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에서(6)
이렇게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다리 하나로 착지하긴 쉬운 일이 아니다.
서석진이 간신히 착지하자, 에스턴과 루나가 급하게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붕대가 필요해요! 일단 꿰매야 하겠는데······!”
호들갑을 떠는 두 사람을 보며 서석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살았구나.
“저 녀석은 왜 날 먼저 보내서는······.”
투덜거리려던 그의 입이 멎었다. 여유가 생기자, 장내의 상황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모든 해적들이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꺼으으으······.”
“내, 내 다리.”
해적들은 양쪽 다리가 모두 부러져 있었다. 심한 경우 뼈 자체가 살을 뚫고 튀어나온 사람도 있었다. 간혹 다리가 멀쩡한 자들이 있었는데, 그 경우엔 등뼈 내진 목뼈의 방향이 이상하게 어긋나 있었다.
즉, 이곳에 해적이라고는 앉은뱅이 내지 시체밖에 없다.
루나가 울상을 지으며 바늘을 들었다.
“조금만 참으세요. 그래도 꿰매 본 경험은 있어요······.”
사람의 살을 바늘로 뚫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당하는 사람도, 시술하는 사람도.
한참 동안이나 끙끙댄 끝에 – 솔직히 서석진은 고문당하는 기분이었다 - 서투른 실력이었지만 루나는 어떻게든 상처를 꿰맸다.
물론 전문적인 의학 지식이 없는 그녀이니, 이것은 응급처치에 불과했다. 조금만 심하게 움직이면 상처가 다시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서석진은 자신의 육체를 믿었다. 초인이란 그런 거니까.
“도혁이가 전부 이렇게 한 겁니까?”
에스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한 명도 용서하지 않으시더군요. 반항이 심한 자들은 목숨까지도 끊어 놓으셨습니다. 정말 엄청난 솜씨입니다.”
그래서 날 보냈군. 서석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였으면 이런 풍경을 만들기 전에 희생자가 몇 명 생길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서석진은 그의 친구를 잘 알았다. 필요 없는 살생은 절대 하지 않는 사람이고, 원한다면 상황을 이것보다 덜 잔인한 방법으로 해결할 능력이 얼마든지 있다.
굳이 그러지 않은 이유는 뻔했다.
‘하긴, 너라면 어쩔 수 없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저 녀석이면 용서된다.
서석진이 여유 있는 표정을 짓고 있자, 루나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괜찮을까요? 아무리 도혁 씨가 강하다지만, 서석진 씨가 이렇게 당했는데······.”
일방적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상대 두목이 지금 상처 하나 없는 건 확실하다.
에스턴이 일어나며 말했다.
“별 도움은 안 될 것 같지만, 저도 가세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주변에 있는 검을 주워 달려가려 하자, 서석진이 그의 다리를 잡아끌었다.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세요.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게 내일 해가 뜰지 걱정하는 거랑 안도혁 걱정이에요.”
멀지 않은 옛날, 초인이라는 위명을 맨 처음 들었을 때가 있었다.
그 뜻을 듣고 서석진은 웃었다.
‘초인이라고?’
인간에게 허용된 능력을 초월한 자를 초인이라고 부른다 했다.
하지만 그 초인이라는 것으로 뭉뚱그려서 초월자들을 설명할 수 있는가? 서석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차원이 다르다고.’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보지 못하면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저벅 저벅
안도혁은 아르키피라와 대치했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한두 개는 더 큰 안도혁이다. 누구든 그의 앞에 서면 어느 정도는 위축되기 마련인데, 아르키피라는 그런 기색이 없었다.
“큰 인간이구나! 팔뚝 좀 봐라. 힘 하나엔 자신이 있겠군!”
안도혁은 연기를 뿜어냈다. 두꺼운 여송연을 문 그의 입술에 걸린 미소는 상당히 비틀려 있었다.
“뭐, 그다지.”
주위를 휘익 둘러보던 아르피카라는 휘파람을 불었다.
“대단하군. 졸개들이라곤 하지만, 저렇게까지 내 부하들을 박살내다니. 분명 너도 초인이라는 놈 중 하나겠구나.”
“그렇다고들 하더군.”
대수로운 척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안도혁에겐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아르키피라는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래, 힘센 인간과 인사나 한 번 해볼까?”
오만함과 즐거움이 함께 깃들어 있는 눈이다. 안도혁은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인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거센 악수가 시작됐다.
무시무시한 힘의 충돌이었다.
우득 우득
뼈가 짓눌리는 소리가 들린다. 마치 공기가 터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안도혁은 악수를 하지 않는 손으로 담뱃재를 툭툭 털어내고, 담배를 입에 다시 물며 한 모금을 더 빨았다.
푸우우
여유 있게 연기를 뱉는 그의 얼굴에선 땀 한 방울조차 흐르지 않았다.
아르키피라는 얼굴이 시뻘개져 있었다. 입가에 흐르던 미소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뭐, 뭐, 뭐, 뭐야?!’
요지부동이다. 손에 아무리 힘을 줘도 상대의 손이 꿈쩍을 않고, 힘을 빼 보아도 전혀 빠지지 않는다.
낑낑대는 그를 보던 안도혁은 연기를 다시 뿜어냈다.
“그래, 힘에 자신이 좀 있나 보군.”
조금씩 죄는 힘이 강해졌다. 아르피카라는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며 손아귀를 벗어나려 했지만, 안도혁은 전혀 꿈쩍하지 않았다.
“놔, 놔!”
안도혁은 담배를 퉤 내뱉으며 싸늘하게 뇌까렸다.
“해적 새끼 주제에. 잘난 게 하나라도 있다 이거냐?”
빠드드득
“크아아악!”
믿을 수 없는 힘이었다.
어마어마한 압력과 함께 아르피카라의 손뼈가 전부 으스러졌다. 뼈와 신경과 혈관이 뒤섞여 손가죽을 뚫고 터져 나온 모습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눈이 돌아갈 듯한 고통과 함께, 그에 상응하는 분노가 함께 차올랐다.
손가죽을 뚫고 튀어나온 뼈를 감싸며 아르키피라가 소리쳤다.
“너, 이 새끼. 정체가 뭐냐?”
“······정체?”
“말해라! 바다 새끼냐, 땅 새끼냐? 이게 무슨 짓이야?”
알 수 없는 소리다. 안도혁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아르키피라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협정을 맺지 않았었나! 왕을 통해 활동 범위에 대해 계약서까지 제출했어! 심지어 10년 전에 말이야. 이걸 무시하는 건 중대한 협정 위반이라고!”
“아니, 거 참.”
해적을 잡은 것 뿐인데 해적 쪽에서 억울해하고 있다. 게다가 억울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같기까지 하다.
문제는 안도혁이 그가 대체 왜 억울해하는지 짐작 가는 게 전혀 없었단 점이다.
“무슨 소린지.”
정말 모르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아르피카라는 그의 말을 도저히 믿지 않았다.
“이 자식, 끝까지. 끝까지!!”
아르피카라는 쾅쾅 발을 굴렀다. 어찌나 분했는지 그의 눈에선 눈물까지 흐르고 있었다. 이쯤 되면 안도혁 쪽이 미안할 지경이다.
“······잘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는 나를 건드린 것은 네놈이다.”
“그렇다면 미리 밝혔어야지! 활동 범위에 있는 나에게 피해가 없도록 했어야지!”
“······무슨 수로?”
“수정구라던가! 모스 부호라던가! 아니면 텔레파시도 있잖아. 잠깐, 너······.”
아르피카라의 눈이 분노로 깊게 물들었다. 부글부글 끓는 눈동자에선 열기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 나를 이렇게 농락한다 이거지?”
“예?”
“알겠다. 바다 놈이구나. 바다 위니까 네가 유리하다 이거지?”
“사람 말을 좀 들어.”
“닥쳐라! 어디까지 나를 가지고 놀 셈이냐!”
안도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상대는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 듣고 싶은 말만 듣는 건지도 모른다.
이러다간 끝이 없겠다고 생각하던 중 안도혁은 깜짝 놀랐다. 상대방의 모습이 기괴하게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솟아오르는 뿔, 찢어지는 입, 둥글게 커지는 눈. 그리고 몸 전체가 부풀어 오른다.
우직 우지직
분노에 찬 목소리가, 조금씩 왜곡되듯 기괴해지고 있었다. 적어도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의 성대에서 날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무시무시한 음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내게 모욕을 준 것을 후회하게 해 주마. 나는 하늘 종족의 아르피카라다!”
조금씩 이동하던 안도혁의 시선이 수직으로 치솟았다. 상대방의 크기가 터무니없이 커졌다.
이윽고, 아까까지 인간의 모습을 하던 자는 간 데 없고, 거대한 한 마리의 용만이 갑판 위에 서 있었다.
길게 뻗은 목, 튼튼한 앞발과 이족보행을 견딜 만큼 강인한 뒷발, 등 뒤로 뻗은, 대형 범선의 돛보다도 거대한 날개.
이야기로만 듣던 용 그 자체였다.
분노에 찬 푸른 용이 울부짖었다.
-크아아아아아!
바다에 파문이 일 정도로 큰 소음이었다. 마치 소리 그 자체가 에너지라도 된 것처럼 격렬한 파장을 뿜어냈고, 승객 중 몇몇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도 했다.
생애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안도혁은 탄성을 질렀다.
“용족이라는 게 이런 놈들이었군!”
아르피카라의 아가리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포효하듯 내뿜는 그 목소리는 음성이라기보단 차라리 우레에 가까웠다.
-네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기회를 줄 때 변하는 게 좋을 거다.
“너 진짜 아까부터 무슨 소리냐?”
-그래도 끝까지······!
다음 순간, 용의 꼬리가 안도혁이 있던 자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콰자자작
꼬리는 갑판을 모조리 부수고 난간까지 걸레짝으로 만들어버렸다. 안도혁은 멀리 있는 서석진에게 힐끔 눈짓했다.
서석진은 이럴 때조차 눈치가 없는 남자는 아니었다. 그는 루나와 에스턴에게 말했다.
“사람들을 데리고 다른 배로 피해요. 도혁이가 싸우는 데에 방해가 될 거에요.”
루나와 에스턴은, 특히 에스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용족과 싸우다니?
“도, 도, 도망쳐야 하, 합니다. 하지만 바, 바다 위에서 어떻게······.”
“입 닫고 얼른 움직여요. 시간이 없단 말이에요.”
루나는 정신을 차리고 얼른 뛰어갔지만, 에스턴은 못박힌 듯 움직일 줄을 몰랐다. 보다 못한 서석진이 검집으로 엉덩이를 후려갈기고서야 펄쩍 뛰며 사람들을 향해 달려갔다.
서석진은 용과 대치하는 안도혁을 흘긋 바라보았다.
말은 태연하게 했지만······.
‘괜찮겠냐. 도혁아?’
걱정이 되는 건 서석진도 다르지 않았다. 하물며 난생 처음 겪는 상황에서야.
그러나 곧 그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딴 녀석도 아니고 도혁인데. 괜찮겠지!’
근거 없는 자신감이긴 했지만, 확신에 가까운 믿음이다.
여태껏 항상 그래 왔으니까.
용은 거칠게 날뛰었다. 배 하나가 걸레짝으로 변하는 데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꼬리 길이만 쳐도 인간의 사이즈는 이미 한참 넘는 수준이니까.
-죽여 주마!
한참 동안 피하던 안도혁은 이 배에 다른 사람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해적이야 몇 있지만, 그건 뭐.’
이제 반격의 시간이다. 안도혁은 주먹을 쾅 하고 부딪쳤다.
“용이고 뭐고, 해적 새끼 주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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