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14)
비밀리에 진행되었기에 역사서에는 남지 않은 출전. 아레스틴 그라티아 타란토스를 암살하기 위해 출동한 제국 기사의 숫자는 총 52명이었다.
비록 참패를 당했다지만, 그들이 대단한 부상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안도혁에게 얻어맞아 쓰러진 상처가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적어도 회복될 수 있을 정도의 부상이었다. 초인 기사들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깔끔하게 털고 일어날 상처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달랐다. 49명의 기사들은 모두 병상 신세였던 것이다.
"우웩, 웨에엑."
한 기사가 피를 토한다.
"추, 추워. 누가 모포를, 장작을 좀 더······."
화로 여섯 개에 둘러싸인, 모포의 산 아래에 깔려 있는 기사가 온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그 날의 출진 이후, 제국으로 복귀한 기사들은 단 세 명을 제외하면 모두 원인 모를 질병에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몸이 성한 자는 딱 세 명밖에 없었다. 마리아 피셔, 헤이든 슈미트, 그리고 서석진이었다.
동료들의 병실을 이리저리 오가며 문병하던 서석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다들 저렇게 된 거지?"
너나 할 것 없이 중환자 신세다. 초인은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정면으로 부정하듯, 전원이 다 저 모양이었다.
원인 모를 질병인가 생각해 봤지만, 그렇다기엔 서석진이 멀쩡하다는 게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밖에 없었다.
'도혁이한테 얻어 맞았어.'
참으로 남녀평등주의자답게도 안도혁은 남자든 여자든 모두 공평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49명의 인물은 모두 안도혁과 직접적인 접촉이 있었다.
'그렇다면 헤이든 소장은?'
헤이든은 다른 자들과 다르게 병에 시달리지 않았다. 그 강철 주먹에 맞아 안면붕괴가 올 뻔했음에도 불구하고.
'강한 사람은 뭔가 다른 걸까.'
안도혁 같은 인외마경 수준엔 들지 못하지만, 서석진 시점에서는 헤이든 역시 괴물이다. 적어도 서석진은 헤이든과 대등히 맞서 싸우는 자신의 모습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
콰당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마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기, 괜찮아?"
"누나 돌아왔어?"
수도에 간다더니 생각보다 빨리 왔네라는 소리를 할 새도 없이, 마리아는 서석에게 달라붙듯 다가왔다.
황급히 서석진을 살피는 마리아. 머리를 만져 보더니 어깨, 가슴, 허리, 다리까지 훑었다. 눈으로도 손으로도.
점점 손의 움직임이 야릇하게 변하고 있었다. 조금 더 은밀한 부위까지 스르르 다가온다.
기겁하며 몸을 피하는 서석진을 보며 아쉬운 표정으로 마리아는 혀를 날름거렸다.
"오늘 따라 더 이뻐 보이네. 닳는 것도 아닌데 너무 빼지 마아."
"제발. 환자들도 있는데 그러지 좀 말자."
같이 있으면 부지불식간에 덮쳐오는 성희롱 때문에 제대로 살 수가 없다. 이러다간 심장이 몇 개라도 모자랄 것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사람들 용태를 살피러 온 거야?"
"그것도 있지만······."
어느새 마리아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이었다.
"헤이든 소장이 병석에 누웠어."
"뭐, 뭐라고?"
그녀의 말에 따르면, 임무 실패를 보고하고 나오는 중에 사단이 났다. 황성에서 나오는 중, 갑자기 헤이든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는 것이다.
급히 중환자실로 옮겨진 헤이든은 현재 의식이 없다고 한다.
"원인 불명의 각혈과 고열······이라고는 하지만, 짐작가는 게 있지?"
서석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병석에 누워 있는 기사들의 증세는 제각기 다르다. 누군가는 고통을 호소하고, 누구는 피를 토한다.
그러나 원인은 분명하다. 공통분모는 하나밖에 없다.
안도혁과 강한 접촉이 있었다는 것.
"정천 경은 질병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거야?"
서석진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 봤잖아, 머리카락 없는 거?"
"그건 그런데······."
반쪽짜리의 기본적인 특징은 신체 결손이다. 영구적으로 없는 부위가 있던지, 혹은 고칠 수 없는 병이 생긴다. 어쩌면 두 개가 다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게까지 운이 없는 케이스는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
강함은 둘째 치더라도, 반쪽짜리인 이상 이능을 가질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전에 내가 말했지. 초인에게 유일하게 통하는 독이 있다고."
"용의 피라고 했던가?"
"맞아. 그리고 꼭 혈액으로만 병에 걸리는 건 아니야. 장기간의 접촉이나, 단기간의 커다란 충격으로도 가능해. 그리고 지금 그와 접촉한 기사들은 모두 환자 신세야.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
서석진은 별로 머리가 좋지 않다. 그것은 본인 또한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의 부족한 두뇌로도 마리아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유추할 수 있었다.
최악의 가정이 떠올랐다.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고 했지?"
서석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이 나는 순간부터 항상 같이 있었어. 코찔찔이었던 꼬맹이 시절부터."
"어느 순간, 그 사람이 장기간 사라진 적이 있지 않았니?"
서석진은 입을 다물었다.
분명 인생의 어느 한 시기, 안도혁은 눈에 띄게 바뀌어 돌아온 적이 있었다.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고작 반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인간이라는 게 그렇게까지 기형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서석진은 낙천적으로 생각했다. 그의 목소리, 행실, 심지어는 기억까지도 그가 생각하던 친구와 아주 흡사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뭐. 아마 그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마리아의 음성이 떨려왔다.
"용족은 인간의 형태로 변할 수 있어."
뒷말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서석진은 눈쌀을 찌푸렸다.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는 거야? 변하는 형태엔 제한이 없어?"
"알 수 없지. 용족의 생태에 대한 건 밝혀진 것보다 밝혀지지 않는 게 훨씬 많아. 하지만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
"그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평생을 봐 온 그의 친구는 사실 용족이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물론 반박할 거리는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멀쩡한데. 도혁이의 피를 뒤집어 쓴 적도 있고, 녀석과는 오랜 세월을 함께해왔어. 20년이 훨씬 넘는단 말이야!"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겠지."
마리아가 소리쳤다.
"들어오게!"
쭈뼛거리는 모양새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상복 차림이었지만, 기사를 상징하는 문양을 지니고 있었기에 서석진은 그가 기사라는 것을 알았다.
타는 듯한 불꽃의 머릿결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와 반대로 심성 자체는 유약해 보였다. 뭔가 불안해 보이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제국 기사들 목록을 전부 다 뒤져서 찾은 귀한 능력자야. 인사해. 루드 경이야."
"아, 안녕하십니까?"
서석진은 마주 인사를 건넸다.
"그래서, 이 분이 무얼 할 수 있다는 거야?"
"루드 경은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
마리아는 싱긋 웃으며 루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바로, 능력 파악이야."
"엥?"
이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이 오지 않은 서석진은, 일단 입을 다물기로 했다.
"자기가 왜 정천 경과 장기간 접촉했는데도 멀쩡한지는 몰라. 그래서 가설을 하나 세워 봤지. 바로 자기가 그런 종류의 질병을 무효화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서석진은 이 여자가 자신을 바보로 생각하나 의심할 정도였다.
"아니, 나 비능력자라며? 능력 파악을 해서 어쩌게?"
없는 능력이 만들어지기라도 하냐?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마리아는 서석진이 입을 열기 전에 자신의 논지를 펼쳤다.
"내가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사실 반쪽짜리라도 능력 파악은 가능해. 반쪽짜리는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능력이 개화하지 않은 것에 가까워. 평생 능력을 개화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몰랐네. 그런데 나 비능력자라니까? 내가 그런 종류의 능력이 있다고 한들, 누나 말대로라면 개화를 안 한 상태라면서?"
"혹시 아니. 부분적으로는 이미 발휘를 하고 있는지? 실증 사례로, 발화(發火)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능력이 부분적으로만 개화해, 자신이 내쏘는 불꽃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어."
"그런 억지가······."
그러나 마리아의 표정은 굳건했다. 장난기 하나 없는 얼굴이었다.
할 수 없이 서석진은 검사를 받기로 했다.
루드는 검사를 하기 위해선 서로 악수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남자의 손을 잡는 게 여간 찝찝한 게 아니었지만, 서석진은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서석진의 손을 잡은 루드가 햐 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소, 소문으로는 들었지만, 정말 미남이시네요. 손도 부, 부드러우신 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서석진은 하마터면 몸서리칠 뻔했다.
맞잡은 손에 땀이 약간 맺힐 무렵.
처음에는 헤헤거리며 웃고만 있던 루드의 표정이 어느새 돌변했다. 서석진을 한 번 쳐다보고, 그와 맞잡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던 루드 경은 이내 한 마디를 내뱉었다.
"뭐 이딴 능력이 다 있어?"
팩
루드는 서석진의 손을 뿌리치듯 놓았다. 난데없는 무례에 서석진이 당황하기도 전, 마리아는 루드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내 남자에게 무슨 짓이지? 루드 소령, 오늘부로 기사는 은퇴하고 관에 꽃장식을 하고 싶은가?"
상황을 보면 루드가 일방적으로 서석진에게 무례를 범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캑캑거리며 루드가 황급히 팔을 내저었다.
"그, 그게 아닙니다! 장군님, 그냥 저, 저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쯤 되자 서석진도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자신에 대한 정보인데 어떤 인간인들 궁금하지 않을까.
마리아는 루드를 내려놓았다. 숨을 고른 루드가 서석진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올해로 40살이 다 되어갑니다만, 평생 이런 능력자는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기록에도 없을 것입니다."
"······그게 뭔데?"
루드는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그러나 마리아의 앞이기에 최대한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내용은 까무러칠 만한 것이었다.
"천미(天美)입니다."
"뭐라고?"
난생 처음 듣는 소리에 마리아와 서석진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저게 무슨 단어지?'
'나도 모르겠는데.'
루드의 설명이 이어졌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오직 아름다움이 가득한 외모입니다. 성별도, 국경도, 심지어 종족도 초월한, 예,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외모입니다."
"그건 나도 잘 알아."
내가 남자 하난 잘 잡았지란 표정으로 가슴을 내밀자, 루드는 손사래를 쳤다.
"그게 능력입니다. 중장님."
"······."
사태가 기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 잠시만요. 제 능력은 그냥 잘생겨지는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맞습니다. 아마 중년, 노년이 되어도 당신의 외모는 쇠하지 않겠지요. 그 나이에 맞게 가장 빛나고 있을 것입니다."
질투 가득한 루드의 눈빛에 서석진은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루드는 곧 떠나갔다. '재수없는 새끼'라는 말을 내뱉은 것 같았지만, 서석진은 애써 듣지 않았다.
마리아는 기운이 쭉 빠진 서석진을 위로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저 상투적인 말만을 할 수 있을 뿐.
"괜찮아······?"
서석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슬픈 것은 아니었다. 그와는 조금 달랐다.
굳이 표현하자면, 허탈함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합할 듯 했다.
"기운 내. 그래도 친구가 용족이 아니란 건 알게 됐네······."
마리아가 서석진의 등을 두드리고 있자, 갑자기 루드가 다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리고 무슨 비능력자입니까? 이미 다 개화해 놓고선."
이 말엔 두 사람이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리아의 눈이 빛났다. 반면, 서석진의 안색은 새파래졌다.
루드가 다시 떠나가자 서석진은 비명처럼 외쳤다.
"야! 그대로 그냥 가면 어떡해!!"
사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전선에서 복귀한 후, 서석진은 스스토의 몸 상태가 이전과는 확연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달라진 것을 깨달았다.
확신이 없어 가만히 있었지만, 이제 확실해졌다. 공인까지 받은 것이다.
분명 기뻐해야 했다. 행복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고개 숙인 남자라는 오명을 벗어 던질 수 있다. 그러나 서석진이 나팔이라도 불 듯 뛰어다니지 않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루드가 사라진 자리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던 서석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뱀이 온몸을 기어다니고 있어도 이만큼 소름끼치진 않으리라.
"자기?"
아주 청아하고 고운, 그러나 뱀이 쉿쉿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 음성이 서석진의 뒷목을 사르르 기었다.
'아, 아······.'
조금 울고 싶어졌다.
아니, 조금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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