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6)
로글란트 지역은 담배 재배로 유명하며, 기본적으로 농업에 영지 경제의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다.
담배는 그 특성상 파종부터 재배까지의 시간이 몹시 빠른 축에 숙한다. 반년에 가깝게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타 작물들과 달리, 아무리 길어도 세 달 정도면 수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담배를 심은 토양은 지력이 상당히 손상된다. 게다가 땅을 오염시키는 효과까지 있어서, 담배만 심었던 토지에는 다른 작물을 심을 수조차 없을 정도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의 휴경 기간이 필요하며, 땅의 독소를 빼내는 작업을 병행해 주어야 한다.
일행은 말을 타고 담배밭을 지났다.
끝없이 펼쳐진 담배밭에선 지금 식물이 심어져 있지 않은데도 은은하게 담배 향이 나는 기분이었다.
"이게 다 담배밭이라니. 정말 대단하네요."
루나의 말에 안도혁은 감개무량했다. 물론 루나는 칭찬의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
'이곳이 바로 성지인가.'
생명의 원천이 이곳에 있다. 여기야말로 인류가 지켜내야 할 최후의 보루이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곳이리라.
안도혁은 기본적으로 무표정한 사람이다. 하지만 몇 달간 같이 여행해보자 루나는 안도혁의 표정 변화를 나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즐거워 죽겠죠?"
"······으음."
부정은 하지 않는다. 사실 거짓말을 해도 티가 확 날 것이다.
에스턴은 숨이 막힌다는 듯 아까부터 입가를 가리고 있었다.
"이곳은 죽음의 땅입니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요정들은 식물, 동물에 매우 친숙한 성향을 보인다. 잘 자라지 않는 풀이 엘프의 노래를 듣고 쑥쑥 컸다는 이야기는 동화 속에서도 유명하다.
그 반동인지, 요정은 비자연적인 곳에서 상당히 살기 어려워한다. 물론 돌로 포장된 인간의 도시 정도로는 대단한 문제가 없지만, 이곳은 상황이 너무나도 달랐다.
에스턴에게 이곳은 사막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어떤 생물도 자라지 못할 것 같습니다. 대지의 비명이 들리십니까? 지렁이 한 마리, 두더지 한 마리도 흙에서 숨쉴 수 없을 겁니다. 이곳이 바로 마경이군요."
"······아니에요."
사실 토양만 따지면 마경 쪽이 나을지도 모른다. 거기선 최소한 담배는 안 재배하니까.
걸음을 빨리 하여 일행은 영주성에 도달했다.
영주성은 크지 않았다.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그저 이것이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듯 낮았다. 어지간한 마을의 목책보다 조금 높을 뿐이었다.
성을 지키는 병사는 많지 않았다. 훈련을 잘 받은 듯 자세에는 절도가 있었으나, 사람 자체가 얼마 없었던 것이다.
"상당히 아담한 성입니다. 여태까지 이런 성은 본 적이 없었는데."
"로글란트는 제국 담배의 대부분을 공급하는 농산지니까요. 어떠한 귀족이라도 이곳을 공격하지 못해요. 만약 이 지역을 장악하려는 세력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다른 세력들의 합공을 받게 될 걸요."
귀족들이 죄다 담배를 열심히 태워댄다는 소리다.
루나의 말마따나 로글란트는 자기방어에 대단한 힘을 쏟을 필요가 없었다. 영주가 해야 할 최우선 과제는 치안 유지와 농사 품질 유지 정도가 전부로, 이곳은 타란토스 제국이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던 로글란트 가문에서 직속으로 관리해온 곳이다.
단점이라면 그 농업적인 특성 때문에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대단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좋던 싫던 중립적인 시야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다행히도 역대 로글란트 지방을 다스리는 사람들은 모두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좋게 말하면 목가적인 성품이고, 나쁘게 말하면 남의 집안사에 무관심한 성향이랄까.
"황자님이 말씀하시기를, 백작씩이나 되면서도 손수 농업에 참여하고 계시다고 해요."
설명을 들은 안도혁은 매우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사람이 재배하는 곳이니 맛도 좋겠지.
보통 영주라는 사람은 선약 없이 만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객이 귀족이 아니라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일반인이라도 황자의 소개장을 제시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화, 황자 전하의 손님들이라고요?"
황실의 인장이 찍힌 편지를 건네받은 경비병은 화들짝 놀라 내성에 전갈을 보냈으며, 곧 일행은 입성할 수 있었다.
겨울에는 작물의 파종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농업에 대부분의 일을 할양하는 로글란트 지방의 특성상 그다지 할 일이 없으며, 한 해 벌어 쌓아둔 돈을 까먹으며 무료한 일상을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대외활동을 해야 하는 영주의 경우엔 조금 사정이 달랐지만, 그렇다고 해도 평소보다 여유로워진 것은 사실이었다.
응접실에 앉아 차를 한 잔 대접받고 있자, 곧 주인이 나타났다.
"어서 오십시오. 본 령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중년의 남자였다. 본디 금발에 가까웠을 그의 머리는 희끗희끗한 세월의 흔적을 숨길 수 없었으며, 태양빛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얼굴은 구릿빛으로 그을려 있었다.
손에는 단단한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농부 일을 충실히 한다는 증거였다.
루나는 무릎을 살짝 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귀족식 예법이다.
"하프렌 공화국 템페스트 가의 장녀 루나리스라고 합니다."
이름을 수식할 단체에 속해 있지 않은 나머지 둘은 이름만 밝힐 뿐이었다.
"안도혁입니다."
"에스턴이라고 합니다."
백작은 잠시 의문이 들었다. 하프렌 공화국이라면 저 아래쪽에 위치한 나라인데, 그곳의 여식이 이곳까지 왜? 심지어 황자의 소개장까지 지참하고서.
여기 오기 전에 소개장을 미리 받아 보았지만, 그곳에는 그저 '4황자 아레스틴의 이름으로 신분을 보증함. 여행 중 편의를 봐 주시기 바라오'라는 말 이외에는 별 내용이 없었다.
"아도니스 로글란트라고 하오. 귀한 손님들을 맞게 되어 영광이오."
그는 말을 마치고 응접실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로글란트 령은 그리 외부인이 많이 오는 곳이 아니다. 이곳의 모든 농토가 영주의 것이니, 영주성에 담배 거래를 위해 찾아오는 상인들과 귀족 몇몇을 제외하면 왕래가 없다고 봐도 좋았다.
이곳에 손님으로 온 모든 사람들은 담배 거래를 위해 찾아온다. 아도니스는 이 생면부지의 인간들 역시 그러리라고 생각했고, 그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사실은 말입니다······."
안도혁은 그의 사정을 설명했다. 불가침 구역에서 왔으며, 남들보다 담배를 몇십 배는 더 많이 피운다는 점, 담배가 부족하다는 점 등등.
백작은 고작 담배를 위해서 그 먼길을 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역시 흡연자였지만, 눈앞의 사내가 말하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허언증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아니, 상식에서 벗어난 건 그것뿐만이 아닌가.'
이름부터, 얼굴 생김새부터가 보통의 대륙인과는 다르다. 거기다가 저 우락부락한 팔은 마치 기둥 같았다. 농사일로 단련되어 나름 체격이 탄탄하다고 생각했지만, 사내의 팔과 비교하면 이쑤시개와 별반 차이도 없었다.
다만, 그보다도······.
"초면에 이런 말을 하긴 조금 그렇지만, 실내에서 모자는 벗는 것이 어떻겠소?"
안도혁은 움찔했고, 루나는 깜빡했다는 듯 아 하고 입을 벌렸다.
"도혁. 실내에서 머리에 쓴 것은 탈의하는 게 예의에요. 미리 못 말해 줘서 미안해요."
안도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왜 이렇게 커밍아웃을 해야 할 일이 많은지.
고작 머리카락 내비치는 것이 담배보다 중요할 리는 없다. 안도혁은 순순히 두건을 풀렀다.
반질반질한 대머리에 햇살이 반사되어 아도니스의 눈을 찔렀다.
"읍."
눈썹에 머리카락 한 올까지 없는 모습은 실로 흉악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당장 나가서 산적패에 들어간다 해도 그쪽에서 절하며 형님으로 모실 기세였다.
사내가 굳이 두건을 쓰고 있었던 이유를 이해한 아도니스는 민망함에 시선을 돌렸다. 과연, 저런 사정이 있다면 약간의 무례를 범할 수도 있지.
아도니스는 안도혁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미안하오. 그런 사정이 있으면 미리 말씀을 해 주셔도 되었을 것을."
"······아닙니다."
이미 상대방의 반응으로 상처는 받았다. 그보다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사정은 잘 들었소. 물론 예비 상품이 아주 없지는 않소. 여송연으로 가공한 상태가 아닌 그저 건조 잎사귀일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말아 피우는 데에는 별반 문제가 없겠지요."
물건이 있다는 데에 안도혁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제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하지만, 불행히도 청을 들어드릴 수는 없겠소이다."
쿵
가슴속에 돌덩이가 떨어진 기분이었다. 루나는 안도혁의 얼굴이 저렇게 하얗게 질린 것을 처음 보았다.
"왜, 왜입니까. 혹시 미리 공급처가 정해져 있는 것은······?"
그런 일이라면 예비 상품이라고 표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도니스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실은 며칠 전에 도둑이 들었소."
말린 잎사귀를 보관해놓는 창고가 있다. 작은 영주성에 보관하기엔 무리라, 성 외부에 창고를 지어 놓고 병사를 투입하여 밤낮없이 지키게 하였다. 귀중한 상품에 도둑이라도 들면 큰일이니까.
하지만 며칠 전 일이 터졌다.
"조직적인 급습이었소. 경비를 교체하는 틈을 타, 수십 명의 도둑들이 습격해왔던 것이오. 놈들은 창고를 지키던 병사들을 모두 살해하고 내용물을 훔쳐 달아나 버렸소."
안도혁의 눈에 불이 붙었다.
뭐?
뭘 어쨌다고?
"병사들을 풀어 추적하고 있지만, 놈들은 전문적인 도둑인 모양이오. 심지어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았소. 추적에 난항을 겪고 있소이다."
이야기를 듣던 루나는 의문이 들었다.
'작물을 훔친다고?'
도둑이 노리는 것은 현금, 귀금속 등 부피가 적고 가치가 높은 상품이 대부분이다. 아무리 담배가 부피에 비해 가격이 높다고는 하지만, 훔쳐가기에 그보다 부적합한 물건도 별로 없으리라.
아도니스는 그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농업에 대해 잘 아신다면 말이지만, 담배는 땅의 힘을 상당히 소모하오. 그렇기 때문에 휴경이 필요하고, 다음 해에는 농사를 지을 수 없소. 즉 국내의 담배 가격이 상당히 오를 것이란 말이지요."
그렇다면 납득이 되었다. 시세 차익을 노린다면 가능하겠지. 그것도 창고 하나를 통째로 털었다면 금액도 무시 못할 것이고.
"큰일이네요. 되찾아야 할 텐데."
"그러게 말이오. 오시면서 보셨겠지만, 성 내 병사가 상당히 적지 않소이까? 모두들 도둑을 잡기 위해 파견을 나간 것이라오."
옆에선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지만, 안도혁의 귀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훔쳤다고? 내 것을? 도둑놈이?'
순간, 무시무시한 기세가 응접실 안을 가득 덮었다.
쿠쿠쿠쿠
땅이 흔들리고 공기가 진동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히 그렇게 느낄 정도로 살벌한 기세였다.
아무도 숨을 쉬지 못했다. 침조차 삼킬 수 없었다.
무거운 공기가 입을 여는 것조차 짓눌렀다.
안도혁의 몸에서 사방으로 살기가 폭사되었다. 마치 지상에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을 죽여 없애겠다는 듯, 기세는 흉폭하기 그지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응접실에 심장마비 환자가 세 명 생기겠다고 생각하며, 루나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도, 도혁······제발."
신음과도 같은 작은 음성. 그러나 안도혁의 정신을 일깨우기엔 충분했다.
"핫."
공기가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방 안을 자욱하게 채우던 느낌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루나가 안도혁의 등짝을 연신 때려댔다.
"죽을 뻔 했잖아! 진짜로 죽을 뻔 했잖아!"
"끄응······."
안도혁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방 안의 인물들에게 연신 고개를 숙여댔다. 특히 저쪽에서 게거품까지 물고 있던 로글란트 백작에겐 더더욱.
"정말 죄송합니다."
한참 동안이나 그는 꾸벅꾸벅 머리를 숙였다. 루나에게 등판을 열심히 맞아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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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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