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갑지 않은 만남(5)
사람이란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 맞춰 자라나기 마련이다. 몸도 마음도.
안도혁은 자기 머리 위에 사람을 얹어 놓은 경험이 없었다.
당연하다. 고작해야 작은 마을 안에서 평생을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바깥 세상엔 왕이니 황제니 하는 것들이 있다고 해봤자 감흥이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제국의 황자 앞에서 감히 담배를 꺼내 무는 행동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루나는 여송연을 입으로 가져가 성냥을 켜는 안도혁의 모습을 보고 까무러칠 뻔했다.
"당신 미쳤어요?!"
"······뭡니까?"
루나는 허둥지둥 담배를 뺏은 후 사방을 둘러보았다.
고요했다.
쥐죽은 듯한 침묵이 사위를 휩쓸었다. 적도, 아군도 모두 같은 심정이었다.
'저 인간 대체 뭐지?'
레틴은 난생 처음 겪는 경험에 헛웃음조차 짓지 못했다. 아마 다시 태어나더라도 이런 사람을 다시 만나긴 어려울 것이다.
안도혁은 루나의 손에서 담배를 다시 가져오려 했으나, 온몸으로 막는 그녀의 모습에 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아, 혹시 지금 피우는 건 무례입니까?"
이런 자리는 아니지만, 하프렌 공화국에서 뭔가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식사 자리였던가.
루나는 할 말을 잃었다.
뭔가 특이한 인간이란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식 부족이라니. 어디부터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그보다 이 자리는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다행히도 황자가 그녀의 고민을 해소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아아, 그럴 수 있소. 저 서방의 어느 민족은 담배를 먼저 권하는 게 예의라는 소리도 들었으니까. 괘념치 마시오."
상석에 있는 인물이 그렇게 말하니 다들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예의라는 것은 그 자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납득하면 되는 것이니까.
타란토스 제국의 역사는 짧다. 때문에 황족의 격식 따위도 다른 나라 귀족에 비해 확실히 느슨한 편이며, 이는 레틴이 융통성을 가지는 데 도움을 주었다.
다만 이 자리에서 그가 참은 것은 마음이 넓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단은 살고 봐야지.'
저 무식한 인간의 심기를 거스르다가 갑자기 미쳐 날뛰면 수습은 누가 할까? 수습이 된다 해도 그때 이미 자신의 목은 날아가 있을텐데. 황족이라 해도 목숨은 하나인 법이다.
상대방이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는데 계속 고개를 빳빳히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레스······님이라 하셨습니까?"
"아레스틴 그라티아······아니, 그냥 레틴이라 불러 주시오."
황족을 줄임말로 부를 수 있는 건 그 사람의 부모, 형제 정도가 한계다. 정말 예외의 경우를 생각한다면 아주 친한 친구와 단둘이 있을 경우에 한한다.
사람들은 다시 한 번 경악했지만, 뭐가 뭔지 모르는 안도혁은 무심하게 넘겼다.
"레틴 님. 부하들을 상하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그걸로 사죄의 말은 끝이었다. 이젠 어버버하는 경지가 넘어선 루나가 슬슬 경기를 일으킬 무렵, 레틴은 웃었다.
"괜찮소. 저들이 먼저 당신에게 총을 쐈지 않소이까. 쌍방이 잘못했으니, 이것으로 더 이상 얼굴 붉히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소."
병사들 쪽에서 병기를 갈무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험악한 분위기가 조금씩 풀려갔다.
루나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저희 쪽 무례를 용서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레틴은 오늘 처음 황자로 대접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행 분들을 소개해주실 수 있으시오?"
"이쪽 요정은 에스턴. 이 사람은 루나리스······잠깐, 당신 성이 뭐라고 했었죠?"
이쯤 되면 성격 좋은 루나도 성질이 날 수밖에 없었다.
"템페스트다. 템페스트! 아니, 아직도 기억을 못하면 어떡해요!"
"아니, 솔직히 당신들 이름 너무 길다고."
"당신 마을이 이상한 거야!"
레틴은 그제서야 눈앞의 남자가 가진 기묘한 위화감을 알아챘다.
'두건 때문에 몰랐는데, 잘 보니 상당히 특이하게 생긴 사람이군. 얼굴의 형태 자체가 상당히 이질적이야. 어느 외진 소규모 부락에서 명맥을 이어 온 핏줄 출신인 모양이군. 이름 역시······.'
솔직히 어디부터 성이고 이름인지 전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레틴은 루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템페스트라면 분명 하프렌 공화국의 현 집정관을 맡고 계신 그랜트 템페스트님의 가문과 관련이 있을 것 같소만."
황자는 황자였다. 기본 교육을 충실하게 받은 것이다.
나라를 떠난 후 처음으로 귀족 대접을 받는 기분이 든 루나였다.
"템페스트 가 장녀인 루나리스라고 합니다. 여행 중에 타란토스의 황자님을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틴은 처연하게 웃었다.
"황자······황자라."
급격하게 표정이 어두워지는 레틴. 뜬금없는 모습에 루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으나, 곧 머릿속에서 정보가 짜맞추어지기 시작했다.
'4황자라면 분명 나이가······아, 어림짐작하니 대강 그 시기가 다가온 것이구나.'
전 대륙에서 야만적이라고 비웃는 타란토스 황족의 계승 의식. 하지만 상대가 대륙 최강국이기에 아무도 대놓고 매도할 수 없는 그 솎아내기.
"그러고 보니 여러분은 어디에서 오는 길이시오? 이런 험한 외곽 지대에서 여행 중이시라니."
"요정의 숲에서 왔는데, 타란토스 제국 동부에 있는 한 상회를 찾아가는 중입니다. 맡겨야 할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요정의 숲······?"
생각해보니 저 일행에는 요정이 끼어 있다.
대륙 북부는 남부와 달리 요정이 꽤 보이는 편이지만, 그래도 요정은 요정이다. 옆집 이웃 보듯 흔하게 보이는 편은 아닌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보이는 요정은 보통 엘프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과 여행의 동료가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요정 특유의 적당적당한 기질이 있다고 해도, 동족이 인간에게 노예로 여기저기 팔리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곳인 줄로만 알았는데, 여기에 환상적인 모험을 하고 오신 여행자들이 계셨군요. 참으로 놀라운 일이오. 헌데, 검문소를 들리지 않고 왜 이런 황야를 여행하고 계시오?"
안도혁은 자초지종을 설명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사실 말해서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설명을 마치자, 레틴이 한탄했다.
"여러분들께 아무래도 사죄를 드려야 할 것 같구려. 이런 변방까지는 정보가 최신화되는 경우가 상당히 어렵소. 정보 누락도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들었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며칠만 더 가면 통과할 수 있을 테니까."
레틴이 눈을 반짝였다.
"그럼 동행하는 것은 어떻겠소이까? 좀 더 국내로 빨리 진입할 수 있을 텐데."
"동행이라고 하셨습니까?"
안도혁이 목적지로 삼은 검문소로 가는 데에는 열흘이 걸린다. 그것도 최소한도로 잡은 시간이다.
반면, 레틴 일행과 함께하면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기만 하면 되었다. 들어 보니 이곳에서 고작 하루 하고도 조금의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별 말씀을. 이렇게 돕고 사는 것 아니겠소?"
이유 없는 호의는 의심해야 하기 마련이나, 그것도 사람에 따라 다르다. 황족이 고작 여행자에게 베푸는 은혜에 굳이 악의가 섞일 리가 없는 것이다.
물론 레틴은 초면인 사람에게 이유 없이 호의적으로 다가간 것은 아니었다.
'약간의 선의로 초인 한 명을 호의적으로 만들 수 있다면 나쁜 장사는 아니지. 게다가 묻고 싶은 것도 있고 말이야.'
얼마간 길을 걷던 일행은 해가 어둑어둑해지기 전 야영 준비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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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뭔가 쓰기 힘든 화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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