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의 숲(3)
일행이 안내받은 곳은 한 커다란 나무였다. 거주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기타 나무들처럼 이 나무 역시 속이 비어 있었다.
“일단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쉬시죠.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아침에 다시 하도록 하지요.”
합당한 그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레이나는 필요한 물건이 있는지 등등의 편의를 물어본 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루나는 씻지도 못하고 근처 침대에 엎어져 기절했다. 짐을 정리할까 말까를 고민하던 무렵, 안도혁은 에스턴이 집안이 아니라 나무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요정들이 다른 종족과 비교해 유달리 특이한 점이 있다면, 나무를 침대처럼 쓰는 것이다.
절묘한 신체 밸런스와 가벼운 체중은 그들의 몸을 나뭇가지에 지탱할 수 있게 해 준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요정에게는 밥 먹는 것 이상으로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여행 도중 노숙할 일이 있을 때 에스턴의 그런 모습을 보고 안도혁과 서석진은 따라 해 보려고 노력한 적이 있다.
결론적으로 그건 불가능했다. 초인의 육체는 보이는 체적 이상으로 체중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나간다. 곰이 나무 위에서 자려고 까부는 격이었다.
조용한 마을의 정경을 보며 안도혁은 여송연을 꺼내 물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광경에 심취하진 않았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곧 푸르름을 되찾을 때가 온다.
어느덧 다가온 서석진이 술병을 꺼내 들며 말했다.
“잠이 오지 않아?”
가슴의 두근거림은 거짓이 아닐 터였다. 긴장감이 들지 않을 리 없었다.
“남 말할 처지는 아닌 것 같군.”
“그래서 술기운을 빌리고 있는 거잖아.”
씨익 웃으며 술병을 기울이는 친구의 모습에 안도혁은 조금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희망이다. 이제 눈앞에 희망이 가까이 다가와 있다. 비록 그 희망의 빛이 어떤 색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반딧불 같았지만, 반딧불보다는 호롱불에 가까운 광량을 가진 것들이 허공을 날아왔다. 자세히 보니, 그것들은 페어리였다.
처음 본 인간이 신기한 듯, 그들은 서석진의 근처를 빙빙 맴돌았다.
“인간이다, 인간이다.”
“엄청 잘생긴 인간이다!”
잠자리 같은 날개를 가진 손바닥 크기의 사람이 날아다니는 광경에 익숙한 인간은 별로 없을 것이다. 서석진은 현실과의 묘한 기시감이 드는 기분이 들었다.
몰려든 페어리들은 상당히 많았다. 그 숫자만 따져도 양손으로 세진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모든 페어리들은, 처음 인간을 보는 것임에도 안도혁의 근처로는 전혀 오지도 않았다. 내심 기대했던 안도혁은 실망을 표했다.
‘아니, 얼굴이 아무리 차이가 나도 그렇지.’
털이 없는 것을 제외하면 평소 외모에 대한 자격지심이 딱히 없는 안도혁이었지만, 이 극단적으로 불공정한 처사에는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자 페어리들만 그러면 이해라도 하겠지만, 남성형 페어리들도 안도혁의 근처론 접근하지 않았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거대하기 때문에 그런가도 생각해 봤지만, 신장이 기껏해야 15cm 안팎인 페어리들에게 안도혁이나 서적진이나 그다지 큰 차이로 보이진 않을 듯했다.
신경질적으로 담배 연기를 뻑뻑 뿜는 안도혁을 보며 웃던 서석진은, 문득 페어리들이 몸을 떨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 무서워.”
“저 인간 뭐야? 인간인데, 분명히 인간인데.”
사시나무처럼 떠는 그들의 모습에 서석진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쟤가 그렇게 무섭게 생겼나?’
물론 무례한 사람을 자동으로 겸손하게 만드는 외모임은 서석진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면 분명한 호남의 상이었다. 물론 자세히 살펴볼 용기가 있다면 말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페어리들은 모두 떠나갔다. 흥미를 잃었다기보다는, 악몽을 꾼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페어리들이 줄지어 날아가는 모습은 마치 가까이서 은하수를 보는 것처럼 환상적이었지만, 서석진은 그것이 썩 좋은 징조로 보이지만은 않았다.
‘기분이 조금 이상한데······.’
거대한 대전. 아치 형태의 기둥들이 인상적인 그곳은 휑할 정도로 여백의 미가 돋보이는 공간이었다. 장식이라고는 거의 존재하지 않고, 기둥에 새겨진 조금의 부조(浮彫)만이 그나마 체면을 차렸다 싶을 정도로 멋을 낼 뿐, 기본적으로 깔끔하다 못해 황량하기까지 한 곳이었다.
규모가 작았다면 조금 다르게 보였을 수도 있으나, 문제는 공간의 크기였다.
인간의 신장 정도는 말 그대로 ‘따위’라고 칭할 만큼 높았고, 기둥 사이의 거리 하나하나를 구획으로 삼아도 될 정도로 넓었다. 인간이 쓰기에는 불필요할 정도로 큰 건물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이곳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었다.
천룡신전(天龍神殿). 그렇게 불리는 건물이다.
대전의 끝부분에는 옥좌가 위치했다. 옥좌는 그 주인의 사상을 반영하듯 검소하기 짝이 없었는데, 아무 재료도 쓰지 않고 그저 돌로만 조각한 의자에 불과했다. 의외로 옥좌는 건물과는 맞지 않게 인간이 앉아도 될 사이즈였는데, 이것 역시 주인의 사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옥좌에는 천룡왕, 캘러무스가 수정구 하나를 든 채 앉아 있었다.
캘러무스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열이 머리 끝까지 뻗칠 정도로 정신 수양이 덜 된 몸은 아니었지만, 누가 건드리면 분노가 활화산처럼 폭발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이를 으득거리며 옥좌의 귀퉁이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캘러무스의 앞에는 커다란 수정구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것의 위에는 조그마한 여자의 영상이 홀로그램화되어 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지룡왕 셀리테라였다.
캘러무스는 홀로그램을 보며 말했다.
“셀리, 애새끼들 똑바로 관리 안 하는 거냐?”
며칠 전, 운영하는 사업장 중 하나가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수익 자체에 신경을 쓰는 건 아니었다. 용왕의 위를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는 그에게 재물 따위는 의미도 없었다.
그 사업장은 오랜 세월 동안 공들여 키운 것이었다. 부서질세라 안절부절 못하기도 하며, 마치 트럼프 카드로 탑을 쌓듯 조심조심 관리해왔다.
어느덧 사업은 궤도에 올랐고, 이젠 대륙의 부를 크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규모도 커졌다. 신용도 원만하게 쌓여, 가만히 놔두어도 문제없이 운용되었다.
거기까지 걸린 세월이 자그마치 100년에 가까웠다.
“백 년 동안 공들여 쌓던 탑이 한순간에 다 무너졌어!”
물질적 피해야 어느 정도 복구할 수 있다. 용왕의 재보를 털어넣으면 그까짓 것은 금방 메워진다.
그러나 여지껏 쌓아왔던 신용도가 문제다. 바닥을 쳐버린 신용을 다시 복구하는 건 어느 세상에서든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복구에 노력은 해 보겠지만, 그게 정상으로 돌아올지는 과연.
수정구 건너편에 있는 셀리테라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미안해. 설마 그럴 줄은 몰랐어.
“허무하다. 이렇게 쉽게 하나가 망해 버리다니.”
나 허탈하다는 얼굴을 저렇게 표현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생기를 잃어버린 캘러무스의 모습에 셀리테라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캘, 화났어?
그럼 화가 안 났겠냐?
하지만 천룡왕은 분노조절을 잘 할 줄 아는 남자였다.
“······뭐, 지나간 일에 집착해봤자지. 일단 복구 작업이나 좀 도와줘.”
-그래. 인원 지원은 얼마나 해 주면 되겠니?
“일단 잃어버린 놈들의 일부 정도는 새로 보충해야 하니까, 목록을 보낼 테니 네가 알아서 선별해줘. 노동력이야 이쪽에도 충분해.”
-다른 필요한 건 없어?
캘러무스는 길게 자란 그의 머리카락을 빙빙 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얘기를 듣자 하니, 이번 일의 흉수가 확실히 하나 있긴 하던데.’
증인이 너무 많다. 리더격으로 보이는 호랑이 수인족이 있었다고 모두들 입을 모아 말했다.
허수아비일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수인족의 특성상 그러기는 쉽지 않다.
‘마음 같아서는 잡아 족쳐야 하겠다만······.’
과연 그게 길이 될지 흉이 될지는 모를 일이다.
고민하던 캘러무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단은 그거면 됐어. 다른 필요한 게 생기면 다시 연락을 줄게.”
-그래. 예쁘고 튼튼한 애들로 골라서 보내 줄게!
“꼭 그럴 것까지는 없는데······.”
통신이 끊겼다. 수정구 위에 떠 있던 홀로그램이 사라지는 걸 보며 캘러무스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잠시 그러고 있을 찰나, 수정구가 지지직거리며 영상을 토해냈다.
“이번엔 또 뭐야?”
수정구를 조작하니, 익숙한 얼굴이 홀로그램화되어 나타났다. 캘러무스는 짜증 섞인 목소리를 토해냈다.
“너 내가 아무 때나 수정구 쓰지 말라고 했······.”
-죄송합니다, 용왕님! 아무래도 큰일이 난 것 같습니다!
캘러무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용왕의 말을 끊는다는 무례. 아무리 익숙한 자라도 쉽게 용납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수정구 저편에 있는 상대는 그것을 몹시 잘 알고 있는 자였다. 그렇기에 캘러무스는 무례에 집착하기보단 사안의 심각성에 집중했다.
“말해 봐.”
-아르피키라가 해룡족에게 당했다고 합니다! 꼬리가 반쯤 끊어진 채로 간신히 귀환했습니다.
“······그게 누구야?”
-페니시아의 아들입니다. 혹시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걔가 언제 아들을 낳았더라.”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 모습을 떠올리려고 노력했으나, 결론적으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설명이 이어졌다.
-패룡대(霸龍隊)의 대장 자리를 맡고 있는 자입니다.
캘러무스는 무릎을 탁 쳤다.
“아, 그 녀석! 염동력이 주특기였던 그 꼬마 말이지!”
모호했던 기억의 퍼즐이 하나하나 맞추어지기 시작했다.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자, 자연스레 의문도 두둥실 떠올랐다.
‘잠깐, 그 녀석이 그렇게 약할 리가 없는데.’
아무리 천룡족이 다른 용족에 비해 육체 내구력이 떨어진다고는 하지만, 그 지위를 맡고 있는 자라면 전 용족을 통틀어도 무시 못 할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 수준이다.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어쨌든 당한 건 당한 거다. 캘러무스는 핀잔을 주듯이 말했다.
“거 참, 바다에서 해룡 녀석이랑 싸웠다고는 해도 말이야. 응? 명색이 패룡대의 대장이라는 녀석이 맞고 들어오다니. 그래서, 뭣 때문에 꼬리까지 잘려서 온 거래?”
상대방은 고개를 숙였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아르피카라의 말에 따르면 해룡족이 그의 활동 영역을 침범한 모양입니다.
캘러무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그럴 리가 없다. 지금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
현재의 해룡왕, 마레아도스가 집권한 이후 어떠한 해룡족도 그의 명을 거스르지 않았다. 그는 그만큼 카리스마적이고, 또한 강한 용왕이었기 때문이다.
해룡족이 남의 활동 영역을 침범해 다른 용족을 해하는 것은. 마레아도스에게 반역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마레의 명에 반발했다고? 죽고 싶지 않고서야?”
-그렇기에 저도 이상하단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 건은 용왕께서 직접 오셔서 아르피카라를 심문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캘러무스는 소리쳤다.
“오냐, 내가 직접 간다!”
옥좌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그의 몸이 급격하게 부풀었다. 이윽고 눈부시게 빛나는 흰색의 용이 날개를 펄럭이며 천룡신전 밖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추천, 선작,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당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