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밖은 위험해(6)
무국적 지대에서 한 달 가까이 노숙하며 쫓기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다. 땀에 흙먼지로 절어 있는 상태에서는 암만 미녀라도 거지 이상의 미모를 가질 수가 없을 테니.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깨끗하게 목욕한 후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마친 그녀의 미모는 눈이 부실 정도였다. 아름답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와 물빛의 찰랑이는 머릿결만으로도 그녀가 보통 이상의 외모를 가지고 것에 아무도 이견이 없으리라. 경국지색까진 아니더라도, 길가를 걸으면 사람들이 뒤돌아볼 정도는 충분했다.
서석진은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 술만 줄기차게 먹어대는 그의 모습에 알리시아는 입술을 깨물었으나, 정작 먼저 말을 걸 용기는 내지 못했다.
말을 건 것은 그녀의 동생들 쪽이었다.
“오빠, 되게 잘생겼네요.”
“초인이라고 했죠? 능력도 좋은 것 봐.”
알리시아가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어필을 해야 한다.
“저, 저기, 그러니까아······.”
포도주를 삼키던 서석진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말씀하세요, 알리시아 씨.”
“그, 그.”
입을 열긴 해야 하는데, 마땅한 화제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뇌를 굴린 끝에 알리시아는 간신히 입술을 뗄 수 있었다.
“포, 포도주 맛이 어때요? 저희 집 농장에서 직접 재배한 거에요. 다들 칭찬이 자자하던데······.”
“정말 좋군요. 제가 포도주를 많이 먹어 본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 상품(上品)은 처음 먹어 보는 것 같아요. 늦었지만,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으, 아니에요오······.”
약간은 어색하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한 번 말문이 트이자, 이후의 대화는 조금이나마 자연스러워졌다. 좋아하는 음식부터 시작해서 취미는 뭔지 등의 잡담이 오갔다. 서석진은 대부분 그냥 술을 마시며 듣는 쪽이었지만.
아론과 대화를 나누던 안도혁은 서석진을 흘끔 쳐다보았다.
지금 테이블에 여자는 세 명이 있고, 세 명이 모두 서석진에게 관심이 쏠려 있다. 그것은 안도혁의 외모가 숨만 쉬고 있어도 위압감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흠, 인생 편하게 사는 녀석.’
어릴 때부터 봐온 그의 친구는 언제나 여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또래들은 물론, 한참 나이 차이가 나는 성인 여성들과 동생들도 뭐 떨어지는 것 없나 하며 그의 주위를 어슬렁거리기 일쑤였다.
꽃처럼 아름답다는 게 결코 빈말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예뻤다는 소문이 있는데, 안도혁은 그게 아주 거짓말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식사 자리는 편안하게 끝났다. 안도혁은 만족한 표정으로 배를 쓰다듬었다.
‘상당히 맛있었다.’
불만 없는 좋은 식탁이었다.
안도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연스럽게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성냥을 꺼내 불을 당기려는 찰나, 안도혁은 사람들의 집중되는 시선을 느꼈다.
‘뭐지?’
대답은 아론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죄송하지만, 저택 안은 금연이오.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소이다.”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안도혁은 난생 처음 듣는 – 의미는 알고 있지만 – 단어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그, 금연이라니.”
금연. 말 그대로 흡연을 금지한다는 뜻이다.
안도혁은 지금까지 살아오며 담배를 금지하는 곳을 단 한 곳도 보지 못했다. 고려족 마을에서 평생을 살았으니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다만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고려족 마을 사람들이 흡연에 관대하긴 하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담배 연기를 숨처럼 뿜어대는 안도혁을 좋게 보지 않는 사람 역시 많았다.
안도혁이 지금까지 흡연에 관련해서 별다른 말을 듣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다들 그를 무서워했으니까.
서석진은 속으로 낄낄 웃었다.
‘저런 표정도 다 보네.’
무소불위의 권력 같은 걸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실상 안도혁은 고려족 마을에서 촌장 이상의 위치에 있었다. 그나마 친구인 서석진이나, 최석우 정도가 아니면 농담으로라도 담배는 물론이거니와 어떤 것에 관해서도 핀잔을 주지 못했다.
신선한 충격에 몸을 떠는 안도혁의 등을 서석진이 팡 하고 쳤다.
“좋잖아. 이번 기회에 끊어 보는 건?”
안도혁은 무슨 미친 소리인가 하는 얼굴로 서석진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2m에 가까운 거구가 경멸하는 표정을 짓자, 살짝 움츠러든 서석진은 눈길을 돌렸다.
“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아론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건물 내부에선 조금 난처하지만, 정원 같은 곳에선 얼마든지 피워도 괜찮소. 필요하다면 재떨이도 준비해 드리겠소.”
시종이 재떨이를 들고 밖으로 안내하자, 세상 허탈하다는 표정으로 안도혁이 힘없이 그를 따라 나섰다.
혼자 남은 서석진은 식후주(食後酒)라도 주려나 하는 기대감을 품고 있었지만, 기대는 살짝 어긋났다.
아론이 시종을 부르며 말했다.
“그럼 숙소를 안내해 드리겠소이다. 도혁 님에게도 전달하도록 하겠소.”
뭔가 일찍 자리를 파하는 기분이다. 서석진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으나, 일찍 자는 사람은 벌써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멋진 식사에 잠자리까지 주시다니.”
“손님에겐 당연한 일이지요. 심지어 은인임에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론은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알리시아가 이놈에게 홀딱 빠진 것 같은데.’
딸이 시집을 가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만, 그것은 혼처가 적당할 때에 한정한다.
떠돌이 초인만큼 딸을 맡기기에 위험한 족속은 얼마 없다. 초인들은 기본적으로 간섭을 받기 싫어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에, 한 곳에 정착하는 경우도 많지 않다.
그렇다면 사랑의 결과는 뻔하다.
아무리 사랑을 갈구한들, 그것이 결혼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그저 하룻밤 내지 며칠의 불장난으로 끝날 뿐이다.
성적으로 개방적인 사람들이면 이를 용인할지도 모르나, 안타깝게도 클라우드 가의 가주는 그런 성향이 아니었다. 애초에 딸이 성적으로 개방적인 것을 좋아하는 아버지가 얼마나 있겠냐만은.
‘최대한 빨리 보내야지!’
딸이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초인의 공이다. 그것에 대해선 감사하고, 융숭한 대접에 이어 호위 비용으로 충분한 금전을 내놓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아론은 초인이라는 능력과, 여자 하나는 잘 후리게 생긴 저 면상만 가진 놈팽이에게 딸을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 편안한 밤 되시오. 너희들도 어서 들어가 자거라.”
딸들이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벌써요?”
“조금만 더 얘기하다 자고 싶은데.”
물론, 투정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알리시아의 동생들은 툴툴대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고, 남아 있던 알리시아도 살짝 아쉬운 눈빛만 남겼을 뿐, 이내 촛불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후우우.”
담배 연기가 밤하늘을 은하수처럼 수놓는다. 몇 개를 쉬지도 않고 피우는지, 얼핏 보면 눈과 귀로도 연기를 뿜는다 싶은 모습이었다.
벌써 꽉 차버린 재떨이에 꽁초 하나를 추가하며, 안도혁은 다른 여송연에 불을 당겼다.
저택 안의 기척이 조용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벌써 잘 시간인가?’
달의 위치와 어둠이 깔린 것을 보아하니, 농사꾼 같은 사람들은 이미 저녁에 들었을 시간이다. 그만 피우고 들어갈까 하는 생각을 하던 무렵, 안도혁의 감각권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상대는 안도혁을 보더니 곧장 그에게로 걸어왔다.
안도혁은 굳이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사람은 코델이었다.
중년의 기사는 여행할 때와는 달리 경장의 차림새였다. 다만 여독이 아직 풀리지 않았는지, 얼굴에는 초췌함이 남아 있었다.
안도혁은 담배를 내밀었다.
“한 대 어떠신지?”
코델은 살짝 멈칫했지만, 이윽고 여송연을 받아들었다.
달빛에 비친, 담배 연기를 내뱉는 중년 기사의 옆얼굴은 그림 같은 중후함을 자랑했다. 안도혁은 그것을 보고 살짝 감탄했다.
‘수염이라도 길러 볼까?’
털이 자란다면 말이지만.
코델의 얼굴은 수심에 잠겨 있었다. 눈치가 없지 않은 안도혁은 굳이 말을 붙여야 하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찾아드는 호기심에 입을 열었다.
“고민이라도 있으신 모양인데.”
코델은 말없이 담배를 한 모금 더 빨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서 처음 하는 생각은 아니지만, 너무 한심하단 생각이 듭니다.”
“그게 무슨?”
“가진 바 강함이 말이지요. 너무나 개탄스럽습니다.”
무인으로, 기사로 살아가는 것에 후회는 없다. 하지만 간혹 코델은 자괴감에 빠질 때가 있었다.
‘정말 이게 정답이었나?’
무(武)를 수련하는 사람들은 여러 부류가 있지만, 그들의 목적지는 하나로 귀결된다.
초인.
인간의 한계를 넘는 것.
수련자들은 모두 초인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모래사장의 모래처럼 많은 사람들 중 실제로 초인이 되는 케이스는 겨우 한 줌 뿐, 나머지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노력한다고 모두 초인이 되는 것 또한 아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수련을 얼마 하지도 않은 사람이 초인이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던 것이다.
결국, 초인이 되는 데엔 노력이 중요하지만, 재능은 필수적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재능이 없는 사람은 범인에 그치는 게 이 세계였다.
코델 역시 범인 중 한 사람을 담당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초인의 경지에는 결코 오르지 못했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손아귀는 인간의 힘 이상의 것을 내지 못했다.
코델은 한탄 섞인, 자조적인 웃음을 내뱉었다.
“40살이 될 때까지 평생을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초인이 되지 못했지요. 고작 산적들 따위로부터 주인을 지켜내지도 못하는 신세라니.”
“······.”
“지금까지 걸어온 제 길은 도대체 뭐였던 걸까요.”
여행 동안 서로 잡담을 나누다 보니, 안도혁과 서석진의 나이 얘기 역시 나오게 되었다.
젊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들의 나이를 듣자, 코델은 절망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보통 초인이라 불리는 족속들은 젊지 않다.
어린 시절, 젊은 시절을 불태우듯이 수련하고, 중년기에 접어들어 노련함이 몸에 붙을 무렵, 어느 순간 육체가 바뀌는 것이 느껴진다.
피부는 깨끗해지고, 손에선 새로운 힘이 느껴진다.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초인이 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다.”
회춘하는 것처럼 육체가 젊어지니, 그것 외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즉, 보통의 초인들은 중년기에 접어들어 그 가능성을 마침내 개화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예외라는 것이 언제나 존재한다.
젊을 때부터 초인이 된 자들. 간혹 가다 그런 괴물들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눈부신 젊음을 수련에 쏟고 있을 때, 젊음을 실컷 만끽하며 살아갈 수 있는 자들이다.
“저는 왜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던 걸까요. 신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이야기를 듣던 안도혁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아니, 그러면 세상이 평등하단 소립니까?”
누구는 평민으로 태어나고, 누구는 노예로 태어나는 반면, 귀족으로 태어나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지 않다. 그것은 신분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소리다.
“그런 말은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밖에 한탄할 수 없는 제 자신이 한심할 뿐입니다.”
“거 참 우울한 양반이네. 아저씨, 진짜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고 확신합니까?”
코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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