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갑지 않은 만남(6)
황자 일행과 안도혁 일행 사이에는 아무래도 어색한 기류가 흐를 수밖에 없었다. 아까 전까지 총칼로 대치하던 인물들이 갑자기 친해지길 바라는 건 이야깃 속 전설 같은 소리다. 사람은 그렇게까지 대범하진 못하다.
"하루만 참으면 된다지만······."
가시방석이 따로 없다. 모닥불을 들쑤시며 루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황자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레틴의 야영은 호화롭기 짝이 없었다.
숙영이 정해지지마자 병사들은 발빠르게 움직여 거대한 천막을 세우기 시작했다. 한밤의 냉기를 막기 위해 바닥에는 단열재를 깔고, 텐트 안에는 간이 침대에다 숯불을 쬘 수 있는 난로까지 들여놓았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레틴 한 사람을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일반 병사들은 그저 침낭 정도로만 스스로의 잠자리를 구축할 수밖에 없었다.
천막을 치는 것을 지켜보던 안도혁은 흘긋 일행을 돌아보았다. 몸을 녹일 수단을 모닥불밖에 가지고 있찌 않은 두 남녀는 부럽다는 표정으로 천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조금 무신경했나?'
자신이야 한겨울에 맨바닥을 맨몸으로 굴러다녀도 감기조차 걸리지 않지만, 그게 일반인의 기준은 아닐 것이다. 특히 다한증 체질인 에스턴은 남들보다 추위를 더 타는 몸이었다.
동굴이라도 있으면 추위를 조금이라도 피해 보겠지만, 아쉽게도 거기까지 바라는 건 힘들다. 노숙할만한 동굴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발견되는 게 아니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안도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 준비는 맡기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갑자기 황야의 저편으로 달려갔다. 리더가 갑자기 사라지자 루나와 에스턴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왜 저려죠?"
"사냥하러 가시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에스턴은 엘프다. 귀가 뾰족하고 길며, 그 큰 귓바퀴는 장식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다른 종족보다 우월한 청력을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들을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그의 귀에만 들릴 정도의 작은 소리였지만,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우레 같은 폭음이었다. 폭탄이 터지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번개가 치는 소리에 가까웠다. 강철 대못을 번개의 망치로 내려치는 소리가 이러할까?
소리는 안도혁이 사라진 방향에서 들려오고 있었고, 때문에 에스턴은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무얼 하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리는 잦아들었다. 방금 전까지의 폭음은 뭐였냐는 듯 잠잠할 뿐이었다.
'무슨 일이지, 대체······.'
몇 달간 같이 여행하면서 느낀 점이라면, 저 괴물 같은 인간을 걱정하느니 내일 아침밥 메뉴를 고민하는 게 더 생산적이라는 점이었다. 어떤 상황에서 무슨 일이 닥쳐도 스스로의 주먹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그 모습은 기차 막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헉."
에스턴은 하마터면 굽고 있던 고기를 태울 뻔했다.
쿠우웅
어마어마한 크기의 거석이 땅에 쳐박혔다.
바위의 무게는 몇 톤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수십 명의 인원이 달라붙어 기중기를 사용해야 들어올릴 수 있는 물건이었다는 것이다.
안도혁은 바위를 땅에 내려놓고, 황야 쪽으로 다시 달려갔다.
잠시 후 그는 또다른 바위를 가져와 쌓았다. 아까 전과 무게든 중량이든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는 사이즈의 바위였다.
그렇게 그는 수십 번을 왕복했다. 바위를 가져오고, 바위를 쌓고······.
일련의 행동이 반복되는 것을 지켜보던 에스턴과 루나는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와, 저거······.'
'저 인간이 진짜······.'
안도혁은 '인조 동굴 조성' 작업 중이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평지에 바위를 가져와 쌓는다. 그리고 또 다른 바위를 옆에 쌓고, 그렇게 둥글게 만들어 놓은 바위들 위에 또 다른 돌을 겹친다.
이것을 반복하면 거대한 이글루가 완성된다. 그것도 바위로 만든!
어딘가에서 꺾어온 나뭇가지 다발로 뚫려 있는 천장을 막은 안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그렇게까지 춥지는 않겠습니다."
'아니, 소름이 돋는데요. 당신 때문에?'
이러한 작업 모습을 본 게 당연히 안도혁 일행만은 아니었다. 황자의 잠자리를 만들며 야영 준비를 하던 레틴 쪽 인물들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똑똑히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주르륵
누군가의 뒷통수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계절이 계절이니, 더워서 흘리는 땀은 아닐 것이다.
"아까 진짜 죽을 뻔한 거 아니야?"
"그렇지······."
주어는 없었다.
코끼리 열 마리를 데려와도 저런 작업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애초에 생물에게 가능하긴 할까.
상식이라는 게 무참히 파괴된 레틴 일행은 얼어붙었지만, 자신이 한 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자리에 앉은 안도혁은 멧돼지 뒷다리 통구이를 입 안 가득 씹을 뿐이었다.
레틴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황자로 살면서 여러 인간 군상을 다 보고 자랐다.
타란토스 제국은 옆에 있는 기사의 나라를 제외하면 전 대륙에서 초인의 숫자가 가장 많다. 나라도 크고, 전장과 바로 맞닿아 있는 국가이니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도 그만큼 많을 수밖에.
레틴은 어릴 때부터 초인이라는 사람들을 상당히 많이 보고 자랐다. 황궁 기사들 중에서도 초인이 심심찮게 보인다.
인간의 한계를 넘은 자들을 초인이라 칭하기는 하지만, 초인이라는 것은 편차가 상당히 크다. 그냥 일반인보다 좀 더 운동신경이 좋은 정도에 그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야말로 성벽을 뛰어넘고 바위를 부수는 개체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런 괴물을 본 적은 없었다.
인간처럼 생기고,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한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이라는 생물을 정의하지는 않는다. 레틴은 자신이 지금 무엇과 동행하기로 한 것인지 혼란스러워졌다.
'형언할 수 없는······.'
공포의 숨결이 뒷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으슬으슬 몸이 떨리는 것 같았다.
'치, 침착하자.'
어차피 초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레틴은 아무 병사도 대동하지 않은 채 안도혁 일행의 식사 자리에 다가왔다.
"식사는 입에 맞으시오?"
일단 같이 행동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레틴 쪽에서 안도혁 일행에게 요리를 몇 가지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그래봤자 야영하면서 먹는 음식이 대단한 품질일 리는 없지만.
음식의 맛을 그리 따지지 않는 안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튜 맛이 좋습니다. 술이라도 한 잔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레틴은 웃으며 술병 하나를 들어 찰랑였다. 이런 자리에 술이 있어서 나쁠 게 없다.
"한 잔 어떠시오, 여러분?"
루나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영광입니다!"
일국의 황자와 술자리를 가질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비록 야영지에서긴 하지만.
그들은 술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대화의 주제는 평범했다. 그저 이곳에는 사냥감이 얼마나 된다느니, 돼지고기에서 어느 부위를 좋아한다느니 등.
황자는 마치 자신이 평민이라도 된 것처럼 격의 없이 일행을 대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그가 이런 자리에서 그런 걸 따질 만큼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도혁은 웃으며 술을 마시는 레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쁘지 않은 사람이군.'
저것이 가면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만약 가면을 쓰지 않았다 해도 무례한 사람보다는 저런 종류가 훨씬 낫다. 악인이 한평생 착한 척을 하고 살아간다면, 과연 그 사람을 악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안도혁이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십니까?"
신나게 떠들던 레틴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비싼 술 먹여가며 떠드는 게 단순히 친분을 쌓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레틴은 술을 한 모금 머금었다.
'지금 말해도 되는 걸까?'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떠들 일은 아니다. 하지만 어쩌면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기에 말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레틴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방금 전까지 평민처럼 떠들던 것과는 달리, 지금 그의 몸에는 확실히 황족의 기품이 자리하고 있었다.
입술이 떨려왔다. 어쩌면 이것은 악수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졌어. 이제 와서 고민할 필요는 없지.'
잠시 망설이는 듯한 기색을 보이던 황자는, 곧 안도혁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의뢰를 하나 받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느새 그의 말투는 경어체로 바뀌어 있었다.
추천, 선작,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당
- 작가의말
추천수가 늘었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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