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毛)자라지 않은 녀석(6)
안도혁은 헛웃음을 지었다.
"인외라구요?"
"네, 그렇습니다. 세상에 인간만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요정도, 용족도, 수인족도, 인어도 있습니다. 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안도혁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 인간이 누굴 바보로 아는 건가?'
안도혁이 머리가 모자라서 그 생각을 안 한 것이 아니었다.
타 종족은 인간 세상에서 그 자취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많이 보이는 축에 속하는 수인족의 경우, 과학적 지식을 기대하기엔 그른 종족이다. 용족은 평생 한 번 보면 많이 볼 만큼 개체수가 적은 것들이고, 인어는 바닷속에서만 사는 탓에 존재하는지도 알기 어렵다. 요정은 쇄국 정책이라도 펴는지, 그들의 숲 속에서만 살아가며 극단적으로 폐쇄적이라 뭘 하고 사는지 알 수도 없다.
이종족에 관해서는 생각을 못하는 게 아니라,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안도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지, 알렉스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특히 주목할 것은 요정입니다. 안도혁 공, 혹시 요정의 특성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그건······."
생각해보니 아는 게 없었다.
당연하다. 애초에 사고의 구석에 밀어둔 것들인데.
안도혁이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을 보며 알렉스는 말했다.
"요정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그 체분(體粉)입니다. 겉보기에는 별 거 없어 보여도, 그들의 몸에선 아주 미세한 가루가 흩어져 나옵니다. 이를 받아들인 식물은 그 성장이 기형화되어, 활엽수가 겨울에도 잎을 빳빳하게 세우고 있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빳빳이란 단어에 서석진이 움찔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기형적으로 자라나는 식물들은, 이미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식물과는 다른 종이 됩니다. 완벽하게요. 그런 요정들이 추출하는 식물의 효과, 희망을 기대해도 좋지 않겠습니까?"
"······!"
"약학에 대해 조금의 지식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다들 알겠지만, 식물은 어느 계절에 채취하냐에 따라, 어떤 성장 상태냐에 따라 모두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다릅니다. 단순히 인간 세상에 나와 있는 식물들보다는 요정들의 것이 약효의 범위가 넓지 않겠습니까?"
분위기가 조금씩 격양되었다. 흥분한 두 명의 초인들에게 알렉스는 쐐기를 박았다.
"일례로, 요정들이 자주 음용하는 음료 중 하나가 세상에 나온 적이 있지요. 그들은 일상적으로 마시는 음료라고 했지만, 그것의 효과는 실로 지대했습니다. 마신 사람의 피부가 탱탱해져서, 거의 세 달은 회춘한 겁니다! 기록에도 나와 있습니다!"
신나서 소리지르려던 안도혁과 서석진은 멈칫하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거 좀 애매한 수치 아니냐?'
'효과가 있기는 한 것 같은데······.'
"두 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별 약도 아닌 그냥 음료수가, 우리 인간으로 따지면 커피나 오렌지 주스 같은 음료가 회춘의 효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약으로서 조제하는 물건들이 무슨 효과를 가지는지는······."
일부러 뒤의 말을 흐렸다. 뒷말은 상상에 맡기겠다는 투다.
흥분을 애써 가라앉힌 서석진이 말했다.
"가능성이 확실히 있다는 아저씨 말씀은 잘 알겠어요. 그런데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변하지 않았잖아요."
안도혁도 맞장구쳤다.
"요정과 접촉이 어렵다는 게 문제죠."
물론 예상한 일이다.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상황이라면 그렇습니다. 보통이라면요."
"그게 무슨······?"
그 때, 알렉스는 주의 깊게 사방을 살폈다. 마치 듣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되는 것처럼.
흘끔 사방을 둘러본 안도혁이 말했다.
"반경 50m 안쪽으론 새 몇 마리밖에 없어요. 말해 봐요."
안도혁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알렉스는 딱히 그의 말을 의심하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목소리는 속삭이듯이 낮았다.
"아직 노예제가 시행되는 나라가 있다는 걸 알고 계시죠?"
인간과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그리고 그 불평등함을 이용하여, 어떤 인간은 다른 인간을 소유물화하기도 한다.
노예제는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 어디에든 존재했다. 그 명칭과 대우의 차이가 일부 존재할 수는 있지만, 인간은 다른 인간을 노예로 삼는 데에 너무나도 익숙한 종족이다. 또한 이 노예제는 같은 인간뿐 아니라, 다른 종족에게도 적용되는 경우가 있다.
"저 대륙 최남단에 있는 아스란 왕국에서는 아직도 노예제가 합법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일부 허용하는 곳도, 금지하는 곳도 있습니다만, 아스란 왕국처럼 대놓고 노예를 사고 팔지는 않죠. 게다가 이종족이라면 더욱 그렇죠. 수인족 노예라도 사고 팔다 국제 문제로 번지면 보통 난리가 아니니 말입니다."
이쯤 되면 눈치를 못 채는 쪽이 바보다.
"믿을 만한 정보통에 따르면, 내년 여름에 아스란 왕국에서 노예 경매가 있을 예정입니다. 희귀한 노예를 가지고 싶어하는 귀족 나리들이 전 세계에서 암암리에 모여드는 경매가요. 용족 빼고 모든 노예가 다 있다는 곳이니, 요정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겁니다. '요정의 숲'으로 안내할 요정을."
보통 사람은 알 리가 없는 정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귀족들 사이에서만 공유될 법한 소식이니까. 안도혁은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실력 좋은 상인 아저씨를 재평가했다.
"아마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오래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저번 경매는 3년 전이었으니까요. 3년마다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경매라고 생각하면 마음은 편하겠습니다만, 그렇다고 3년을 더 기다리실 리는 없겠죠."
안도혁과 서석진은 벌새가 날개치듯 고개를 세차게 좌우로 흔들었다.
'반질반질하게 3년을 더 버티라고?'
'3년 동안 내가 자살을 안 하고 있을 확률은?'
답은 뻔했다. 알렉스는 허리를 툭툭 치며 고개를 일으켰다.
"일단 내년 7월 경에 열리는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일시는 아직 미정이지만, 열리기 한 달 전까진 소식을 받을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쇼. 그러니 두 분은 그때까지 경매에 참가할 자금을······."
그의 말은 거기서 끊겼다. 안도혁과 서석진이 각각 그의 앞과 뒤를 막아섰기 때문이다.
"저, 저기? 지금 무슨······."
의식이 갑자기 땅으로 훅 꺼지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그는 하늘 위에 있었다.
"어어?"
휘유우우
귓가에 소름 끼치게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가 들린다. 지금껏 땅을 열심히 딛고 있던 그의 다리는, 공기만을 밟고 바둥거리고 있었다.
'이게 뭔 일이냐?'
순간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했지만, 그럴 리는 없다. 매서운 가을바람이 지나치게 현실감을 부여하고 있었으니까.
멍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자, 있을 수 없는 풍경이 보였다.
'땅?'
땅이다. 땅이 보인다. 다만 그 땅이라는 게 아주 멀리 보였다. 마치 고층 건물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이 시점에서 알렉스는 진상을 파악했다.
'이 미친 새끼들!'
단순한 일이다. 안도혁과 서석진이 그를 헹가레로 하늘 높이 날려보낸 것 뿐이었다.
후와아악
20미터에 가까운 높이에서 지상으로 수직낙하한 알렉스는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지만, 두 초인은 그런 사소한 일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흐아아아아!"
비명과 함께 땅으로 떨어지는 알렉스. 그런 그의 몸을 가볍게 받아낸 두 사람은 온 몸으로 비명을 지르는 그를 다시 하늘로 날렸다.
좀 더 높아진 것 같기도 했다.
"알렉스 만세!"
"만만세!"
통상적인 인간이 저 높이에서 떨어지는 사람을 받는다면 떨어지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성할 리 없지만, 초인에겐 별 거 아닌 문제다. 알렉스는 기를 쓰고 욕설과 발악이 섞인 발버둥을 치고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하늘 위로 한 번 더 띄워질 뿐이었다.
"야, 이 미친 새끼들아!"
들리지 않는 건지, 들을 생각이 없는 건지는 알 길이 없다. 둘은 싱글벙글 웃고만 있었다.
어쨌든 초인들은 알렉스에게 하늘 여행 왕복 티켓을 끊어 주는 것이 그리 아깝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네 번째쯤 날아오르자, 알렉스는 기절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알렉스 최고!"
"형이라 불러도 될까요?"
그날 밤, 하늘로 열 번 넘게 날아오른 한 상인은 이번 상행에 참가했던 것을 격하게 후회했다.
최석우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아아, 예.예예."
축제는 사흘 동안 이루어졌고, 거래 역시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러나 상행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알렉스의 얼굴에서는 초췌함 이상의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최석우는 살짝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알렉스를 응시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아아아뇨. 아아무 일도 어어없습니다다."
전쟁에서 귀환한 병사의 표정이 저러할까. 얼굴에서만 살이 2킬로는 빠져 보이는 알렉스에게 최석우는 의아함과 당혹감이 동시에 들었으나, 애써 묻지 않기로 했다. 본인이 괜찮다는데야 별 일이 있을까.
'컨디션이 갑자기 안 좋아졌겠지.'
상행은 왔을 때보다 더 많은 물품을 싣고 마을을 떠나갔다. 며칠 간의 꿀 같은 휴식은 사라지고 다시 고난의 행군을 해야 하는 상행이다. 몇몇 사람들의 눈에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머무를 수도 없다. 시간을 더 지체할 수도 없다. 시간이란 언제나 한정되어 있으니까.
잘 무두질 된 가죽을 위시한 몬스터의 부산물들을 가득 싣고 가는 그들의 수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휘이이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들판을 가볍게 어루만지고 지나간다. 축제의 잔향에 젖은 것도 잠시, 상행을 전송하기 위해 나왔던 사람들은 하나 둘 마을로 돌아갔다.
축제는 끝났다. 잠시간의 유희는 이제 종료하고, 일상으로 복귀할 때다.
아직 축제 기운이 남았음인가. 아니면 어제 먹은 술이 덜 깬 것일까. 살짝 알딸딸한 기분에 젖어 있던 최석우는 숨을 크게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나도 일하러 가볼까!'
걸음을 옮기려던 차, 그의 눈앞에 거대한 벽이 등장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 그곳에는 어떤 것도 없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최석우. 그러나 그에게 이 상황은 꽤 익숙했다. 그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아, 그렇게 좀 나오지 말라고 했잖냐! 노인네 심장 떨어지겠다!"
벽, 안도혁은 피식 웃었다.
"젊은 양반이 무슨. 익숙해지라고."
"익숙해졌어! 네놈 덕분에 익숙해졌고말고! 근데 익숙해지면 안 놀라냐, 이 망둥이 같은 놈아!"
이 인간 잔소리를 들어주다간 귀찮아진다. 안도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잔소리는 잠깐 미뤄 봐. 형에게 할 얘기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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