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과 만남(5)
“오, 확실히 한 폭의 그림 같긴 하군.”
악의 없이 비꼬는 목소리에 서석진은 온천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근처에 오밀조밀 모여있던 수십 명의 요정 여인들이 황급히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서석진의 어깨에 앉아 있던 한 명의 페어리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태양을 등진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가 그의 머리 위에 드리웠다. 서석진은 간만에 만난 자신의 친구를 떨떠름하게 쳐다보았다.
“어어, 왔어?”
“왔어는 무슨. 차도가 있으면 연락이라도 해야지.”
서석진은 난처하게 웃었다.
평생을 같은 마을에서 봐 왔던 안도혁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서석진의 표정에는 확실히 긍정적인 온기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효과가 좀 보인다며?”
“응! 아침마다 조금씩 반응도 온다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가득찬 채, 소년의 해맑음을 그대로 간직한 웃음을 환하게 띤 그의 얼굴은 예술 작품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주변 여성들에게서 신음에 가까운 탄성이 들려오는 건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럼 너는 여기서 치료에 전념하는 게 아무래도 좋겠군.”
그 말에 서석진은 잠시 당황했다.
“가, 가려고? 나만 남겨두고?”
“여기 남아서 얻을 수 있는 게 없다. 나는 나대로 새로운 방법을 찾아봐야 하지 않겠냐.”
정론이다. 막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섭섭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서석진은 친구를 잡을 수 없었다. 어떤 가시밭길을 걸을 지도 모르는데, 간섭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서석진의 어깨에 앉아 있던 페어리가 말했다.
“그럼 이제 떠나시는 건가요?”
안도혁은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매와 같은 시선에 흠칫 놀란 페어리는 벌벌 떨기 시작했고, 그때가 되어서야 안도혁은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 요정왕이셨습니까. 못 알아봐서 죄송합니다.”
사죄를 표했지만, 안도혁의 말투에 경의는 담겨 있지 않았다.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보기에 이 요정은 그저 서석진을 꾀기에 여념이 없어 보이는 바보 하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경의를 표하는 것도 웃기기도 하고.
물에 젖은 날개를 파들파들하게 떨며 실비티아는 마주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니에요.”
한 달간 실비티아는 안도혁의 얼굴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먼발치에서 살짝만 보고 떠난 적이 한 번 있었다.
그 때, 안도혁은 웃기지도 않은 식물놀이를 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우스꽝스러움과 기괴함이 섞여 있는 모습이었지만, 실비티아는 그를 보며 웃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요정의 눈을 가진 자의 저주랄까.
‘정말 이 인간, 익숙해지질 못하겠네.’
아무도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 믿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관찰안은 오직 요정왕인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안도혁이 말했다.
"이제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치료에 대한 보수를 지급하고 싶습니다만, 무엇으로 드리는 걸 원하십니까?"
실비티아는 애써 정신을 차렸다.
"음, 그건······."
사실 보수 따위 아무래도 좋은 그녀였다. 지금 그런 것을 논할 만큼 한가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경쟁자가 자꾸 여기저기서 붙어서 곤란해 죽을 처지인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예스타! 예스타아아!"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엘프 여자가 황급히 뛰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순찰대장은 인사를 건넬 틈도 없이 다급하게 실비티아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신가요? 그렇게 급하게······."
레이나는 숨을 고르지도 못하고 입을 열었다.
"크, 크, 큰일입니다. 숲 남동부 마경 쪽에서, 샐러맨더들이 출몰했습니다!"
"네?"
실비티아의 안색이 굳었다.
그 체장(體長)만 따진다면 용족에도 육박하는 초대형 몬스터인 샐러맨더.
샐러맨더는 그 포악함에 비해 인간들에게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몬스터였다. 그것은 그들이 기본적으로 초식에 가까운 잡식동물이기 때문에 인간과는 접점이 별로 많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놈이 초식동물이라는 것이다.
초식동물이 먹는 양은 비슷한 체중의 육식동물의 몇 배를 호가한다. 말이 호랑이보다 체중은 기껏해야 두 배 정도밖에 많지 않지만, 먹는 양은 4배가 훨씬 넘는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10여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체장의 생물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양의 풀을 먹어치워야 하는가?
"수, 숫자는요? 몇 마리나 되죠?"
"순찰대원의 말로는 스무 마리에 가깝다고 합니다."
실비티아의 얼굴은 비로소 새파랗게 질렸다. 스무 마리의 샐러맨더라면, 일 년만 풀어놓는다면 숲의 절반을 먹어치울 수도 있을 것이다.
샐러맨더가 그냥 덩치만 큰 몬스터였다면 처치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들은 먹이 근처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몰살할 만큼 거친 성정을 가졌다. 자신이 최상위 포식자에 가깝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방치해 둘 수는 없습니다! 당장 전력을 집결해야 합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실비티아는 이 사태에 전력을 얼마나 투입해야 할 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과하게 투입하면 다른 위험 지역의 경계를 할 인원이 줄어든다. 그렇다고 모자라게 투입한다면 샐러맨더에게 요정들의 희생만 요구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어찌해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을 무렵, 안도혁이 입을 열었다.
"보수는 그걸로 지불하면 될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이시죠?"
"몬스터가 쳐들어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치료비는 그것들을 몰살하는 것으로 지불하도록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순간 실비티아와 레이나는 물론, 멀리서 무슨 소동인지 듣고 있던 다른 요정들의 얼굴도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샐러맨더를?
그것도 혼자서?
헛소리 말라고 욕을 먹지 않은 것은 그저 그 말 자체가 너무 어이없기 때문이었다. 누가 저런 소리를 멀쩡하게 들어줄 수 있을까.
서석진만이 눈을 빛냈다.
"도혁아, 나도 갈까?"
그 말에 안도혁은 그의 하반신을 쳐다보았다.
"너, 다리는 다 나았냐?"
서석진의 허벅지에는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가 드러났다. 이런 상처로 목욕을 하는 건 솔직히 제정신인 인간이 취할 방법이 아니지만, 요정의 숲에서 흐르는 생명의 기운은 그가 그런 만용을 부려도 될 정도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직 상처는 완전히 낫지 않았다. 체중을 실으면 아직은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무리하지 말고 쉬어 둬라. 몸도 둔해졌을 텐데."
안도혁은 레이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느 쪽입니까?"
뭐라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레이나였다. 그녀의 귀에 서석진의 음성이 이어졌다.
"한 번 믿어보세요. 놀라운 일을 경험할 수 있을 테니까."
그 말에 레이나는 실비티아를 바라보았고, 요정왕은 망설이던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죠. 우선 가도록 하세요. 금방 모든 숲에 지원군 연락을 넣어 놓을테니,"
확실히 뜸을 들일 사안은 아니다. 빠르면 빠르게 처리할수록 좋은 일이다. 며칠만 방치하더라도 숲의 면적이 지도에서 보일 정도로 줄어들 것이다.
망설이던 레이나는 결심을 한 듯 눈을 빛냈다.
"시간이 없으니 숲의 길을 이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어 그녀는 기묘한 손동작을 몇 번 취하더니, 온천지대에서 벗어난 숲 쪽으로 달려갔다.
안도혁이 따라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라, 스타라 비안테······."
주문의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우지지직
어딘가 익숙한, 수천 그루의 나뭇가지가 동시에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 높이 레일이 펼쳐졌고, 안도혁과 레이나의 앞에는 그 레일에 비교하면 너무나도 작디작은 수레 하나만이 생겨나 있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안도혁은 안색이 굳었다.
'아, 이건······.'
나쁘지 않은 스릴감을 선사해 줬던 물건이다. 놀이기구로 사용된다고도 했다.
그런데 그건 어느 적당한 높이에서의 이야기지, 지금 바라보니 이 레일의 높이는 저번에 탔던 것의 배를 훌쩍 넘었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도 저 높이의 절반에도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먼저 타긴 무서운지, 레이나는 주저하며 안도혁에게 자리를 권했다.
"타, 타시죠. 마침 두 자리군요."
"······어차피 당신도 탈 것 아닙니까?"
그 때였다. 안도혁의 등짝을 누군가 거세게 후려쳤다.
짜악
"당신 미쳤어요?!"
저릿저릿한 등판에 인상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니, 루나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샐러맨더에요! 샐러맨더가 뭔지 모르는 건가요? 두세 마리라도 제국에서 로얄 가드급 기사만 추려서 기사단을 꾸려 상대할 정도의 괴물이라고요! 그런 것들을 혼자 대적하겠다니, 그게 무슨 미친 짓이에요?"
"······."
걱정 반, 분노 약간의 격한 감정을 담아 루나는 악을 써댔다. 안도혁은 그렇다고 사람을 때리냐고 말하려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그녀의 눈을 보고 말을 바꾸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이건 다른 사람을 위험하게 하는 행동도 아니니."
"그건······!"
얼마 전 항구마을에서 자신이 내뱉은 말 때문일까. 루나는 당시의 일을 상기했다.
안도혁은 입을 다문 그녀를 부드럽게 내려다보았다. 누군가가 이렇게 걱정해주는 것이 얼마만인가.
항상 기대만을 받고 살아왔다. 등을 밀어주는 손은 없었고, 무거운 짐만이 짓누르고 있었다. 마을을 먹여살리는 중압감은 그에게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약간이지만, 안도혁은 알 수 없는 힘이 솟는 게 느껴졌다.
"평생까진 아니지만, 몬스터 상대에는 꽤 자신이 있습니다. 믿어 봐도 좋을 겁니다."
"······무사히 못 돌아오면 어쩔 거에요."
글쎄, 어떡해야 하나.
답을 고민하던 안도혁은 그저 작은 미소를 지어보인 뒤 수레에 탑승했다. 레이나가 망설임이 가득한 동작으로, 그러나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쿠르르르
레일을 타고 수레가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조금씩 더 높이, 더 높이.
한참 동안이나 고공으로 상승하던 수레를 바라보던 루나는 빽 하고 외쳤다.
"야, 이 빡빡아! 무사하지 않으면, 머리가 나더라도 다 뽑아버릴 테니 그런 줄 알아!"
수레가 휘청하는 느낌이 들었다. 느낌일 뿐이겠지만.
루나는 전장으로 떠나는 안도혁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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