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 변경(3)
루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한발 늦었다. 검은 용서 없이 휘둘러졌고, 한쪽 팔이 어깨죽지부터 잘려나간 도둑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토해냈다.
“으아악, 내 팔! 내 팔!”
검을 회수한 로우가가 루나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물건을 회수했습니다.”
“그, 그건 그렇다 치고, 저 사람! 왜 그랬어요?”
로우가는 잠시 눈을 몇 번 깜빡이다, 손뼉을 가볍게 탁 쳤다.
“아아, 그렇군요. 반대쪽 팔은 왜 남겨놨냐는 말씀이시죠?”
루나는 기겁했다.
이번에는 늦지 않았다. 양손으로 매달려 검의 출수를 필사적으로 막은 루나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아니, 그게 아니라! 왜 팔을 자른 건가요! 치안대에 넘긴다던지, 다른 방법도 있을 것 아니에요!”
로우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아가씨, 소매치기는 통상적으로 손목을 자릅니다. 특히나 아가씨 같은 분을 건드렸는데, 팔 하나면 충분히 마음을 곱게 먹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니, 그게 무슨······.”
“템페스트 가 근처의 치안은 철저해서 저런 놈들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만, 원래 우리나라에서도 소매치기는 관리에게 넘기기 전에 처분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말라는 본보기로 남기기 위해서죠.”
“······.”
“설마, 한 번도 보거나 듣지 못하셨습니까?”
루나는 입술을 곱게 깨물었다. 당황한 로우가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깊게 숙였다.
“죄송합니다. 설마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아가씨 앞에서 피를 보이다니,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일어나요.”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었다. 소매치기는 이미 도망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루나는 한숨을 내쉬며 원래 적선하려던 꼬마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으나, 그곳도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도망쳤나.’
눈앞에서 사람의 팔이 날아가는데 제정신일 리가 없었다. 소년이 자리를 피한 것은, 제 딴에는 현명한 선택이었으리라.
우울한 표정으로 루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이후,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의 입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우락부락한 거구의 사내가 바닥을 거세게 걷어찼다.
“뭐요?”
걷어찬 바닥이 두부처럼 움푹 패였다.
시뻘겋게 달아오는 얼굴, 팽팽하게 융기한 근육에 불뚝불뚝 일어나는 핏줄. 눈앞의 인물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는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로판 상회의 세르노사 지부장은 미칠 지경이었다.
‘아니, 대체 나보고 뭘 어쩌라고.’
아스란 왕국은 대륙의 끄트머리에 박혀 있다. 두 면이 바다이기에 해양 산업이 상당히 발달해 있으며, 각종 특산물이 활발하게 거래된다.
무역으로 이익을 볼 법한 형태의 나라이나, 지리적 특성상 다른 국가와 일일이 거래하는 게 쉬울 리 없다.
게다가 아스란 왕국의 바로 위에는 깊고 넓은 마경(魔境)이 펼쳐져 있다. 그곳을 가로질러 무역을 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여러 상업 길드들은 아스란 왕국의 주요 특산물들의 구입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아스란 왕국의 향신료를 저 북방까지 옮기는 데에 성공만 한다면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로판 상회는 다른 길드들처럼 아스란 왕국에 지부를 세웠다.
지부장을 맡고 있는 필립은 몇 달 전 소식을 받았다.
“최최최우수 고객깨서 방문하실 테니 대접에 모자람이 없게 하고, 노예 경매의 정보를 최대한 알아보라고?”
안도혁에 관한 정보를 일개 지부장이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길드 마스터가 신신당부를 몇 번이고 반복하는 편지의 내용을 보니, 적당히 상대했다간 경을 칠 일미 분명했다.
필립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경매 위치, 일시, 상품으로 나올 가능성이 확실한 노예들의 목록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누가 봐도 그가 열과 성을 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최최최우수 고객께서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얼마 후 도착한 고객들. 필립은 그들에게 목록을 펼치며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번 경매에는 요정이 나오지 않는다고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확실한 것은 아니라지만······.”
그리고 상황은 지금에 이른다.
필립은 상대의 거대한 몸을 보고 움츠러들 만큼 움츠러든 상태였다. 저 흉악하기 짝이 없는 팔뚝은, 상계에서 평생을 먹고 살아온 그에게도 자연스레 겸손함을 받아낼 수 있었다.
당연하다. 잘못하면 죽으니까.
반석을 단단하게 잡은 건물의 바닥이 박살이 났다. 보통 사람이 걷어찼다면 흠집 하나 나지 않았을 것이다.
‘말을 잘 골라야 돼.’
하지만 없는 걸 어떡하겠는가? 필립이 아무리 능력이 좋다 한들, 없는 상품을 만들어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달달 떨리는 입술의 통제권을 가까스로 되찾은 필립은 마른 혓바닥을 애써 굴렸다.
“아니, 지금까지는 그렇다는 것이고, 앞으로는 혹시······.”
“그러니까, 없다는 겁니까?”
긍정적인 대답을 듣지 못한다면 지금 당장 너를 물리적으로 쥐어 짜버리겠다는 눈빛을 빛내는 안도혁이었다. 그 뒤에선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서석진이 바닥에 머리부터 쳐박혀 있었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에 애써 힘을 실으며, 지부장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드, 들어올 겁니다! 무조건 들어올 겁니다!”
“······무슨 근거로?”
“이, 이 표를 보십시오!”
필립은 꽤 큰 부피의 양피지 하나를 내밀었다.
가만히 보니, 그것은 세르노사에서 지금까지 열린 경매의 물품 목록이었다. 3년 전부터 시작해서 30년 전까지 목록은 주르르 나열되어 있었다.
필립은 양피지에 여기저기 손가락을 짚어가며 설명했다.
“통계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종류에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어느 시대에도 요정이 상품으로 출품되지 않은 적은 없었습니다. 아마 경매가 열리기 직전, 웃돈을 받고 팔기 위해 최대한 늦장을 부려 요정을 경매에 넘기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안도혁은 지부장을 흘겨보았다. 그것은 설에 불과하지, 확신일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뾰족한 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믿어도 되겠습니까.”
“그, 그럼요!”
아무래도 확신보다는 지금 당장 살 궁리를 모색하는 모습에 가까웠지만, 여기서 죄 없는 사람을 들들 볶아봤자 되는 일은 없다.
“부디 문제가 없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부디.”
무심코 손에 잡은 탁자의 귀퉁이가 쿠키처럼 뜯어졌다. 이어, 안도혁의 손에서 가루로 변한 나뭇조각이 우수수 떨어졌다.
“······.”
입을 쩍 벌린 필립을 뒤로 한 안도혁은 입에 씹는담배를 털어 넣었다.
담배가 좀 들어가니, 간신히 머리에 이성이 돌아왔다. 안도혁은 바닥과 막 동화하려는 서석진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얌마, 일어나.”
“앞으로 평생 고자. 앞으로 평생 고자. 앞으로 평생······.”
“아, 일어나라고.”
당장이라도 자살할 것 같은 표정으로 서석진은 문어처럼 흐느적댔다. 정신적 충격이 컸는지, 서석진은 어버버버를 반복할 뿐이었다.
안도혁은 심각한 표정으로 근처에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대충 몸을 던졌다.
‘정말 안 좋은데.’
여기까지 오는 데는 그다지 큰 문제가 없었다.
신분증이 없는 둘이기에, 최대한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 후드를 뒤집어쓰고 다녔다. 어찌 보면 더 눈에 띌지도 모르나, 사람들은 의외로 남의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후드 쓴 사람 몇 보는 것 정도는 그다지 신기한 일도 아니었으니.
세르노사에 잠입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성벽이라도 별 의미는 없다. 여럿이서 온다면 모를까, 단둘이서 야음을 틈타 성벽을 기어오르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길드를 찾는 데엔 조금 애를 먹었지만, 그것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난관이 발생할 줄이야.
‘기다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 건가?’
뾰족한 수가 없을까. 게다가 결과를 기대하며 기다리기만 하는 건 안도혁의 취향이 결코 아니었다.
그 때, 안도혁의 뇌리를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야, 일어나 봐. 좋은 생각이 났다.
”평생 고자······.“
”······.“
바보가 되어 버린 서석진을 사람으로 되돌리는 데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에취! 에취!“
통짜 쇠로 만든 창살 우리에 갇힌 에스턴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넝마 같은 집단 위에 적당히 던져진 몸이었다. 세상은 봄이라지만, 밤의 차가운 돌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는 만만하게 볼 게 아니다.
게다가 온몸이 쇠로 결박되어 있다. 철의 한기는 그의 몸에서 체온을 쉴 새 없이 깎아내고 있었다.
긴 귀가 아래로 축 늘어진다. 에스턴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됐지?’
숲에서 사는 게 어려운 건 아니었다. 요정으로 태어난 그에게 숲은 침대처럼 포근한 곳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평생을 살아왔는데, 불편한 게 있을 리 없다.
‘그래도 나와야만 했지. 진짜 어쩔 수가 없었어.’
살아가는 것만이라면 숲에서 그대로 평생을 있어도 별 상관이 없다.
그래. 숨만 쉬고 살 것이라면.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지성을 가진 생물로서 그렇게는 살 수 없다.
‘인간들의 세상이 이렇게나 악독할 줄은 몰랐지.’
숲에서 나와, 인간의 도시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서 식사한 후부터 그의 자유는 박탈당했다.
눈을 떠보니 어느새 창살 속이었고,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요정을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은 천지에 널려 있다. 에스턴은 비싼 가격에,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여자에게 팔려나갔다.
그리고 곧 팔렸다. 다음 주인을 찾기는 순식간이었지만, 또 팔리기까진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그는 개처럼 줄에 묶인 채 이리 팔리고 저리 팔리고를 반복했다.
‘이 체질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럴 때나 도움이 되다니. 기구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때, 그의 귀가 쫑긋했다. 바깥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그래요. 잘 지켜주세요.”
“염려 마시지요. 아가씨.”
노예용 천막이 들추어지고, 여자 한 명이 등불을 들고 들어왔다.
아른거리는 불빛에 눈부신 은발이 드러났다. 달빛 커튼과도 같은 그 은은한 아름다움은 어떤 남성이라도 매혹할 만큼 매력적이었으나, 지금 에스턴에겐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여긴 뭐하러 오셨나, 사려 깊은 주인님?”
시니컬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루나는 이를 으드득 가는 요정의 모습을 보더니, 등불을 바닥에 내려놓고 앉았다.
“어디, 아픈 곳은 없죠?”
“없을 리가 있나. 내 몸을 봐. 근육이 다 굳어버릴 지경이야.”
손가락과 발가락을 제외한 몸이 모두 결박되어 있다. 저래서는 기지개도 펼 수 없다.
“미안해요. 곧 이런 대우도 끝날 테니 조금만 참아 줘요.”
“흥, 그래 봤자 다시 노예 신세잖아.”
“어쩔 수 없죠. 당신은 노예로서 우리 가문에 팔려 온 걸요. 정확히 말하면 넷째가 떼를 써서 사 온 거지만······.”
허영심 많은 막냇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볼일 다 봤으면 풀어주지, 왜 또 날 팔아치우는 건데?”
“그럴 수 있을 리 없잖아요. 비싼 값으로 사 왔는데.”
“이젠 아예 물건 취급이네.”
화도 나지 않는다. 애초에 인식 자체가 다르다.
허탈한 표정의 에스턴에게 루나는 다독이듯 말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좋은 주인을 만날 수 있도록 관리자에게 말해 볼게요.”
“퍽이나 고마우셔라.”
루나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그래도 세 끼 다 먹여주고, 아무런 노동도 안 시키고, 밤에는 숯불까지 쬐어 줬는데 그런 식으로 말하기 있어요?”
“아니, 제정신이셔? 그걸 말이라고······.”
멀쩡히 살다가 납치되어서 노예 신세가 된 에스턴으로선 어처구니가 없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의 상식 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건 그의 상식일 뿐이었다. 장막이 다시 들춰지고, 호위병이 들어와 우악스러운 발길질을 해댔다.
“이 자식, 아가씨께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아가씨, 곧 팔릴 노예 놈한테 그렇게 대해 주실 것 없습니다. 은혜도 모르는 놈 같으니라고!”
“으, 은혜?”
도대체 어디서 무슨 은혜를 받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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