 명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이런 말을 해도 되는진 모르겠지만, 상당히 경솔하셨다고밖에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최소한 제 생각만 말씀드리자면 말입니다.”
서석진과 안도혁의 반응은 달랐다.
“뭔 소리예요?”
“······그렇습니까.”
치료제를 하루 빨리 찾으려고 발악하는 둘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 보통 사람들에겐 당연하지 않다. 애초에 처한 입장도 다르고,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생각을 조금 더 할 필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안도혁은 가만히 담배를 물었다. 오늘따라 연기가 쓴 기분이 들었다.
그날따라 긴 것 같은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이 되자, 일행의 분위기는 상당히 어색해졌다. 서석진의 말을 빌리자면, 스테이크가 톱밥 맛이 나는 기분이었다.
달그락 달그락
이른 아침의 식사였다. 식당은 조용했고, 안도혁 일행이 식기를 놀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고민에 빠진 안도혁과 심통이 잔뜩 난 루나가 있으니 테이블의 분위기가 좋을 리 없었다. 견디다 못한 서석진이 옆 식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슬그머니 에스턴도 그쪽으로 빠졌지만, 이를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식기를 내려놓은 루나가 말했다.
“뭐 할 말 없어요?”
안도혁은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는 식사에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뭐를요?”
“만나지 얼마 되지 않은 당신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나는 평생 나만을 믿고 살아왔습니다. 사실, 저기 있는 석진이 놈을 제외하면 친구도 딱히 없습니다. 내 힘으로 대부분의 일을 처리했으니, 역설적이게도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필요가 없는 겁니다.”
“······.”
“그래서 결정이 독단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생각은 듭니다. 이것으로 인해 다른 동료들에게 민폐가 된다면, 고치는 게 옳겠지요. 미안합니다.”
머리를 숙이는 안도혁을 보며 루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 당신 강한 거 알아요. 그것도 엄청나게 강한 거. 아마 세상에서 어떤 풍파를 만나든 당신 몸 하나만은 거뜬히 건사할 수 있을 정도인 거, 나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 강함은 리더로서의 강함이 아니잖아요.”
“리더······.”
“당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집단에 속해 있을 때는 다른 구성원들의 의견도 존중해 주는 게 필요해요.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잖아요.”
안도혁은 바보가 아니다.
알고 있었다. 최소한 머리로는 옛날부터 알고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안도혁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적어도 저런 말을 그에게 면전에서 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들을 수 있었을 리가 없다. 마을을 거의 혼자 먹여 살리는 공신에게 싫은 소리 했다가 무슨 일이 날지 모르니까.
생각에 잠긴 안도혁이 입가로 담배를 가져가자, 루나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식사 중엔 흡연 금지! 기본 매너에요!”
당황한 안도혁이 입을 쩍 벌리자 루나는 난처한 듯 웃었다.
“이 얘기도 처음 듣는 얼굴 같은데요.”
정곡이었다. 안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다시 집어넣었다.
옆에서 대화를 듣던 서석진이 감탄했다.
“와, 저 말을 진짜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네. 대단한 아가씨야.”
안도혁이 생애 처음 겪는 일에 조금 당황하는 일이 있었지만, 어쨌든 경직된 분위기 자체는 누그러진 것이 사실이다.
이후, 배를 탈 때까지 일행은 어떠한 트러블도 겪지 않았다.
배를 탈 때까지는 말이다.
끼룩 끼룩
갈매기가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며 난간에 앉았다. 안도혁은 놈을 빤히 쳐다보더니 주머니에서 육포 한 점을 꺼내 내밀었다.
녀석은 손에 있는 음식을 받아먹는 것에 전혀 겁을 내지 않았다. 고개를 까딱까딱하던 갈매기는 눈앞의 사내가 뭔가를 더 내놓을 것처럼 보이지 않자, 그대로 날개를 펼쳐 날아가 버렸다.
해풍이 머리를 가볍게 쓸었다. 두건이 날아가지 않게 신경이 쓰인 안도혁은 한 손으로 머리를 잡으며 풍경을 눈에 담았다.
바다다.
쏴아아
중형 갤리온선이 세차게 바다를 가르자 배 밑창에 포말이 다가와 부딪친다. 끝없이, 눈부시게 펼쳐진 대양은 깊고 푸르게 빛났다. 세상 만물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바다, 포용력 가득한 그 모습은 실로 가슴이 웅장해질 만했다.
안타깝게도 안도혁은 그런 것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바다는 한두 번 온 것도 아니고.’
지리적으로는 대륙의 반대편에 가깝지만, 고려족 마을에 있을 때 그에게 바다는 거의 일상생활에 가까운 공간이었다. 이제 와서 큰바다를 본다고 별달리 감흥이 올 리는 없었다.
게다가 만약 감성이 넘친다고 해도, 옆에 있는 사람 때문에 그럴 상황도 아니다.
“우웩, 웨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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